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부분에서 출발해서 전체로 가는 식으로 생각할 줄만 알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생각은 할 줄 모릅니다(7-14세를 위한 교육예술, 2022, 154)."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필자는 학교수업을 받으면서 '이상하다'는 생각, '아 이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한 부분이 있다. 물론 당시에는 생각만 했지,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도 몰랐다. 예를 들어 필자는 숲에 들어갈 경우, 먼저 숲을 바라보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나무 사이를 걸어간다. 즉 숲 전체를 바라본 후 나무 하나 하나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 수업에서도 숲을 먼저 보기를 내심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학교수업에서는 숲을 보여주지 않고 나무를 먼저 보여주었다. 그 당시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느냐면,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친구들 얼굴을 둘러보았을 정도이다. 그런데 친구들 얼굴에서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문제인가'라는 생각도 짧게 하였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었을까. 말하지 않아도 필자 역시 숲을 기대하지 않고 나무를 보았다.
필자는 학교교육을 계속 받았으므로 더 이상 숲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수 없었다. 이는 결국 필자의 시선을 좁게 만들어서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정신은 전체를 파악하고 부분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 속성이다. 예컨대 인간이 무엇을 보고 놀랄 경우 온 몸이 놀란다. 즉 어느 한 부분만 놀라지는 않는다. 이는 정신이 온 몸에 분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정신이 온 몸에 분포되어 있기에 '전체'가 정신이다. 따라서 정신은 언제나 전체를 먼저 파악한다. 어느 부분만 볼 경우 보는 그 부분만 움직일 것이므로 전체에 분포된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정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정신은 발달하지 않는다. 요컨대 현재 이루어지는 교육방식인 부분으로 접근할 경우, 정신은 발달하기 어렵다. 전체를 파악해서 부분으로 가는 사고방식은 '13, 14세기 때만 해도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한다(위 책, 153). 이런 접근방식이 15세기 과학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확산되어서, 이제는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접근방식을 당연하게 인식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실재가 전혀 아닌 것을 셈하기에 집어넣으면 아이들은 그런 사고방식을 수용해서 인생에 들여갑니다(위 책, 219)." 슈타이너의 주장인데, 슈타이너가 든 예는 셈하기 예에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예를 들어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우이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모든 부분에서 학교교육이 아이들의 평생 사고방식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만약 부분으로 현재와 같이 접근 할 경우 인간은 큰 기계를 보지 못하고, 그 기계의 부속품인 나사로 전락하게 된다. 평생 나사로 전락하는 삶을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곧 그동안 교육받은 결과이다. 내가 만약 창의력이 부족하다면, 그 부분에서 온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서 자신의 정신을 파악해야 자신의 삶이 앞으로 나아간다. 정신이 모든 부분인 물질에 앞서므로 정신을 먼저 발달시켜야 삶이 따라오는 것이다. 필자 역시 과거 학교에서 궁금했던 점을 슈타이너에게서 답을 얻는 일이, 곧 필자의 정신을 발달시키는 일이다.
그러면 왜 인류는 인간에게서 정신을 배제했을까? 현 인류는 인간을 육체, 영혼, 정신(슈타이너의 분류)으로 나누지 않고 신체와 영혼, 또는 신체와 정신으로 분류해서, 영혼과 정신을 같은 의미로 애매모호하게 취급, 정신을 인간에게서 배제했다. 정신을 배제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서기 869년의 공의회에서 가톨릭교회 주교들이 인간이 단지 신체와 영혼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영혼이 정신적인 것을 그 특성으로서 함유한다고 함으로써 영혼이 다른 면으로 역시 정신적인 것이라고 공표하였습니다(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2007, 223)." 그래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정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정신의 발달 또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정신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정신이 배제됨으로써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정신을 배제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음은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는 교육 경력이 10년 정도 즈음에 에테르체를 직접 가르친 적이 있다. 인간의 몸 주위에는 에테르체가 인간을 감싸고 있기 떄문에 집중하면 에테르체를 감지할 수가 있다. 특히 손과 손 사이, 손과 손을 마주하게 한 다음에 두 손을 가까이 하거나 또 멀리하면 손과 손사이의 에테르체, 기를 감지한다. 두 손을 서로 가까이 하면 마치 같은 자석이 밀어내는 것처럼 두 손은 서로 밀어낸다. 그리고 멀리하면 다른 자석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두 손은 서로 끌어 당긴다. 대부분 아이들이 1분 정도만 하면 느낀다.
인간(아이들)이 에테르체를 감지하면 에테르체가 활성화된다. 에테르체의 속성인 자유로움, 또 생명력이 활성화되어서 활동 또한 왕성해진다.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되는 것이 눈으로 보여질 정도이다. 요컨대 아이들의 집중력이 좋아지고, 밝고, 활기찬 것은 좋은데, 그것을 통제하기가 조금씩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 두었는데, 당시는 그 까닭을 몰랐다. 그런데 슈타이너의 책에서 같은 문제를 발견하였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명상과 집중이 잘못되면 이기적으로 흐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의 에테르체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정신을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정신을 활용하면 자신의 본래 에너지가 증폭되어서 힘이 넘친다. 그런데 이 힘을 올바르게 활용해야지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에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도 망치고 주위사람들도 망치게 된다. 그래서 정신의 힘을 활용하기 전에 먼저 선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 방법이 고난을 겪는 것이고, 고난을 통해서 정신세계에 입문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를 향한 너의 인식을 한 걸음 진전시킬려면 선을 지향하는 너의 마음을 세 걸음 진전시켜야 한다'(초감각적 세계인식에 이르는 길, 2016, 67).
또 아이들이 에테르체를 감지하면 정신세계에도 입문하게 된다. 시련을 겪지 않고 정신세계에 입문할 경우에도 부작용이 생길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사항이 인류로 하여금 비밀에 붙여져서 전해온 것이다. 정신을 활용하면 확실하게 인간의 힘은 증푹된다. 세계적으로 인간을 넘어서 활약하는 사람들 역시 정신의 힘을 활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신의 힘을 활용할 생각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정신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가 궁금하다. 현 인류 사고방식으로 정신을 배제하지 말고, 또 정신세계에 바로 연결해서도 안된다. 반드시 우회로를 통해야 한다. 그 방법이 인간발달 단계에 따른 방법이다. 인간은 태어나 이루어지는 발달이 평생동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떄문에 반드시 인간 발달단계에 따라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어린 시절에 그저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을 배우면 나중의 인생에서 사지와 유기체의 다른 부분은 그 자체적인 몫을 못하게 되어서 예를 들어 관절염같은 것이 걸립니다(7-14세를 위한 교육, 2022, 164)." 많은 사람이 관절염에 걸리는데 혹시 어린 시절 교육으로 인하여 걸린 것이 아닌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는 것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자세히 자신을 바라보면 이해할 수가 있다.
생각에 좌우되지 말고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생각은 상이므로 거울만 치우면 사라진다. 문제는 생각과 마음이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을 하면 산란했던 마음, 생각이 가라앉는다. 생각이 가라앉으면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하는 생각, 마음을 읽는다. 이것이 초감각적 세계, 정신세계로의 입문이다. 정신세계는 물질세계와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같이 존재한다. 다만 내가 모를 뿐이다.
문제는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교사의 정신세계가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성장시켜야 한다. 이것이 지식이나, 교육방법보다 중요하다. 그리하여 슈타이너가 주장하기를 교육의 성패가 오로지 교사의 영혼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필자와 같이 내부의 환경과 다른 환경을 접하면 이것이 무의식에 쌓여서 나중에는 폭력으로 전환된다. 아이들의 폭력은 그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의식에 잠재된 짜증과 분노의 결과이다. 결론은 인간이 교육을 통하여 거의 모든 것이 좌우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