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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읽었던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라는 시는 나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때는 이 시를 암송할 정도로 좋아했고, 지금은 내용은 기억나지만 외워서 암송할 정도는 아니다. ‘사평역에서’가 수록된 그의 첫 시집을 포함하여, 새로운 시집이 출간될 때마다 구입할 정도로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10여 년 전 직장을 순천으로 옮기며, 같은 캠퍼스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직장에 근무하게 되면서, 나는 그를 찾아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끔 순천의 맛집을 탐방하면서 그를 만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입맛까지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동안 시보다 산문을 쓰고 열심히 책을 내고 있던 그에게, 어느 술집에선가 학생들과 함께 있던 시인과 합석을 하게 되면서 ‘다시’ 그의 시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금년 초에 발간된 그의 새로운 시집을 ‘드디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곽재구 시인의 시세계가 익숙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갑자기 시집의 제목에 ‘푸른 용’이 등장한 것도 낯설음을 재촉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한동안 그는 인도를 비롯한 외국을 자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낯선 이국의 풍경이 새로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배경을 이루는 것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를 쓰기 시작하던 무렵의 추억을 떠올리며, 윤동주와 정지용 그리고 백석 등 그가 사랑하던 시인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윤동주의 시집 초판본을 도서관에서 몰래 가져왔다가 사흘 만에 다시 돌려줬지만,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슬펐다는 그의 심정이 그대로 그려지는 듯했다.
도서관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을 훔쳤지
밤새 경찰들이
내가 살던 판잣집을 포위하고
도적은 나와라
도적은 나와라
마이크로 부르는 악몽에 시달렸지
다음날 아침
도서관 서가에 가만히 동주를 세워두고
다음날도
다음날도
그 앞에 서서 보았네
보다가
보다가
당신만큼 쓸쓸하고 순정한 시를 쓰리라
혼자 다짐했네
(시 ‘고교 1학년’ 전문)
그 이후 그는 윤동주와 김소월과 정지용의 시를 필사하며, 그들과 같은 ‘시를 쓰리라 / 혼자 다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시인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초심이 생각났던 것일까? 부쩍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에는 다양한 시인과 소설가들이 호명되고, 그들을 만났던 시절을 떠올리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덕분에 나 역시 국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다짐하던 무렵, 특히 이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시인은 어디선가 용이라는 뜻의 고유어인 ‘미르’라는 지명을 만나서, 그곳을 흐르는 강에 ‘미리내’(은하수)라는 명칭을 붙였던 듯하다. 아마도 윤동주의 고향인 중국의 길림성에 있는 지명도 ‘용정(龍井)’이기에, 제목의 ‘푸른 용’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몇 년 전 길림에 있던 그의 모교에 가서, 동료들과 함께 그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나와 시인에게 모두 익숙한 순천의 동천과 와온 해변도 시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무엇보다 시집의 뒷부분에 ‘ㄱ’부터 ‘ㅎ’, 그리고 ‘ㅏ’부터 ‘l’까지 한극 자모의 순서에 맞춰 쓴 산문의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시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특히 이 산문을 통해서 그의 심성과 시인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어느 정도 익숙하고 또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드는 시집이지만, 만약 시인을 가까운 시일에 만난다면 ‘잘 읽었노라’고 덕담을 해줘야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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