방랑시인 김삿갓 (65)
*벽제관에서 옛일을 회상하며 만난 선풍 도인 (仙風道人)
북쪽으로 북쪽으로만 길을 가던 김삿갓은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길을 가던 초립동이를 보고 물었다.
"날이 저물어 어디선가 자고 가야 하겠는데, 이 부근에 절이나 서당 같은 것이 없느냐?"
"절이나 서당은 없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벽제관(碧蹄館)에 주막이 있어요."
김삿갓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래? 그럼 여기가 바로 벽제관이란 말이냐?"
이곳이 벽제관이라는 소리에, 김삿갓은 불현듯 임진왜란 당시의 고사(古事)가 떠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질풍 노도와 같이 진격해 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는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눈앞에 압록강을 건너면 명 나라 땅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때는 이미, 한음 이덕형이 명 나라로 구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명나라 조정의 분위기를 감지한 한음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나라 황제가 선뜻 원군을 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 정녕 우리 조선을 구원해 주실 수 없단 말씀입니까?"
한음은 담판을 시작했다.
"그렇소. 조선에 원군을 보낼 수 없소."
명나라 황제는 손 조차 내저으며 거절을 했다.
"우리 조선과 명 나라는 오랜 형제지국 입니다.
형제가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 모른 척하시다니오."
"조선국 사신은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마시오."
황제가 냉정하게 잘라서 말을 했다.
"음 ...."
그러자 한음은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은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찾는 수 밖에 없겠사옵니다."
"잘 생각했소. 스스로 싸워 이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오."
황제는 빙그레 웃기까지 하였다.
"폐하. 그 길이 어떤 길인 줄 아시옵니까?"
협박하는 어조로 한음이 말했다.
"내가 알 리 있겠소? 그래, 어떤 방법이오?"
명나라 황제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우리 조선이 목숨을 보존하는 길은 왜적 앞에 나아가 항복하는 길 뿐이옵니다."
한음은 황제를 은근히 협박했다.
"으흠, 그런 방법도 있겠구료."
황제는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였다.
"우리 조선이 왜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면 그들의 길잡이가 될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야, 뻔한 일이 아니겠소?"
"그리고 왜군은 우리를 길잡이 삼아, 이 명나라로 진군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폐하! ..."
"뭐라구?"
명나라 황제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며 호통을 쳤다.
"조선이 길잡이가 되어 우리 명 나라를 친다고? 감히 누구를 협박하느냐!
당장 저놈의 목을 쳐라!"
그러나 한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침착한 모습으로 황제를 설득했다.
"폐하, 소신을 처단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소신이 이곳에서 기한 내에 돌아가지 않으면 소신의 임금께서 부득불 왜군 앞에 나아가 항복하시게 될 것 이옵니다."
" 아니 저놈이 아직도 내 앞에서 함부로 지껄이고 있구나."
"폐하. 고정하시고 소신의 말을 더 들어 주소서. 소신의 임금이 왜군에게 항복을 하면, 오래도록 형제국으로 지낸 두 나라는 의리를 저버리게 됩니다.
폐하, 이같은 크나큰 수치를 역사에 남기지 마소서."
"무엇이?"
명나라 황제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폐하, 바라옵건데 그런 불행이 없도록 통촉해 주시옵소서 !"
한음 이덕형은 이같이 고하고 황제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러자 배석해 있던 명나라 신하가 말하는데,
"폐하, 조선국 사신의 목숨을 내건 충절이 갸륵하옵니다. 그의 말대로 조선의 군사를 길잡이로
왜군이 쳐들어 온다면 우리 명나라도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오니 통촉하시어 조선국에 원군을 보냄이 타당하다 사료되옵니다." 하였다.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신하들도 이구동성으로 아뢰는데, "원군을 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여송(李如松) 장군이 이끄는 5만의 군사는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성과 개성을 차례로 탈환했는데, 벽제관에서만은 왜군에게 크게 참패하였다.
승승장구하던 이여송은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한번 혼이 나자, 멀찍이 송도까지 퇴각하여 다시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전국(戰局)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왜군을 압박하여 무찔러야 할 판인데, 이여송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때 이여송의 접대관은 지혜롭기로 유명한, 명 나라에서 돌아온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었다.
이덕형은 이여송에게 속히 싸워 주기를 여러 차례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갖은 핑계를 대며 좀처럼 왜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덕형은 간청해 보다 못해, 나중에는 화가 동하여 이여송의 방에 있는 적벽도(赤壁圖) 병풍에 아래와 같은 시 한수를 써갈겼다.
승부란 한판의 바둑과도 같은 것
전쟁은 꾸물거림을 가장 꺼리오
알쾌라 적벽 싸움 전에 없던 공적은 손 장군이 책상을 찍던 그때부터요.
그 옛날 중국 삼국시대에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위왕(魏王) 조조(曺操)에게 크게 패한 후, 부하 장졸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모두가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모사 주유(周瑜)와 노숙(魯肅)만은 끝까지 싸울 것을 고집 하였다.
이에 손권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칼로 책상을 찍으며, 최후의 선언을 했다.
"우리는 옥쇄(玉碎)할 것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우자."
그리하여 손권은 그 유명한 적벽 대전에서 조조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겨 주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적벽도가 그려진 병풍에 한음이 휘갈겨 쓴 시의 뜻을 이여송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여송은 이덕형의 시를 보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왜군을 상대로 진격을 하게 되었고, 전황은 조명 연합군의 우위로 왜군을 점점 쇠퇴시켜 결국은 퇴각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김삿갓은 그 옛날, 이같은 한음의 훌륭한 시 한 편이 임진왜란으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벽제관으로 와서 어느 주막에 숙소를 정했다.
그 주막에는 70을 넘었다는 노인이 한 분 있었다. 하얀 구레나룻 수염이 배꼽에 닿을 정도로 탐스러워, 얼른 보기에도 선풍도인 (仙風道人)의 노인이었다.
김삿갓은 저녁을 먹고, 그 노인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 그때 젊은이 하나가 방으로 들어와 노인에게 인사를 올리며,
"저는 지금 한양에 다녀오는 길이옵니다. 한양에는 오늘 아침에 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한양에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리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랐다.
그러나 노인은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이, 태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양이 워낙 복잡한 곳이라, 괴상한 일이 생길 만도 하지."
괴상한 일이라는 것이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인지는 묻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김삿갓은 궁금하기 짝이 없어, 자기가 앞질러 물어 볼수 밖에 없었다.
"한양에 어떤 괴상한 일이 생겼다는 말이오?"
젊은이는 김삿갓에게 대답하는데,
"한양의 진산인 남산이 오늘 아침에 무너져 버렸다오."
"뭐요? 남산이 무너지다뇨.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김삿갓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주인 노인은 놀라기는 커녕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럴꺼야. 남산은 수 천년이나 오래된 산이니까. 무너진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지."
김삿갓은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노인장 ! 남산이 무너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아무리 오래 되었기로 산이 무너지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노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허기는 자네 말도 옳아. 산은 머리가 뾰족하고 밑은 넓적한데다가, 바위와 바위들이 서로 얽혀있어서, 좀처럼 무너지는 일이 없을 것이야."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노인장께서는 이 말도 옳다, 저 말도 옳다 ...
도무지 줏대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도대체 그런 애매한 말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