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62)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하라 - ②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시인 안도현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하라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remymun/ 여인숙旅人宿이라도 국숫집이다
②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산숙(山宿)」 전문
백석이 1938년 『조광』에 발표한 시다.
나는 이 시 한 편으로 30년대 산골의 전형적인 풍경과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
여기에서 아주 인상적인 것은 ‘목침’이다.
이 오래된 목침에는 새까만 때가 올라 있다.
화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백석의 매력이 숨어 있다.
그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라는 서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밋밋하고 시의 산문적인 서술에 기여하는 말이 ‘생각한다’이다.
그런데 이 말이 아프다.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은 누구이겠는가?
목침에 때를 올린 사람들은 목침을 베고 잔 뒤에 떠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산골의 광산촌을 떠돌거나 만주 등지로 길을 떠나던
30년대 후반의 우리 민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때 묻은 목침 하나를 통해 대다수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현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에서도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시인이다.
나는 그의 시에서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수많은 음식을 나에게 맛보여주는 것도 좋아하고,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호기를 부리는 것도 좋아한다.
짝사랑의 햇수가 30년 가까이 된다.
지겨울 때도 되었건만 백석이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도꼬마리 씨앗 같다.
아니, 내가 백석의 몸에 붙은 도꼬마리 씨앗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도 시가 잘 되지 않을 때,
해괴하기 짝이 없는 시들이 나를 괴롭힐 때, 백석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0. 8. 2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62)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하라 - ②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시인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