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67) 시와 문학의 특권적 표현 영역 3-1/ 시인 이형기
시와 문학의 특권적 표현 영역 3-1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bonaterra_chocolate/ 초콜릿의 관능검사 1
① 후각·촉각·미각의 기본 이미지
우리 신체 중 코는 냄새를 맡는 후각기관이고,
피부는 감촉을 느끼는 촉각기관,
혀는 맛을 느끼는 미각기관이다.
이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후각, 촉각, 미각의 대상 또한 무수히 널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계의 표현자인 시인은 그런 대상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 세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을 지각한 그 결과는 결코 단순한 감각적 자극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감각적 자극은 정신에 전달되므로 거기에는 정신적 반응이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이다.
붉은 색깔이 그냥 붉은 색깔 그 자체로만 수용되지 않고 ‘정열’이나 ‘투쟁’을 연상케 하는 것은
그러한 정신적 반응의 흔한 예이다.
후각, 촉각, 미각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가 어떤 냄새, 어떤 감촉, 어떤 맛을 알아볼 때,
그 속에는 이미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반응이 배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냄새, 그 감촉, 그 맛을 표현할 때는 정신적 반응이 배어든
그 상태의 것을 실질적인 대상으로 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냄새와 감촉과 맛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받아들인 냄새와 감촉과 맛인 것이다.
문학 이외의 다른 예술도 표현의 원칙은 같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둘 만한 것이 있다.
문학 이외의 다른 예술이 시각과 청각의 대상은 문학 못지않게,
혹은 문학 이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면서도 후각, 촉각, 미각의 대상은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림은 시각적 표현이고 음악은 청각적 표현이다.
후각, 촉각, 미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은―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예술의 장르 구분을 기준으로 할 때―아직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문학만이 후각, 촉각, 미각이라는 세 가지 감각기관의 지각 대상에 대한 표현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 가지 감각기관의 지각 대상에 대한 표현은 문학과 또
그 문학의 정수인 시의 특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 가지 감각기관의 지각 대상도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권은 시와 문학의 표현 영역이 그만큼 넓고 그만큼 그 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이 세 가지 감각기관의 지각 대상도 언어로 표현된다.
우리는 이미 언어로 표현된 감각적 지각 대상을 이미지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냄새는 후각적 이미지, 감촉은 촉각적 이미지, 맛은 미각적 이미지이다.
여기에 앞서 살펴본 시각과 청각의 두 이미지를 합쳐서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 대응하는
다섯 가지의 기본 이미지라고 한다.
이제부터는 시작품을 통해 후각, 촉각, 미각의 세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② 냄새가 그려낸 시몽이란 여자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흰 몸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우에 처얼썩 갯물이 놓이듯
얼컥 니이는 훗근한 내음
―김영랑, 〈가늘한 내음〉 부분
김영랑의 〈가늘한 내음〉 중 2연이다.
마지막 행에는 ‘얼컥 니이는 훗근한 내음’이라는 후각적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것은 ‘얼결에 여흰 봄’을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는
화자의 좌절감을 표상하는 이미지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냄새를 통해 어떤 감정 상태를 우리가 감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끔
구체적으로 표현한 후각적 이미지를 뜻한다.
아래의 시는 그러한 후각적 이미지가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구사되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시몽, 너의 머리칼 숲 속에는
커다란 신비가 있다
너는 건초 냄새가 난다
너는 짐승이 자고 간 돌 냄새가 난다
너는 무두질한 가죽 냄새가 난다
너는 갓 타작한 밀 냄새가 난다
너는 장작 냄새가 난다
너는 아침마다 가져오는 빵 냄새가 난다
너는 무너진 토담에 핀 꽃 냄새가 난다
너는 복분자 냄새가 난다
너는 비에 씻긴 두류 냄새가 난다
너는 저녁때 베어 들이는 등심초와 양치풀 냄새가 난다
너는 호랑각시 냄새가 난다 너는 이끼 냄새가 난다
너는 생나무울타리 그늘에서 열매 맺고 시든 노랑풀 냄새가 난다
너는 꿀풀과 나비꽃 냄새가 난다
너는 거여목 냄새가 난다 너는 우유 냄새가 난다
너는 회향풀 냄새가 난다
너는 호두 냄새가 난다
너는 잘 익어 따낸 과일 냄새가 난다
너는 꽃이 만발한 버들과 보리수 냄새가 난다
너는 꿀벌 냄새가 난다
너는 목장을 헤지를 때의 삶의 냄새가 난다
너는 흙과 시냇물 냄새가 난다
너는 정사(情事) 냄새가 난다
너는 불 냄새가 난다
시몽, 너의 머리칼 숲 속에는
커다란 신비가 있다
―레미 드 구르몽, 〈머리칼〉 전문
이 시는 프랑스의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시몽〉 연작시 1번 〈머리칼〉의 전문이다.
이 시에는 대충 세어도 자그마치 스물다섯 가지나 되는 냄새가 등장한다.
내가 아는 한 동서양을 통틀어 이렇게 많은 냄새를 등장시킨 시는 없다.
그러니까 구르몽은 하나의 시에 가장 많은 냄새를 등장시킨 영광스러운 세계 제일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과연 세계 제일답게 이 시에 등장하는 냄새들은 모두 그렇고 그런 상투성을 벗어나 있다.
오묘하고 독창적인 냄새인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이 냄새들이 맡아볼 수 없는 별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냄새들은 누구나 농촌에서 친근하게 경험할 수 있는 냄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냄새들의 어울림이 자아내는 이 시의 전체적인 표현 효과는 오묘하고 특이하다.
시의 표현 능력이 그만큼 탁월하다는 증거이다.
이 시는 첫 연과 마지막 연에서 ‘시몽, 너의 머리칼 속에는/ 커다란 신비가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 문장은 시에 등장하는 많은 냄새들의 근원을 밝혀준다.
아마도 애인일 가능성이 높은 시몽이란 여자의 머리에,
이 시의 화자가 코를 묻고 맡은 ‘커다란 신비’의 냄새가 바로 그것이다.
‘건초풀 냄새’부터 ‘불 냄새’까지의 여러 가지 냄새들은 그 ‘커다란 신비’를 가닥가닥 해쳐본 내용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냄새들은 우리 앞에 시몽이란 여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세련된 도시풍의 미인이거나 청순가련한 소녀가 아니라
야성미 넘치는 건강하고 소박하고 또 성숙한 아가씨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가 그런 시몽의 초상만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상과 함께 그녀에 대한 화자의 사랑도 아울러 표현하고 있다.
아니, 사실은 그 사랑과 초상이 완전히 표리일체가 된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표현을 뒷받침하는 주된 장치가 후각적 이미지라는 사실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솔직히 말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오묘함은 고사하고 우선 그 종류에 있어서 이처럼
다양한 냄새(후각적 이미지)를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시에 있어서의 후각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력을 통해 만드는 것이다.
구르몽의 〈머리칼〉도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의 냄새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을 거듭하면 탁월한 후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한 훈련의 한 방법으로 나는 당신에게 구르몽의 이 시를 찬찬히 읽으면서
‘건초 냄새’나 ‘짐승이 자고 간 돌 냄새’나 또 ‘무너진 토담에 핀 꽃 냄새’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냄새인지 당신이 직접 상상해 보기를 권고한다.
<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 9.22.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67) 시와 문학의 특권적 표현 영역 3-1/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