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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21세기를 '과잉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사람들에게 '과잉은 이제 삶의 방식, 존재 방식 자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세계가 현실을 대치하면서 시간도 정보에 대한 장애도 사라졌고, 오히려 그러한 세상에서 '너무 많은 대상들이 주어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진짜 대상은 판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저자의 논의가 부분적인 현상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킨다는 혐의가 짙게 풍기지만, 실상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그에 대한 진단으로서는 설득력이 높다고 여겨진다. 길을 가면서도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어떤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는 잠시 휴대폰이 아닌 주위를 살피면서 안전에 유의해야만 하는데도, 그 잠시 동안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또한 휴대폰에 과잉으로 몰입된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첫 번째 항목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잉주체'임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풀어가고 있다. 과잉은 단순히 '너무 많음'이라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기준을 철폐함으로써 세계 전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대증상이자 집단충동'이라고 설명한다. 나와 타인의 구분이 어렵고,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도 이미 경계가 흐려진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지난 20세기는 '경계를 긋는 시대'였다면, 21세기의 현재는 사람들이 '지킬 경계가 없'으며 '경계가 없으므로 행동 대신 과잉행동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규정한다. 결국 '경계감의 해체는 판단력의 해체'를 초래하고, 현대사회에서 '과잉은 자신이 정치인지를 판별하지 못하도록 정치혐오증과 극단주의를 양산해낸다'고 설명한다. 가짜뉴스를 양산해내는 언론들과 이에 편승하는 각종 미디어 환경 역시 이러한 현상을 증폭시킨다고 이해된다.
저자는 과잉의 병적 증후로서 두 번째 항목에서 'ADHD의 시간'을 거론하는데, 이 증상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라고 번역된다. 흔히 어린아이들에게 진단되는 ADHD 증후군을 '시간결핍증'과 연결시키며, 과거와 미래의 삭제를 통한 시간감각의 해체로서 많은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증세라고 진단한다. 그리하여 일중독과 쇼핑중독,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이른바 '관종'이나 악플달기 등의 과잉행동도 '순간만이 그에게 남은 모든 시간이기에 과잉행동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ADHD 증후군’은 주의력이 결핍된 일부 아동에게서만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라, 이미 경계를 잃어버린 많은 현대인들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현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공황장애의 무게'라는 세 번째 항목에서, 방향감각의 상실 등으로 발현되는 공황장애도 이러한 경계의 소멸로 발생하는 병리적 현상임을 서술하고 있다. 'SNS 조울증'이라는 항목에서도 현대인들이 널리 이용하는 SNS가 오히려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활용되기보다, 인증샷을 올리고 '좋아요'라는 클릭을 갈구하는 창구로 전락했다고 서술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실재로부터 기쁨과 슬픔을, 진실도 대상도 없는 조증과 울증으로 변환하고 비트화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소통하기보다 인터넷을 통해서 타인들과 소통하는 것이 일상화되다 보니, SNS에 글을 올리고 댓글이나 ‘좋아요’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우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역시 현실과 인터넷의 경계가 해체된 상황에서 초래되는 과잉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최근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연쇄살인과 묻지마 범죄'의 차이점을 다룬 다섯 번째 항목에서는, 이를 각각 범죄자의 기준과 경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묻지마 범죄‘를 일컬어 '모든 기준과 경계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써, 까닭 없이 상대를 없애버리려는 '소거와 제거'의 충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논하고 있다. 과거의 ’연쇄살인‘에는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의도가 존재하고, 범인마다의 특정 행동(시그니춰)이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에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는 증거가 너무 쉽게 발견되고, 그저 상대방을 나의 현실에서 '소거 혹은 삭제'하겠다는 단순한 의도가 개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나와 세상과의 경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과잉 행동‘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이상의 증상들이 대체로 개인들에게 나타나는 증후라고 한다면, '폭식증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의 무한증식력이나 자신의 민주적 주권조차도 선택적 정의라는 기준으로 결정짓는 '경계선 주권 장애’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확대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과잉행동으로 나타난 이러한 현상에 대처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과잉에 저항하기'라고 하겠는데, 타인과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주체를 회복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선 자신과 상대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며, 지워진 경계가 아닌 '대상의 회복'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서로 '경계를 지켜야 비로소 타자를 마주친다'고 전제한다. 저자는 그것을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아기가 어머니를 신뢰하듯이 상대를 신뢰할 수 있을 때 과잉행동은 조절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밀착하기보다,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을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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