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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옛집-집에는 사람이 산다.(최성호)
1. 연혁
최순우 옛집은 국내 최초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 결실을 맺은 첫 번째 집이다. 주변 개발을 위해 남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있던 집을 최순우를 기리는 사람들이 십시일반해서 이 집을 매입해 재개발의 광풍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런 점에 우리나라 문화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집으로 최순우 선생이 살았던 집이란 것 이상의 가치가 있는 집이다. 현재 이집은 내셔널 트러스트 재단이 관리 하고 있다.
성북동은 1920년대 경성으로 편입되면서 급격하게 발전된 곳이다. 이후 한옥이 많이 지어진다. 최순우 옛집역시 이런 개발 시기에 지어진 한옥이다. 현재 최순우 옛집은 대지면적 395㎡(119.5평), 건물면적 101.92㎡(30.8평) 건폐율 26%다. 지번을 보면 126-20, 126-8, 128-18의 세필지로 돼있다. 126-20은 1937년 126-8에서 분할된 것이다.(보고서 33/토지대장 참조)
이후 1976년 최희순崔熙淳으로 바뀌는데 ‘희순’은 최순우선생의 본명이라고 한다. 이후 최순우 선생이 돌아가신 후인 1985년 2월에 딸인 최수정崔樹貞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 딸이 미국으로 이민가고 최순우 부인도 딸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자 내셔널트러스트에서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최순우 옛집이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지 알져지지 않았다. 그러나 손옥점이 토지 소유주와 건축물 소유주로 동시에 등장하는 시기가 이 집이 지어진 시점이 아닐까 한다. 보고서상에 나온 건축물대장 기록으로 보면 건물 소유권이 손옥점으로 등재되는 것이 1939년 12월 18일이고 토지소유권이 손옥점으로 이전된 것이 1940년 1월 6일이다.
건축물 소유와 토지 소유의 등재기간 차이가 한 달도 되지 않는다. 이것으로 유추해보면 손옥점이 1938년 말이나 39년 초 토지를 매입하고 토지 미등기 상태에서 집을 지은 후 집과 대지를 각각 등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따라서 최순우 옛집은 1939년에 지어진 것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2. 건축
이집은 30년대 유행하던 개발업자의 한옥 수준은 넘어선 한옥이다. 목재나 치목한 목수 수준이 막 지은 집이 아니다. 이 집 대지가 120평이다. 이런 넓은 대지를 구매한 사람도 재력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집을 짓는 것이다. 그런 것은 보고서에 있는 안방과 건넌방에 설치된 불발기분합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안방과 건넌방의 위계에 따라 안방은 정자살로 건넌방은 용자살을 사용해 만들었다. 그리고 안방은 창살이 노출되게 했고, 건넌방은 창호지로 가려 맹장지로 만들었다. 이런 것까지 신경쓸 정도로 많이 생각해서 지은 집이다. 그런데 현재는 이 창호가 사라지고 일반 맹장지로 만들었다. 아쉬운 부분이다.
이 집은 짓고 나서 두 번 크게 변화한다. 첫 번째는 1976년 최순우 선생이 이 집을 사서 개조한 것이고 두 번째는 내셔널트러스트가 집을 매입하여 전시에 적합한 건물로 고쳤을 때다. 1939년 처음 집을 짓고 1976년 최순우 선생이 집을 매입할 때까지 3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40년 가까운 시간이니 어느 정도 개조가 있었을 것이지만 기록이 없으니 확인 할 수 없다.
가장 큰 변화는 최순우 선생이 이 집을 구입한 후 이뤄졌다. 집을 개조한 가장 큰 이유가 손님치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사랑방과 안방 사이에 있었던 부엌을 없애고, 대청 뒤쪽을 한 칸 늘여 부엌을 옮겼다. 정확히 얼마나 크게 확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고서 상의 내용으로 보면 안채의 2/3정도 면적이 늘어났다.
최순우 선생이 기거하는 사랑방과 안방사이는 미서기 문만 두었다. 이렇게 한 것은 쉽게 방을 넓혀 많은 사람을 치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손님이 많다보면 부엌도 넓어야 한다. 그래서 대청 뒤쪽 전체를 한 칸 늘인 것이 아닐까 한다. 현재 이 집에는 굴뚝이 없다. 학예사 말로는 증축하면서 보일러를 들였다고 했다. 그러니 굴뚝이 사라진 것이다.
학예사가 현재 장독대가 후원에 있지만 원래는 지금의 반대쪽인 도로변에 있었다고 한다. 대지 상황으로 보면 학예사 말이 맞는데 보고서 상에 있는 최순우 선생이 살던 때의 평면을 보면 문이 없다. 장독과 부엌은 쉽게 오갈 수 있어야 하는데 보고서 도면과 맞지 않는다. 아마도 건넌방 쪽에도 문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두 번째 변화는 2003년 내셔널트러스트가 전시를 목적으로 집을 개조하면서 변한 것이다. 세 가지가 변했다. 첫째는 대문이 있는 행랑을 전시장 확보를 위해 두 칸 더 늘린 것이다. 그렇다 보니 안마당이 답답해졌고 조망이 사라졌다. 예전엔 사랑방에서 전망을 즐길 수 있었는데 이젠 그런 전망을 즐길 수 없게 됐다.
두 번째는 대문 부분이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대문이 안쪽에 달린 것이 아니라. 대문이 전면으로 나가고 그 앞에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어쨌든 2003년 건물을 증축하며 허가 과정에서 지적을 받아 고쳤을 것이다. 문 앞에 있던 계단은 대지 경계를 넘어 도로에 설치된 것이니 건축허가에서 대지 경계를 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현재처럼 고친 것이다.
세 번째는 최순우 선생이 늘였던 부분을 철거하고 새롭게 고친 것이다. 내용을 보면 현재 사무실로 쓰고 있는 부분 뒤쪽에 한 칸 늘렸던 것을 철거 했고, 과거 최순우 선생이 한 칸 늘였던 부엌부분을 반 칸만 늘리고 한옥으로 고쳤다. 이 부분은 과거에는 벽돌로 지어졌던 것이라 한다. 어쨌든 이런 변화로 살림집이란 기능엔 맞지 않는 집이 됐다.
이렇게 된 것은 이전에 증축한 부분이 허가 없이 증축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금은 임의로 집을 늘릴 수 없다. 건축물대장상에도 증축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최순우 선생 때 증축한 것이다. 그것을 법에 맞춰 원상 복구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안채 뒤 부분은 반 칸만 증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순우 선생 때처럼 한 칸을 증축하면 대지경계와 맞붙기 때문에 건축법상 불가하다. 그리고 관람자 동선을 고려하면 지금처럼 반 칸 정도 증축하는 것이 적당해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은 건축법과 관람자 동선 등을 고려해서 증축한 것이다.
마지막 최근에 한 번 더 손을 본 것 같다. 이것은 보고서가 나온 2008년 이후다. 보고서에서는 안채 목재가 손을 오래 된 느낌인데 현 상태는 목재를 한 꺼풀 벗겨내고 위에 다시 칠을 한 것 같았다. 물어보니 학예사도 그렇다고 했다. 하여간 마지막 부분 손질은 하려면 전체를 하든지 아니면 그대로 놔뒀어야 했다. 다른 건물과 이질적인 것이 눈에 거슬린다.
이 집은 최순우 선생이 1976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사신 집이다. ‘이 집을 최순우 선생이 왜 샀을까’에 대해서 이 집을 구매하고 안방과 사랑방사이에 있었던 부엌을 옮겼다는 설명을 듣고 알게 됐다. 우선 이 집 대지가 120평으로 크다. 도심에서 이런 크기의 대지가 흔치 않다. 주변 대지와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다.
두 번째는 한옥이 꽤 수준이 있다는 것도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집 수준으로 보면 최순우 선생이 감식안에 걸 맞는 집이다. 세 번째는 대지가 넓어 선생이 원하는 정원을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에는 최순우 선생의 손길이 많이 갔음을 느끼게 하는 석물들이 많다. 이런 것을 보면 말년에 이곳을 가꾸며 유유자적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랑채 앞에는 당신이 쓴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란 현판이, 뒤쪽에는 ‘오수당午睡堂’이란 당호를 쓴 현판이 붙어있다. 당호가 ‘낮잠을 즐기는 곳’이란 뜻이고, 앞에 걸린 현판이 ‘문을 걸어 잠그니 곧 깊은 산골’이란 뜻이니 최순우 선생이 말년에 이곳을 가꾸며 유유자적하려던 생각이 드러나고 있다.
네 번째는 손님을 치르기에 좋은 구조라 본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부엌을 방으로 만들면서 4칸을 터서 쓸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이 최순우 선생이 이 집을 산 이유가 아닐까 한다.
3. 아쉬움
‘전시주택’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홍보를 위해 지은 집을 말한다. 그런 집에서는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없다. 지금 최순우 옛집이 그렇게 됐다. 집은 이런 저런 이유로 변화한다. 예전에 살림집이었던 것이 가게로 전시장으로 개조되는 경우는 많다. 유럽에 가면 ‘누구누구 생가’라고 하면서 사람의 전기를 전시하는 건물이 많다.
그런 경우 그가 생전에 살던 모습대로 꾸며 놓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살림집이었다는 기본 목적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다. 최순우 옛집도 그런 목표 하에 개조됐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렇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면 왜 그렇게 됐는지 설명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설명은 어느 곳에도 없다.
최순우 선생이 어떻게 살았다는 것 역시 최순우 선생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다. 앞서 이 집을 최순우 선생이 왜 선택했을까 하는 내 생각을 썼다. 집을 통해 최순우 선생의 삶을 이해하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집에서도 그런 부분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집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앞서 말한 분합문도 이 집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사라져버렸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전 최순우 선생이 살던 집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집을 고쳐짓기 전, 이전 집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했다. 그런데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보고서에서도 이전 집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유추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내셔널트러스트는 ‘우리에게 남겨진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역사적 인물의 흔적을 미래세대에게 영원히 남겨주기 위한 것’(보고서) 이라 한다. 그런 관점이라면 집에 대한 기록도 제대로 남겨졌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최순우 옛집에서 느낀 가장 아쉬운 점이다.
추신 1 : 최순우 옛집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 문에 걸려 있는 잠금장치다. 현장에서 아무리 봐도 걸 수 있는 장치가 없다. 학예사에게 물어보려다가 깜빡했다.
추신 2 : ‘최순우 옛집’은 예전에 방문한 ‘딜쿠샤’라는 집과 여러 모로 대비된다. 딜쿠샤를 지금과 같이 개수한 사람들은 딜쿠샤를 지었을 당시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재현하려 했다. 그런 노력이 이곳에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딜쿠샤에 비해 최순우 선생이 사셨을 때는 그리 오래 전이 아니었다.
참고문헌
- 최순우 옛집 기록화조사보고서/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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