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73)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 ① 시가 서 있어야 할 자리/ 시인 안도현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Daum카페 http://cafe.daum.net/rorxh/ 표성배 시집 <은근히 즐거운>/시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묻다/부산일보
① 시가 서 있어야 할 자리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연애시절에 애인한테 몇 번쯤 시를 써서 바쳤는지요?”
내 대답은 한결같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내 질문한 사람의 얼굴에는 실망의 그림자가 스쳐간다.
조금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시를 연애의 수단이나 사랑을 고백하는 도구쯤으로 여기면 그럴 만도 하다.
젊은 날에는 결혼축시를 써달라는 주문이 쇄도할 때도 있었다. 그
렇고 그런, 입에 발린 주례사처럼 매번 쓸 수가 없어서 나는 늘 쩔쩔맸다.
대학 다닐 때 처음 축시라는 것을 쓴 적이 있는데, 첫걸음부터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어렵게 결혼에 성공한 선배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새우젓장수가 되더라도 어떻게든 잘 살 거라고 말이다.
나는 새우젓장수가 되겠다는 신랑의 그 말에 힌트를 얻어 원고지에 축시를 썼다.
그런데 식장에서 시를 읽어내려 가는 동안 신랑과 신부가 훌쩍이기 시작하더니
양가 부모님들까지 손수건을 꺼내드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급기야 결혼식장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사랑과 행복의 언어가 가득해야 할 남의 결혼식장을 거친 인생의 출정식처럼 비통하고 비장하게 만든 것이다.
그 죄는 돌이키지 못할 것이었으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로 이거야! 혼주와 하객들이 흘린 눈물은 내 시에 대한 최고의 찬사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다. 아직도 그 선배는 그때 쓴 축시를 액자에 담아 거실에 걸어 두고 있다 한다).
나한테 공으로 시집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고마워 나는 받자마자 서문을 반드시 읽는다.
한 권의 시집이 지향하는 가치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문 때문에 아예 시를 읽지 않고 책꽂이에 꽂아버리는 시집도 있다.
한 지붕 아래 함께 밥 먹는 배우자와 자식들을 향한 사랑을 서문에 여과 없이 드러내는 꼴이 안쓰러워서다
(전북지방의 말로 하면 식구들한테 야냥개 부리는 것 같아서다. 간살을 떤다는 뜻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집 서문은 어떤가?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이덕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
시가 서 있어야 할 자리와 시인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태도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젊은 날의 방황, 세상에 대한 이유 없는 증오, 삶을 바라보는 순정하고 따스한 시선이 독자인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이쯤은 되어야 한다.
시라는 형식, 혹은 시집이라는 형식 속에 가족을 끌고 들어와 챙기고 쓰다듬는 행위는 아무래도 비시적이다.
그런 사랑은 시집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법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
중국의 고승 임제(臨濟)의 화두다.
무슨 말인가?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말이고,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말이며, 그 어떤 특권이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라는 것이다.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 불광출판부, 2005, 193~194쪽)
일체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야 깨달음에 이르듯 시로 접어드는 길도 그러한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는 절대자와 부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바치는 양식이 절대 아니다.
시의 초보자일수록 ‘무엇을 위해서’ 쓰려고 한다.
또 ‘누구를 위해서’ 쓰려고 한다. 시가 천박해지는 순간이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쓰지 말고, 그 누구를 위해서도 쓰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아내를 만나면 아내를 죽여라.
부처를 우러르면 불경을 읽으면서 절을 하면 될 것이요,
예수를 믿으면 교회를 다니면서 기도를 하면 된다.
부모를 공경하면 지극히 효도를 다하면 될 것이요,
아내를 사랑하면 한 번 더 껴안아주면 그만이다.
시에다가는 단 한 줄도 절대자의 말씀을 받아 적지 마라.
제발 부모의 자애로움을 칭송하지 말 것이며, 금실 좋은 아내와의 관계를 떠벌리지 마라.
그래도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시에다 쓰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어떻게 하나?
부처의 말씀을 관념의 테두리 안에 가둬버리고 실천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해 써라.
예수를 팔아 제 잇속을 챙기는 자들을 크게 꾸짖는 시를 써라.
부모의 비겁함과 치부와 죄를 찾아 써라. 아내의 쩨쩨함과 실수와 과욕에 대해 써라.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10.1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73)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 ① 시가 서 있어야 할 자리/ 시인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