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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당신의 자유를 무의식 가운데 약탈하는 정신적 강도이다
칼럼1: 빚더미 만든 포퓰리즘
칼럼2: ‘민주주의 탈’ 쓴 포퓰리즘 경계해야
칼럼3: 포퓰리즘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가?
칼럼4: 신흥국 ‘포퓰리즘 그림자’ 한국도 안전지대 아니다
빚더미 만든 포퓰리즘
권력쟁취를 위해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선동적 정치동을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인기영합 대중선동주의라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우선 국민통합보다는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언론 등 여러 면에서 소수의 타락한 지배계급과 고통 받는 다수의 착한 서민대중으로 구분한다.
부유층과 빈곤층, 대기업과 중소기업, 일류학력과 보통학력, 주류언론과 비주류언론, 1%와 99% 등이다. 그런 다음 서민대중의 고통이 소수지배계급 때문이라고 적대감을 조장하면서 지배계급 타도가 곧 민주주의 길이라고 강변한다. 포퓰리스트 본인들은 서민대중의 편에 섬으로써 가장 민주적인 것처럼 위장한다. 한국의 일부 강남좌파들처럼 실제로는 온갖 불의와 불공정을 저지르면서도 겉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주장하는 위장으로 서민대중을 선동한다.
서민대중의 의견이 곧 국민의 뜻이고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므로 기득권이 지배하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법규나 규율도 무시하기도 하고 서민대중과 직접 소통한다면서 대의민주주의를 폄하하기도 한다.
개개인들은 전체보다는 개인, 장기적 안목보다는 단기적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개개인 선의 합이 전체적이고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국가 전체의 공동선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뒤따른다. 정부 제공 사회서비스나 현물급여 등 복지 혜택은 많이 받을수록 개개인에게는 선이겠지만 국가 전체적으로는 재정파탄 등 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남유럽 재정위기가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직접민주주의의 민주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대의민주주의를 창출한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긴 차선책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경제가 파탄지경일 때 포퓰리스트들이 등장하거나 포퓰리스트 통치 결과 경제파탄을 초래하여 극좌정권이 등장하거나 쿠데타로 극우정권이 등장한 사례는 허다하다. 대공황의 파국 속에서 전 국민 일자리를 약속하며 등장한 독일의 히틀러가 마침내 파시스트 정권이 되어 전쟁을 도발한 경우가 대표적인 역사적인 예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정책적으로는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하는 정책들이 주장된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정통경제학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받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의 좌파경제학자를 중심으로 주장되어 온 소득주도성장을 추진해 성장률 추락과 사상 최악의 고용참사를 초래했다. 사상 최고의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단축, 비정규직 정규직화, 임금피크제 없는 정년연장 등 친노동정책을 단시간에 줄줄이 시행하니 허약해진 경제체력이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자영업자 소상공인 임시직 일용직 등 저소득층에 타격이 집중되어 소득분배구조도 위기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포퓰리즘을 ‘포용국가’라는 미명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7월 23일 청와대수석보좌관회의에서 새로운 정책패러다임으로 ‘포용성장’을 제시하며 ‘사람중심경제’로 정의하고 소득주도성장의 상위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같은 해 9월 6일에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포용국가 전략회의’를 열고 포용을 정부의 핵심가치로 강조하고 포용국가를 재차 강조하며 고등학교 무상교육과 기초연금 인상 등 각종 복지와 일자리 방안을 내놓았다.
천문학적 재정투입은 재정적자를 초래한다. 재정준칙을 통해 국가부채·재정 적자 비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관리하도록 법으로 정해야 하나 OECD 국가 중 한국과 터키만이 재정준칙이 없다.
포용국가는 포퓰리즘의 위장
포용국가란 무엇인가. 아마도 이 개념을 근년에 가장 명쾌하게 제시한 학자는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2012)라는 명저를 저술한 대런 에이스모글루 MIT대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하버드대 교수다. 그들은 이 저서에서 포용적(inclusive) 경제제도를 가지고 있는 국가를 포용국가로 정의하고 있다. 포용적 경제제도란 ‘많은 국민 대중들이 그들의 재능과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고 그들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경제활동 참여를 이끌어내는 경제제도’라고 정의했다. 아울러 경제제도가 포용적이 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 불편부당한 법제,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제공하는 공공서비스, 새로운 기업의 진입 허용, 직업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시장경제가 지향하는 바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기업하면 잘살게 되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기업하면 자손들은 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기업해서 경제가 번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을 예로 들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사유재산제도가 인정되는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성공적인 기업에 신용과 보조금이 제공되도록 하는 정책을 통해 투자와 산업화를 이루고 무역, 교육투자, 기술이전을 통해 ‘동아시아의 기적’을 이뤘다고 평가하고 있다. 잘 되지 않은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과는 완전히 다른 정책이다.
에이스모글루와 로빈슨 교수는 포용적 경제제도에 반대되는 경제제도를 수탈적 또는 착취적(extractive) 경제제도라고 명명하고 이러한 경제제도는 한 집단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경제제도로 정의했다. 예를 들어 한 그룹에서 과도하게 세금을 많이 거둬 다른 그룹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그룹은 열심히 일하거나 기업할 동기가 약화되고 세금을 이전 받는 그룹에서도 이전소득으로 소득이 일정 수준 보장되므로 열심히 일하거나 기업하려고 하지 않게 되어 결과적으로 모두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를 수탈국가 또는 착취국가라고 명명했다. 포퓰리스트가 지배하는 국가는 수탈국가다. 과중한 세금으로 부유층 대기업은 기업하려는 기업가정신이 약화되고 과도한 복지살포로 일반 대중의 근면한 근로윤리가 무너지게 된다. 기업가정신이 약화되고 근로윤리가 무너진 국가가 발전할 수 없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성장률 저하로 점점 세수는 줄어드는 반면 복지수요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마침내 재정이 감당할 수 없는 재정위기가 오고 만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다.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경기기 급락하는 ‘문재인불황’(Moon depression)이 초래되고 있는 가운데 설상가상 코로나위기가 겹쳐 한국경제는 대불황(great depression) 국면으로 추락하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잘못된 정책 기조는 전환하지 않고 코로나위기 극복을 주장하며 천문학적인 재정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 종합대책에서 4월 22일 5차 비상경제회까지의 총지원액이 282조 원에 달하고 있다. 소상공인 지원 46조 원, 중소중견기업 지원 74조 원, 금융시장안정 74조 원, 기간산업안정기금 40조 원, 고용안정특별대책 10조 원,소비진작 36조 원, 감염병의료지원 2.5조 원 등이다.
때마침 4월 15일 총선을 앞두고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등 과도하게 지원된 부분도 있다. 이를 위해 2차 추가경정예산안도 추진되었다. 금년에 512조 원에 달하는 슈퍼예산에다 11조7000억 원의 1차 추경에 이어 지방비 2조1000억 원을 제외하고도 12조2000억 원 규모의 2차 추경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외에도 6월 초 21대 국회에 제출될 3차 추경안은 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논의된 고용안정대책용 9조3000억 원과 세입경정분 10조 원, 기업안정을 위한 금융보강, 한국형 뉴딜사업 예산까지 포함해 30조 원에 이르러 올해 1~3차 추경을 합하면 추경만 53조 원을 넘어 사상 최대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년 본예산에서 늘어나는 국가채무가 76조4000억 원에 1차 2차 3차 추경까지 합하면 금년에 늘어나는 국가채무가 120조3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금년 말 국가채무는 849조1000억 원으로 급격히 증가하게 될 전망이다. 늘어나는 국가채무를 대부분 국채를 발행해서 충당해야 할 실정이어서 금년에 적자국채 발행이 100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금년에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성장률을 -1.2%로 전망하는 등 마이너스 성장이 전망되고 있다. 하반기에 코로나가 재창궐할 경우에는 마이너스 폭이 커질 우려도 있다. 따라서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급등할 전망이다. 국가채무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금년 말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46%로 크게 증가하고 내년에는 50%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2016년 말에 36%였으나 2019년에는 38.1%로 가파르게 상승해 마지노선으로 간주되어 온 국가채무비율 40% 선이 깨지는 것은 물론 1년 새 무려 8%포인트나 급등하게 되는 것이다.
설상가상 여러 전문가들의 전망처럼 만약 하반기에 코로나가 재창궐하는 경우에는 기간산업과 중소기업은 물론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공황수준의 대량실업이 발생하면서 다시 엄청난 재정투입이 불가피해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급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관리재정수지도 1차 2차 3차 추경도 추진되는 반면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세수가 줄어들어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비율이 -5%를 넘어설 것으로 가능성도 있다. 설상가상 하반기 들어 본격화될 기업구조조정과 실업문제 해소를 위한 재정투입을 고려하면 재정수지는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이처럼 재정이 위험수위를 넘어서면 재정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2011년 재정위기가 발생했던 남유럽의 경우 2011년 재정수지의 GDP에 대한 비율이 이탈리아 -3.9%, 포르투갈 -4.2%, 스페인 -8.5%, 그리스 -9.1%, 아일랜드 -13.1%이었다. 이들 대부분 국가들이 2007년까지만 해도 재정수지가 건전했는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재정이 급격히 악화되어 마침내 2011년에 일제히 재정위기로 추락했다.
유럽재정위기는 한국도 재정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면 수년 내 재정위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전 국민에게 여유도 없는 재정을 마구 뿌리는 것은 재정위기를 앞당기는 매우 위험한 정책이다. 제한된 재원을 위기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기업의 생태계가 붕괴되지 않고 고용을 최대한 유지해 갈 수 있도록 반드시 필요한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정책이다. 여유도 없는 재정을 마구 뿌리며 포퓰리즘을 즐기고 있다가는 얼마 안가서 남유럽이나 남미의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처럼 돌아오기 힘든 질곡으로 추락하게 될 우려가 크다.
재정위기 앞당기는 중복 지원
이처럼 재정위기를 앞당길 정도로 재정 사정이 어려운데도 너무 많은 중복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2020년 4인 가족 기준 중위소득은 475만 원이다. 중위소득 40%(190만 원)이하 가구에 대해서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가 지급되고 있다. 차상위 10% (237.5만 원)에 대해서는 주거급여 교육급여가 지급되고 있다. 생계급여는 월 142만 원, 의료급여는 190만 원, 주거급여는 214만 원, 교육급여는 237만 원이다.
여기에 추가해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수급대상자인 중위소득 40% 이하 138만 가구에 대해서는 재난지원금으로 소비쿠폰 140만 원, 차상위 주거급여 교육급여 수급대상자 30만 가구에 대해서는 재난지원금으로 소비쿠폰 108만 원이 지급되고 있다. 소득 하위 70%에 대해서는 건보료 감면 8.8~9.4만 원, 특별돌봄쿠폰 80만 원도 지급되고 있다. 여기에 추가해서 전 가구에 대해 100만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를 모두 합하면 중위소득 40% 이하 138만 가구에 대해서는 기초생계비 외에 320만 원이 지급되고, 차상위 10% 30만 가구에 대해서는 기초생계비 외에 297만 원이 지급되고, 중위소득 50% 이상~소득 하위 70% 1082만 가구에 대해서는 180만~189만 원이 지급되고 상위 30% 600만 가구에 대해서는 100만 원이 지급된다. 이 밖에도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노인일자리쿠폰이 54.3만 명에게 23.6만 원이 지급되고 있고 고용유지지원금으로 30만 명에게 6개월 간 월 126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긴급복지로 134.4만 명에게 123만 원도 지급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지원도 잇따르고 있다.
이 밖에도 이미 2020년도 슈퍼예산에 현금복지가 54.3조 원이나 포함되어 있다. 현금복지란 기초연금 아동수당 근로장려금 자녀장려금 등 비기여형 현금복지를 말한다. 사실상 현금복지나 다름없는 단기 일자리예산도 26.8조 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 둘을 합한 현금성 복지에 금년에 81.1조 원이 배정되어 있다. 이 밖에 고교무상교육에 중앙정부 6594억 원과 지방정부지원을 합해 1조3000억 원, 유아교육비보육료지원사업도 4조316억 원이 책정되어 있다.
이를 모두 합하면 86.4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의 현금성 복지가 약 1200만 명에게 분배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중 중복 살포만 23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재정 사정이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처럼 중복 지원이나 불요불급한 지원 부분을 전용해서 기업생태계와 고용유지를 위한 재난기금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반기에 엄청난 기업 구조조정과 폭증할 대량 실업 문제가 예상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재정위기, 금융위기, 외환위기가 한꺼번에 올 수도 있는 복합위기도 예상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기의 마지막 보루는 재정의 방파제다. 가능하면 불요불급한 예산을 전용해서 사용하는 등 아껴 쓰면서 더 큰 위기를 위해 재정의 방파제를 건실하게 유지해야 한다.
2022년에는 대선도 예정되어 있다. 이미 전국민고용보험 뉴딜정책 등 천문학적인 재정투입이 필요한 대책들이 줄줄이 발표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재정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2016년 발의되었으나 무산된 ‘재정건전화법’이나 ‘재정준칙’의 도입 등 재정건전화를 위한 입법이나 제도 도입이 시급한 시점에 왔다.
재정준칙이란 국가부채·재정 적자 비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관리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선진국은 물론 개도국 대부분을 포함해 현재 89국에서 재정준칙을 운영하고 있다. OECD 회원국 중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터키뿐이다.
오정근
미래한국 편집위원·한국금융ICT융합학회 회장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355
‘민주주의 탈’ 쓴 포퓰리즘 경계해야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이 주목받는다. 회고록에는 우리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 언급돼 있을 뿐 아니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면모에 대한 ‘진솔한(?)’ 언급도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볼턴, 두 사람은 모두 제대로 된 직업윤리 의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왔다. 이 책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그 대통령에 그 보좌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식적인 직업윤리를 뛰어넘는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 책에 잘 드러난다. 이런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신뢰도는 그리 높을 것 같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6월 20일 오클라호마주 털사 은행센터(BOK) 경기장에서 한 발언만 봐도 그렇다.
트럼프 대통령은 “침묵하는 다수가 어느 때보다 강하다” “좌파 폭도가 우리 역사를 파괴하고 우리의 아름다운 기념물을 더럽히고 우리의 동상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모든 사람을 처벌하고 핍박하려 하고 있다” 등등의 주장을 폈다. 이런 언급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함축한다.
주목해야 할 단어는 ‘침묵하는 다수’ ‘좌파 폭도’ 그리고 ‘처벌과 핍박’ 등이다. 여기에 트럼프의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특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포퓰리즘을 인기영합주의 정도로 치부하지만, 포퓰리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종의 정치적 양식(political style)이다. 정치적 양식은 1회적 선심성 정책 정도 수준이 아니라, 정권이 구축한 체제 내에서 특정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포퓰리즘 현상은 비단 트럼프 행정부에서만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 더군다나 코로나19가 포퓰리즘 경향을 더욱 부추길 수 있다.
포퓰리즘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독일 정치학자 헬무트 두비엘(Helmut Dubiel)은 포퓰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기존 지배체제의 무능과 부패를 부각시켜 이를 토대로 대중을 선동하는 행위를 꼽았다. 여기서 반(反)엘리트주의가 나온다.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인과 각 분야 엘리트를 항상 오만하고 부정·부패 등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와 반대로 절대다수 대중은 순수한 존재로 본다. 여기서 포퓰리즘의 또 다른 특징인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등장한다.
포퓰리스트들은 항상 모든 것을 적과 동지로 구분한다. 가장 대표적인 적과 동지의 구분은 기존 ‘부패한 엘리트들’과 ‘순수한 일반 대중’이다. 정치학자 태거트(Taggart)는 이런 대립구도를 ‘침묵하는 다수 대중’과 ‘소리만 요란한’ 기존 엘리트의 대립구도로 표현한다.
여기서 기존 엘리트가 악의 근원처럼 포장되는 것은 물론이다. 정치학자 토도로프(Todorov)는 유태계 자본 문제를 그 사례로 든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나 남미 포퓰리스트들은 유태계 자본이나 외국 자본을 일반 대중의 이익을 갈취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또 해당 국가 지배 엘리트들이 이들 외국 자본과 결탁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기존 엘리트를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여기서 또 하나 포퓰리즘의 전형적인 특징이 도출된다. 배타적 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다. 이때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는 포퓰리스트가 필요로 하는 ‘적’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된다. 이와 관련 태거트는 포퓰리스트에게 ‘가시적인 적’은 반드시 필요하며, 포퓰리스트는 이런 적의 존재를 통해 대중을 결집시킨다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적에 대한 증오’가 포퓰리즘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력이다. ‘증오의 힘’은 대중을 정서적으로 결합시키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포퓰리즘은 ‘반이성주의’와 ‘반엘리티즘’으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파생되는 또 하나의 현상이 반(反)대의민주주의다.
대의민주주의 문제점은 포퓰리스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의민주주의 문제점이 대두된 이유는 후기 산업사회로의 전환과 관계 깊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정당의 역기능 때문이다. 정당의 역기능이란 정당이 개인의 이익이 중시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은 본래 산업사회에서 노동이나 자본 같은 집단적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탄생했다. 따라서 사회가 개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하면 정당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대의민주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은 ‘시간의 지연’이다. 선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권자 입장에서 반대하는 인물이 의원으로 당선되거나 혹은 찬성했지만 의원으로 당선된 이후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유권자는 다른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인 다음번 선거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시간의 지연’, 즉 ‘욕구 실현의 지연’이 발생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이 지점을 공격한다. 뮬러(Mueller) 같은 학자는 포퓰리스트가 ‘현재적’ ‘즉각적’ 요소를 강조하며 대의민주주의를 공격한다고 말한다. 실제 포퓰리스트는 이런 공격을 하면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포퓰리스트는 대의민주주의를 공격하면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편다. SNS가 이들 주장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반 대중은 SNS로 포퓰리스트와 잘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직접민주주의처럼 자신의 정치적 의견이 잘 반영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착각이라 한 이유는, 포퓰리스트의 직접민주주의 도입에 대한 주장은 단지 주장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 대신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한다 해도 문제 해결의 ‘즉각성’은 기대하기 힘들다. 오히려 전문성 결여로 문제가 더욱 꼬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포퓰리스트가 집권해도 욕구 충족이 지연되거나 아예 불가능한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중요한 점은 포퓰리스트는 기존 엘리트를 공격하고 대의민주주의를 무력화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기존 엘리트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포퓰리즘의 이론적 배경을 간단히 언급했다. 지금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포퓰리즘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고, 또 앞으로 목도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이뿐 아니라 포퓰리즘을 단순한 1회성 인기영합적 정책으로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포퓰리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극우주의, 권위주의 등 체제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정치·경제체제와 결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코로나19 같은 위기 속에서 포퓰리즘은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형태의 정부와 결합할 가능성이 높다.
포퓰리즘이 등장한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남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권위주의 정치체제로 변해버린다. 코로나19의 대유행만큼이나 포퓰리즘 대유행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https://m.mk.co.kr/opinion/columnists/view/2020/06/662732/
포퓰리즘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대중영합주의’, 특히 ‘나라 망치는 포퓰리즘’ 같이 상대방의 정책을 비방하는 공격적 맥락으로 쓰인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정의 방식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하다. 포퓰리즘은 인민, 대중, 민중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포풀루스’(Populus)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은 포퓰리즘을 ‘보통 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포퓰리즘은 이 정의와 다르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영국에서 브렉시트 국민 투표가 실시되는 등 2016년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포퓰리즘 양상이 관측된 해였다. 이후 포퓰리즘 열기는 독일, 터키, 필리핀 등 세계 각지를 가리지 않고 퍼지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포퓰리즘을 다루는 저작이 크게 늘었다. 그중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와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두 권의 책은 포퓰리즘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어떻게 이에 대응할지 알려줌으로써 포퓰리즘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포퓰리스트 = 반다원주의 + 반엘리트주의
학계는 포퓰리즘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포퓰리즘 자체는 매우 오래된 연구 주제지만, 1967년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누구나 포퓰리즘에 대해 말하지만 아무도 뭔지 정의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다. 누구나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경고하지만, 섬세한 개념 정의를 통해 포퓰리즘이 작금의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세히 분석한 경우는 흔치 않다. 독일 출신으로 정치이론과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얀 베르너 뮐러는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를 통해 포퓰리스트 개념 명료화에 도전한다.
뮐러는 포퓰리즘을 ‘정치에 관한 특정한 도덕적 상상’이라 정의한다. 포퓰리스트는 현실 정치를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 국민이, 부패하거나 도덕성이 없는 엘리트에 대항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신들만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의 “우리가 국민이다. 너희는 누구냐?”라는 일갈이나 영국 브렉시트 찬성파 나이절 패러지의 “브렉시트 결정은 진정한 국민의 승리”라는 말은 이런 인식이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가 다원성이라 할 때, 포퓰리즘은 자연스럽게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제가 탄생한 이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라진 적 없는 ‘대의민주주의의 그림자’다. 이들은 ‘국민’이 인식하고 소망하는, 예컨대 트럼프가 말하는 ‘위대한 미국 만들기’와 같은 단일한 공동선이 존재하며 자신들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국민’이 복수형일 수 있다”는 명제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이 국민 전체를 대변하며, 대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포퓰리스트는 ‘진정한 미국인’ ‘터키의 애국자’ 등의 용어를 자신의 도덕적 이상과 결합해 규정한다.
포퓰리즘은 단순히 다수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아부와 다르다. 포퓰리스트는 설사 자기 세력이 실제 다수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도덕적 이상을 ‘국민’ 다수가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티파티 회원들이 다수표를 얻은 대통령을 “다수의 뜻을 거슬러 통치하고 있다”며 비판한 것에서 보듯, 이들은 야당 시절엔 엘리트가 국민을 배반하고자 만든 ‘잘못된 정치 시스템’에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거꾸로, 집권한 포퓰리스트는 야당 시절 자신이 거세게 비판한 그 시스템을 통해서 ‘국민’의 의지를 실행한다. 이는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가 포퓰리즘이란 단어를 이론적으로 정의하려고 한 시도에 가깝다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좀 더 생생한 문체를 통해 현실 정치를 묘사한다. 두 사람은 칠레, 베네수엘라 등의 국가와 미국의 사례를 분석해 민주주의가 어떻게 ‘아웃사이더 포퓰리스트’에 의해 위협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아웃사이더 포퓰리스트는 정적이나 언론인을 말로 비난하기를 즐긴다. 이때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반역자’라거나 ‘배신자’ 같은 자극적인 단어가 동원된다. 기존 정치인이나 정당은 이들의 자극적인 언사와 대중적 인기에 압도당해 무력해진다. 심지어 일부는 극단주의자와 연합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른다.
민주주의는 규범에 의지한다
그렇다면 포퓰리스트가 국가 실권을 거머쥐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두 책의 저자들은 포퓰리스트가 충분한 권력을 확보하고 나면 민주적 절차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취향 또는 이상대로 국가를 재창조한다고 지적한다. 뮐러에 따르면,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이나 시민단체 심지어 정당까지 ‘비(非)국민’으로 규정해 탄압하고, 사법부와 정보기관 등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개조한다. 터키나 폴란드에서 그랬듯 헌법 개정이 이들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 소수자 보호 원칙은 헌법 개정 과정에서 심각하게 침해된다. 레비츠키와 지블렛 역시 포퓰리스트는 권력을 획득할수록 말을 넘어 실제 행동에 착수한다고 말한다. 선거는 여전히 시행되고 신문은 발행되나, 포퓰리즘 정권은 사법기관 같은 ‘심판’을 매수하고 헌법과 선거 제도를 바꿔 ‘운동장’을 기울인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던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은 부식되다 못해 어느 순간 붕괴한다.
뮐러는 1920년대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을 통해 현재까지도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의 언어’ 뒤에 숨어 권위주의로 전환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소개한다. 슈미트는 ‘동질적인 국민의 환호’를 올바른 민주주의로 여기고, ‘피통치자와 통치자의 통일성’을 대변할 수 있는 지도자의 필요성을 중시했다. 포퓰리스트는 슈미트의 이론에서 실마리를 얻어내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고 정치적 분열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되는 미국은 어떻게 권위주의로의 전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레비츠키와 지블렛은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미국 헌법이 우수해서 미국 민주주의가 유지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미국에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는 민주주의 관습과 규범이 견고했던 탓에 다른 국가처럼 민주주의가 붕괴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상호 관용이란 경쟁자를 하나의 올바른 시민으로 인정하는 규범을 일컫는다. 권력에 대한 도전이 과거에 당연히 반역으로 인식됐던 것에 반해, 미국의 민주주의는 정적 존재의 타당함을 인정하고 적과의 공존에 성공했다. 두 번째로 제도적 자제란 법을 집행하는 데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관습을 말한다. 제도적 자제의 반대말이 권력의 남용이란 점을 고려할 때 우린 자제의 개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록 합법적인 권한이라 할지라도 정치인은 주어진 권한을 무리하게 활용해 제도의 안정성을 흔들어선 안 된다. 미국에선 작게는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워싱턴의 선례를 따라 대통령 임기를 재선으로 제한하기로 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밀접히 연관돼 있고,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민주주의 규범이다. 그러나 사회 양극화가 커질 때 민주주의 규범은 무너진다. 인종 갈등, 경제 불평등 등으로 정치 참여자 간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이 심해지면, 민주주의를 일탈로부터 보호하는 ‘규범의 가드레일’이 약해진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흥미로운 통찰이 드러난다. 미국 연방 정부는 ‘1877년 타협’으로 남부에서 연방군을 철수했고, 동시에 흑인 시민권 박탈을 묵인해 인종 문제를 정치적 의제에서 배제했다. 남북전쟁으로 사라졌던 상호 관용은 남부 민주당원*과 북부 공화당 보수주의자 간 ‘흑인의 피를 대가로 한 타협’을 통하고 나서야 비로소 회복됐다. 이 때문에 흑인 시민권을 인정한 1965년 이후 민주화 흐름은 역설적으로 잠재했던 인종 갈등을 심화시켜 미국의 두 거대 정당을 양극화시켰다. 남부 백인 집단은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으며, 흑인과 진보주의자는 민주당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민주당 내 보수주의자, 공화당 내 진보주의자가 사라지며 정당 간 협력이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정치의 양극화가 문화와 사회 양극화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2016년 설문 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의 49%, 민주당 지지자의 55%가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느낀다고 답했을 정도로 미국의 정당은 정치 이념뿐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적 성향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양당 지지자는 상대를 ‘진정한 미국인’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가 됐다. 트럼프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인물이다. 슈미트의 가르침을 따라, 트럼프는 반이민, 반세계화 정서를 부추기고 이민자와 무역 개방 없는 ‘진짜 미국’과 ‘가짜 미국’을 구분했다.
‘열린’ 민주주의를 향해
뮐러와 레비츠키·지블렛이 포퓰리즘에 접근한 방식은 다르지만, 포퓰리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선 비슷한 결론을 도출한다. 먼저 두 책 모두 민주적 대표성을 강화할 방법을 요구한다. 뮐러는 포퓰리즘의 성공이 기존 정당과 정치인이 나를 대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회의감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뮐러의 비판은 유럽연합을 향한다. 유럽연합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헌법재판소처럼 민주적으로 선출되지 않은 기관에 과도한 힘을 실어줬고, 이것이 포퓰리스트에게 비판의 구실을 줬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체가 좀 더 다양한 의견을 반영할 방안을 찾아내야 함을 시사한다. 레비츠키와 지블렛 역시 정당을 민주주의의 문지기로 규정하며, 정당이 극단주의자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할 수 있다고 정리한다. 정당은 극단주의자와의 연합을 거부하고, 사회 양극화를 완화해 유권자 간 지속적인 연대감을 부여해야 한다. 저자가 미국에서 점차 비중이 늘어가는 유색인종과 같은 소수자 집단과 기득권을 위협받는 백인 노동 계층을 아우를 ‘다민족 연대’ 형성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또한 두 책의 저자 모두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가 탄생한 이래 언제나 있었고, 포퓰리즘을 절멸시킬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샹탈 무페 같은 일부 정치학자는 포퓰리즘에 대응하기 위해 포퓰리스트의 행위를 거울삼아 똑같이 행동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뮐러와 레비츠키 모두 이 방법에 반대한다. 포퓰리스트에 맞서기 위해 또 하나의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위험하고 무가치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뮐러의 말대로 ‘우리 국민’(We the People)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열린 질문으로 남을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기도 하다. 포퓰리스트가 ‘국민’의 개념을 제한하고 좁힐 때, 민주주의자는 더 포괄적인 민주주의로 맞서야 한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뮐러는 포퓰리스트가 법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한 그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여기고 소통할 필요를, 레비츠키는 서로 다른 계층 간 연대를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숱한 연대의 도전과 실패의 반복을 요구한다.
해외의 사례와 달리, 한국에서의 포퓰리즘은 아직 그 영향력이 기존 민주주의 시스템을 위협할 만큼 크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을 중심으로 점차 불안감과 불신 그리고 이에 따른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늘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 사회 역시 작년 예멘 난민 파동과 혜화역 시위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을 겪은 바 있다. 기존 정치 시스템이 당면한 사회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거나 되려 갈등을 키운다면, 포퓰리즘은 언제나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남부 민주당원: 미국 민주당 내부의 남부 출신 세력, 특히 노예제를 지지한 노예 소유주 출신을 일컫는다.
출처 : 대학신문(http://www.snunews.com)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38
신흥국 ‘포퓰리즘 그림자’ 한국도 안전지대 아니다
전세계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글로벌 투자자의 의사결정에서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선진 시장과 신흥 시장 간 자원 배분이다. 모든 투자가 그렇듯이 의사결정에서 필요한 것은 위험과 수익률의 프로파일이다. 대개 위험과 수익률은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 조합에 따라 투자자금을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흥국을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은 어느 정도 발전된 금융 시장을 가졌지만 선진 시장 같은 충분한 안정성은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흥 시장 투자를 유도하려면 투자자들이 다소 높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고 기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2020년 새해 신흥국 분위기가 밝지 않다. 포퓰리즘 정책이 확산되면서 투자 위험은 높아지지만 실물경제가 악화되며 수익률은 떨어지는 국면이 우려된다. 신흥국 자산이 고위험·저수익 특징을 지닌 불안한 투자 대상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과거에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가 양적완화를 축소하고 유동성을 회수하던 ‘테이퍼링’ 과정에서 이런 일을 경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미국 연준이 양적완화를 통해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했다. 상대적으로 침체된 미국 시장에서 높은 수익을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에 이렇게 공급된 유동성은 전 세계 신흥 시장으로 이동했다. 이를 ‘위험추구채널’이라 하는데 신흥 시장 투자는 고위험 특징을 지니지만 당시 미국 같은 선진국 시장에서는 기대수익이 높지 않아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신흥국 투자를 확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경기가 회복되며 저위험 선진국 시장에서도 충분한 수익률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위험추구채널을 통해 전 세계로 방출된 자금이 미국으로 돌아오며 신흥국이 자본 유출에 따른 경제 불안을 경험했던 것이다.
당시는 미국의 경제 회복과 통화정책으로 촉발된 신흥국 불안이었다면 2020년은 신흥국 자체가 문제다. 자본에 적대적인 정부 정책으로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면서 불안이 확산될 우려가 커졌다. 예를 들면 신흥국 국민 사이에 경제적 어려움이 확산되는 와중에 이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대중영합적 정책이 쏟아졌다. 투자수익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재산 자체를 지키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자본은 신흥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르헨티나다. 경제 악화로 페르난데스 정권이 수립됐는데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경제를 지금처럼 악화시킨 시발점이 된 대중영합적 정책 ‘페론주의’ 성향이 강하다. 과거 페론주의 정책 아래서 비효율적인 재정지출과 방만한 정부 팽창으로 재정건전성에 문제가 생겼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기업에 과중한 조세 부담을 전가하면서 기업은 무너졌다. 또한 재정자금 조달을 위한 통화 증발로 엄청난 물가 상승에 시달리고 국내 자본의 해외 이탈을 초래한 바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모습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아르헨티나 또는 라틴아메리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확산된 상태에서 정치인들이 포퓰리즘 정책을 꺼내면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처럼 압도적인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반도체 관련 업종이 아니면 해외 투자자에게 큰 매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영합정책으로 얼룩진 다른 신흥국과 차별화된 시장경제 논리, 경제 원칙에 입각한 정책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 전망도 어둡다. 수익은 거두지 못하면서 투자자의 재산권을 위협하는 고위험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9/12/1095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