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 이종섶
책장애벌레 / 이종섶
낡은 책장은 망치로 부수는 것보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나무의 이음새마다 박혀있는 나사못
숨쉬기 위해 열어놓은 십자정수리를 비틀면
내장까지 한꺼번에 또르르 딸려 올라오고
허물처럼 남아있는 벌레의 집에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들었다
안간힘을 다해 붙어있는 것들을
대여섯 마리씩 잡을 때마다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책장의 근육들
바닥에 납작 주저앉을 무렵엔
한 줌 넘게 모인 애벌레가 제법 묵직했다
가지와 가지 사이를 물고
깊은 잠을 자야했던 동면기가 끝나면
훨훨 나비가 되어 숲속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책장이 늙어버린 탓에
애벌레만 집을 잃고 말았다
꼼지락거리는 것들 땅바닥에 던져버리려다
회오리돌기가 마디마디 살아있어
공구함에 보관해둔다
상처도 없고 눈물도 없으니 언젠가는
다시 나무속에 들어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밤만 되면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소리
나무의 빈 젖을 물고 싶어 오물거리는 소리
고아원의 밤이 깊어간다
[당선소감] “시는 진실한 나의 평생친구”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와 함께 걸어온 듯 했으나 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는 날마다 나의 위로와 기도가 되었으나 나는 돌아서면 시를 잊어버렸다. 시는 나에게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으나 나는 결코 시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시가 나에게 찾아와 조용히 말을 걸 때마다 나는 귀 기울여 들어주지 못했고 내 길을 가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시 쓰기를 한 이후는 오히려 내가 시를 붙잡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동시에 시를 절망하고 원망하는 일이 많았었다. 뒤늦게 다시 손을 벌리는 내가 친구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친구와 함께 계속 한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또다시 저울질 하곤 했었는데, 바로 그 순간 시가 슬며시 내게로 와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오랜 친구와의 반가운 해후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이제 서로의 마음을 깊이 알고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그동안 시가 나를 친구로 대해주며 나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나도 시를 내 진실한 친구로 대하며 살고 싶다. 친구 이야기를 잘 듣고 잘 전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 친구를 내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제일 먼저 감사드린다. 가족과 함께 몇몇 이름도 부르고 싶다. 사랑하는 아내 선미와 두 딸 가을과 하늘, 시를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최영환 조수일 백미경 시인, 시의 깊이를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박은영 시인, 함께 동행하고 싶은 최은묵 시인.
무엇보다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그 뜻을 알고 더욱 정진할 것을 약속드린다. ‘18일에 본심이 끝났으나 성탄선물을 드리려고 24일에 전화했다’는 대전일보사에도 가슴 벅찬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독특한 상상력… 개성 돋보여”
결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은 작년보다 높았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나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려고 노력한 점 등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일정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신춘문예 투고작들이 종종 그렇듯이 요설로 인해 불필요하게 글이 길어진 작품이 많다는 점, 그리고 개성적인 작품이 드물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중에서 다섯 사람의 작품이 거론되었다. ‘흑백필름’은 착상의 신선함에서, ‘털과 향로’는 섬세한 언어구사에서, ‘졸참나무 숲’은 주제를 추구하는 힘에서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약간씩의 결점도 가지고 있어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진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과 ‘책장애벌레’를 놓고 꽤 오랜 시간 숙의하였다.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추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던 때문이다.
‘그녀의 집’의 지은이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다양한 시어를 자유롭게 엮어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장애를 가진 몸으로 아이를 길러내는 여인을 토마토 나무와 연결하여 건강성을 추구한 짜임새 있는 전개가 좋았다.
‘책장애벌레’는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낡은 책장을 부수는 과정을 담은 이 시는, 해체된 책장 자체보다 책장을 지탱하였던 나사들에 주목하였다. 나무를 물려 책장을 구성했다가 할 일을 잃은 나사들에게 연민과 애정을 표현한 이 시는, 이 시대에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실감을 우회적으로 전달한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시적 표현의 세련미보다는 개성 쪽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책장애벌레’는 생생하고 힘이 있어 감동을 창출하는 데 좀 더 강했다. ‘그녀의 집’도 당선작이 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좌절하지 말고 좋은 시를 쓰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명인, 양애경 / 예심 심사위원: 이정록, 박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