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 1부 황하의 영웅 (60)
제 1권 난세의 강
제9장 떨어지는 별 (3)
그 무렵, 중원을 발칵 뒤집을 만한 사건 하나가 남방(南方)에서 발생했다.
"나도 왕호(王號)를 사용하리라!"
초(楚)나라 군주 웅통(熊通)이 이렇게 선언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무렵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왕은 곧 하늘이나 마찬가지인 군주관(君主觀)을 가지고 있었다.
-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땅에는 두 명의 왕이 설 수 없다.
이것이 상식인 시대였다.
당연히 왕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주왕실의 천자(天子)뿐이었다.
제후가 아무리 강대하다 하더라도 주왕실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지 않는 한 왕(王)이라는 칭호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초(楚)나라가 왕호 사용을 선언하고 나섰으니,
주왕실을 비롯한 중원의 여러 제후국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파행을 저지른 초(楚)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여기서 잠시 초나라의 유래와 웅통(熊通)이 왕호 사용 선포를 하고 나서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초(楚)나라는 남방에 위치한 나라였다.
지금의 양쯔강 중류와 한수(漢水)일대,
즉 형주(荊州, 호남과 호북 일부지역)를 중심으로 문화를 발달시켜온 나라였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크게 다섯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장 먼저 황하 중류 일대- 호경, 혹은 낙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중원(中原)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중국의 문명은 이 중원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비롯하여 하(夏), 은(殷), 주(周)로 이어지는 왕조도
모두 이 중원을 기반으로 탄생한 문명국이다.
천하의 중심지 - 그래서 중원(中原)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단한 자긍심이 뒤따랐다.
제후시대에는 낙양을 수도로 하고 있는 주왕실을 중심으로
정, 위, 진(陳), 송나라 등의 제후국들이 그 주요세력이었다.
다음으로, 이들은 중국대륙을 동서남북 네개의 땅으로 나누었다.
크게는 중원의 한족을 제외한 모든 이민족을 오랑캐라 하여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부르기도 했고,
작게는 같은 한족의 제후국들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차별하기도 했다.
이들 사방의 제후국을 대략 살펴보면,
동쪽에는 제(齊)와 노(魯)나라가 위치해 있고, 서쪽에는 진(秦)나라가 버티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초(楚), 북쪽에는 진(晉)과 연(燕)이라는 나라가 제각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제후국들은 오랑캐라 불리는 이족(異族)은 아니었다.
그러나 낙양을 중심으로 한 중원국들에 비해 자긍심이 적었고,
주왕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은 것만은 분명했다.
이 중 특히 남방의 초(楚)나라는 '형만(荊蠻, 형 땅에 위치한 오랑캐)' 라 불릴 정도로 중원국들로부터 멸시와 냉대가 심했다.
아마도 그 구성원이 90퍼센트 이상이 한족(漢族)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기질 또한 한족과는 전혀 달랐다.
- 호남(湖南)사람과는 싸움을 하지 마라.
지금도 이런 말이 나돌 정도로 호북, 호남 사람들은 매사에 필사적이고 끈질긴 성향을 지녔다.
용감하고 강성했으며 결코 뒤로 물러설 줄 물랐다.
이런 전투적인 기질은 모두 중원인들의 멸시와 냉대와 차별적인 대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초나라 조상은 오제(五帝)중의 한 사람인 전욱까지 거슬러올라가나 이는 믿을 수가 없다.
후대에 가서 조작한 계보임이 틀림없다.
초나라 계보가 어느 정도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한 때는 주문왕(周文王) 때에 이르러서이다.
즉 죽웅이라는 사람이 주문왕의 후견인역을 맡았다고 하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 아들 돌보듯 주문왕(周文王)을 섬기다.
아마도 그는 주문왕이 소년 시절이었을 적에 보육을 책임졌었던 것 같다.
그러나 죽웅은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 웅려(熊麗)에 이르러 성을 웅(熊)으로 바꾸었다.
웅려는 웅광(熊狂)을 낳았고, 웅광은 웅역(熊繹)을 낳았다.
웅역은 주무왕의 아들인 주성왕(周成王)시기에 살았다.
이 때 주성왕은 제2차로 창업공신의 후손들에게 작위와 봉토를 하사했는데,
이 논공행상에서 웅역은 자작(子爵)에 임명되고 초나라 땅을 받아 단양(丹陽)에 도읍을 정했다.
단양은 지금은 호북성 자귀현 동남쪽 일대이다.
그러나 말이 봉토일 뿐 그 무렵의 초(楚) 땅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묘족(苗族) 등 여러 이족들만 사는 버림받은 땅이었다.
어찌되었든 이때부터 '형만(荊蠻)' 혹은 '초만(楚蠻)'이라 불리던 초나라는
그러나 중원국으로부터의 멸시와 냉대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어느 때인가 주성왕은 섬서성 남쪽 기양(岐陽)에서 회맹을 한 적이 있었다.
회맹이란 모든 제후들을 불러 제사를 올리거나 회의하는 일을 말한다.
왕실의 권위를 확인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무시하고 참석하지 않으면 주왕실의 토벌을 각오해야 한다.
주성왕 때만 하더라도 주왕실의 전성기였다.
모든 제후들이 기양(岐陽)으로 모였다.
초나라 제후인 웅역(熊繹)도 기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여기서 웅역(熊繹)은 평생의 한이 될 정도의 모욕을 받았다.
기양 회맹은 제사가 목적이었는데, 웅역은 이 제사 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형만(荊蠻), 즉 오랑캐라는 이유에서였다.
모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초나라 제후는 요(燎)를 지켜라.
요(燎)란 화톳불이다.
고작 불을 피우고 지키는 일을 맡은 것이었다.
앞서 얘기했듯이, 초나라 사람들은 호전적이기도 하였거니와
장강(長江,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독특한 문명에 대해 자긍심이 무척 강했다.
웅역(熊繹)은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가슴이 타오르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잘 참았다.
끝까지 '요(燎)'를 잘 지켰다.
그러고는 초나라로 돌아왔다.
- 내가 참은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나의 후손들은 힘을 길러 결코 나와 같은 모욕을 당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이 말을 버릇처럼 내뱉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
주왕실의 세력은 점점 약해졌다.
반면 초(楚)나라는 이를 악물고 힘을 길렀다.
초나라 주요 영토는 한수와 장강이 만나는 지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한구(漢口)라 불리는 곳이다.
지금의 무한(武漢)이다.
무한시는 한양(漢陽)과 무창(武昌)을 합친 도시이다.
한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다.
초(楚)나라 입장에서 보면 북방의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야성적인 힘과 한수를 타고 내려오는 중원의 문명을 조화롭게 섞었다.
그들은 부쩍부쩍 힘이 세지기 시작했다.
쇠락하기 시작한 주왕실은 주이왕(周夷王) 시대에 이르러 부쩍 약해졌다.
이때 초나라 수장은 웅거(熊渠)라는 사람이었다.
웅거는 웅역의 5대손이다.
그는 야심에 찬 사내였다.
정치적, 군사적 수완도 대단했다.
장강과 한수 일대의 백성들을 모두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여들였다.
그는 자신감이 생겼다.
5대조인 웅역(熊繹)이 당한 모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 이제야 주왕실에 복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고는 세 아들을 모두 왕으로 봉했다.
큰아들인 강(康)을 구단왕(句亶王), 둘째 아들인 홍(紅)을 악왕(鄂王), 막내인 집자(執疵)를 월장왕(越章王)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은 오직 하나뿐이어야 하는 이 시대에 이것은 천지개벽만큼이나 놀랄 만한 일이었다.
또한 주왕실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도 했다.
주왕실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에 대한 문책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웅거는 오히려 큰소리쳤다.
- 나는 형만(荊蠻)이다.
중원 칭호에 더 이상 관계하지 않겠다.
나는 오랑캐이기 때문에 주왕실의 관례 따위는 모른다 -
이런 배짱이었다.
독립선언이기도 했다.
이런 막무가내식의 대응에 주왕실은 어이가 없었는가.
아니면 초나라를 정벌할 힘이 없었음인가.
- 참으로 오랑캐는 못말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