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
한해 동안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모든 분들의 삶을 추모합니다. 특별히 올해는 사랑하는 경기 씨를 가슴에 묻기도 했고 동녘 식구들 중에 사랑하는 형제들을 모신 분들도 계십니다. 이분들의 삶과 영혼을 추모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살기에서 알게 된 부산에서 노숙인 센터를 운영하셨던 김홍술 목사님이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소천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살기가 가는 곳이면 어느곳 하나 빠지지 않고 다니시고 노숙인들 사이에도 위계가 있는데 그 갈굼의 마지막 단계에 항상 정신지체자들이 있다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성자시라는 겁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상한 감정을 다 수용하시면서 헤헤헤 하면서 웃음으로 받아넘기면 순간 모든 사람들의 진지함이 무장해제 당하신다고 그래서 그분은 이분들을 성자처럼 모시고 사셨다고 합니다. 소풍처럼 왔다가 아무 바램도 없이 가장 약한자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셨던 목사님의 영혼을 추모합니다.
올해는 인류의 영적 스승이셨던 틱낫한 스님이 입적하신 해이기도 하고 13분의 소방공무원들이 현장에서 경험한 트라우마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고 합니다. 연예계에서는 잘 아시는 배우 강수연 님 전 국민의 어르신이셨던 전국노래자랑 엠씨 송해 어르신이 돌아가신 해이기도 합니다. 그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 <종로이웃성소수자들>이 걸어놓으신 송해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동안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문구가 여전히 생생합니다. 이분들의 영혼을 추모합니다.
특별히 올해는 중대재해특별법이 생겨나 실행에 옮겨진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재로 인한 사망자를 줄일 수 있을까 희망을 가진 한해이기도 했지만 9월 현재 660명이 넘어서면서 작년과 큰 변화가 없어보입니다. 그러면서 식품혼합기에 노동자가 사망하고 급기야는 안전시스템 부재로 인하여 길거리에서 158명의 젊은 영혼들을 떠나보내는 참사를 경험한 한해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분들의 영혼을 추모합니다.
우리가 함께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도 연예인도 스님도 정치인도 그 어떤 사람이든 삶이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제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 두차례나 능곡 모종집 사장님께서 잘 익은 홍시를 주셨습니다. 가지고 와서 연구소 식구들과 함께 먹는데 얼마나 잘 익었는지 먹으면서도 먹는 게 아깝고 그 먹을 때 하나하나의 향과 맛과 감촉과 그 순간의 느낌까지 느끼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수십 수천 수만 수억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이런 순간을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반드시 옵니다. 미국에 있을 때 하루종일 요세미티라는 국립공원에 가서 고기도 굽고 도시락도 까먹고 놀다가 늦은 오후에 서쪽을 향해서 드라이브를 하면서 내려오면 정말 황홀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산위에서 내려다보면 온갖 대지의 작물들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지고 그 위를 노을의 황금물결이 덮어줍니다. 가운데로는 레드카페와 같이 일자로 길게 자동차 로드가 펼쳐지고 그 길을 달리면서 황혼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습니다. 그 몇 번의 기억이 강열이 박혀서 미국을 떠나온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그런 황홀했던 생의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도 떠올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순간들이 옵니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지는 소중한 인연 연제헌 집사님이 계셨을때는 그분이 계셨기 때문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결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없기 때문에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결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추수감사절예배를 드리면서 너무 감사했는데 조성길 집사님이 없으셨으면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일이예요. 각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계시기에 맛볼 수 있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분이 안계시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삶의 결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괴롭고 힘들찌라도 찬란한 생의 시간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있을 때 함께 할 수 있을 때 그 충만한 시간들을 마음껏 느끼라고 모든 떠난 사람들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할 일이 생각 나거든 지금 당장 하십시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들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후회하는 것을 물어보면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먹고 사는 게 바빠서 정신 없이 사느라 내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더 마음껏 원 없이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웨슬리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라고 고백합니다. 광할한 우주의 시간속에서 지금같은 형태로써의 존재의 시간은 찰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찰라에 지나지 않는 시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몸의 감각, 마음의 감각, 육체의 감각을 가지고 사랑하고 표현하고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헨리나우웬은 말합니다. 오늘 여기에 모셔진 모든 분들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걸고 마음껏 사랑의 시간을 충만히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떠난 자리에 유일하게 남는 건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들입니다. 그것이 오늘 사도바울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썩지 않은 영원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처음 오셨던 우리 행여님의 이야기를 나누어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누고자 합니다. 이분의 아버님께서 올 2월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만해도 너무 경황이 없어 눈물 한방울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주 대금 연주하셨던 장세철님께서 다향이라는 곡을 연주해주셨지요. 그런데 그 다향이라는 음악이 연주되면서 그때 민채를 안고 있었는데 마치 아버님이 자신을 안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이렇게 키우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시더라는 거죠. 이런게 일종의 신비경험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 음악과 사랑과 아버지와 나와 살아왔던 삶의 시간들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하나되는 경험을 하신 거죠.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육신은 만져지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아버님께서 만져주시고 키워주시고 함께 하셨던 모든 삶의 시간들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홀로이 살아가는 삶의 시간들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답게 지켜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의 삶은 기억과 추모를 통해 부활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분들의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이분들이 주신 삶의 소중한 것들을 우리안에서 살아가는 한 이분들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분들 중 어떤 죽음은 우리와 이 사회에 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숨져간 모든 사람들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고 숭고히 여겨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일뿐만아니라 그들의 억울한 죽음조차도 값진 죽음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망각하고 똑같은 죽음의 행렬을 반복하면 이들의 죽음을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성전의 만행을 온천하에 들춰내고 종교의 근본의 길들을 호소했으면 오히려 상을 주고 칭찬을 받으셨어야하는 일이지만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몰려 손쓸틈도 없이 그에게 주어진 선물은 잔인한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죽음을 헛되어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꿈꾸었던 세상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몸소 몸으로 헌신하며 만들어갔던 세상을 결코 작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활은 산자들의 몫입니다. 모든 억울하고 의롭고 진실되고 본질적인 삶을 향한 아름다운삶을 살아냈던 분들의 부활은 결국 산자들의 몫입니다.
찬란한 생명의 봄은 가을에 떠난 자들의 삶과 기억, 몸과 사랑이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우리 곁을 떠난 자들이 남겨준 소중한 삶의 사랑과 기억들, 온몸으로 말하는 삶의 메시지를 가슴에 안고 그 모든 것을 삶의 자양분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오늘 바울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썩지 않을 영원한 부활세상의 몸은 바로 산자와 떠난자들과 더불어 모두의 것이 될 것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이 자비와 평화와 안식을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