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 원보람
악어떼 / 원보람
서른이 지나기 전에 두 번째 실업급여를 받았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햇빛줄기를 나눠먹었고
발끝마다 매달린 검은 노예들도 입을 벌렸다
요즘은 늘 다니던 길을 잃는 사람들이 많아
표지판은 너무 많은 곳을 가리키고
신호등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만 보내지
도시 곳곳에 설치된 늪지대를 지나다가
영혼을 자주 빠뜨렸다
너무 바쁜 날에는 일부러 나뭇가지에
헌옷처럼 걸어두고 가기도 했다
늪지대에 악어떼가 나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노예들은 밤마다 주인을 뜯어먹었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거워지는
노예를 질질 끌다가, 끌려다니다가
악어는 심장부터 먹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상자 안에 있는 상자를 열면 나오는 상자 안으로
도시의 아이들이 차례로 들어갔다
사각지대 안에서 조용히 자라는 아이들
뚜껑을 열면 어른이 되어 나왔다
우리는 시급을 받고 늪지대에 숨어
포크를 쥐고 악어떼를 기다렸다
돈을 모으면 함께 열기구를 타자고 했다
뿌리 얽힌 사람들에게 내리는 비를 지나
위로의 말이 들리지 않는 대기를 지나
구름 사이 피는 버섯처럼
둥근 머리로 허공을 밀어 올리며
계속 가자고 했다
추락하는 일에 익숙했으므로
겨울 내내 올라가는 열기구만 상상했다
악어는 울기 위해 먹이를 씹는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당선소감] "고뇌하던 무수한 밤들… 詩는 애증의 연인"
시를 쓰기 시작한지 10년 만에 당선소식을 들었습니다.
소감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시를 붙잡고 보냈던 무수한 밤들이 쏟아집니다.
시는 저에게 애증의 연인입니다.
사랑을 보낼 때는 차갑기만 하더니 괴로운 날이면 언제나 곁에서 아픈 시간을 함께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쓰는데도 내 시들은 언제까지 책상 위에만 머물러야 하는지 좌절하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서로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아는 사이가 되었을 때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선 소감을 쓰는 지금 홀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알지도 못하는 당신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안다고,
몸이 아플 만큼 애쓰지 말고 애증의 연인과 오래 사랑하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지난날을 돌이켜볼수록 고생도 아니고 낙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저는 글을 배우고 쓰는 동안 즐거운 날보다 힘든 날이 더 많았습니다.
단순한 고생이라면 좋았겠지만 한국에서 글을 쓰며 경험한 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회의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 개소리를 아름답게 써서 사람들을 속이는 일을 목격하기도 했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창작자들을 개소리로 속여 이용해먹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가 오아시스가 아니기에 앞으로도 사막을 헤매야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글을 쓰는 일이 너무 좋아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해왔고,
버텨낼 거라고 말한다면 분명 거짓말일 것입니다.
몇 년 전 낙산공원 근처 카페에서 합평을 했었습니다.
서로의 시를 붙들고 열을 올리다가 문득 노을이 지는 광경을 보았고,
우리는 약속한 듯이 창가를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그 순간 온전히 평화로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기루 같은 그 순간들이 마음에 깊이 남아 오래도록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기쁜 일들은 모두 사막을 함께 걸어온 친구들과 교수님들 덕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가슴이 뛰어서 잠을 잘 못 잤다는 아빠와 너무 기뻐서 울었다는 엄마, 사랑합니다.
그리고 착한 내 동생들과 나를 구원한 고양이 다니,
언제나 애정한다. 마지막으로 책상 너머로 시를 내보일 기회를 주신 대전일보사에 마음을 전하며,
어두운 새벽에서 나올 수 있도록 이름을 불러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언어가 아름다워지는 만큼 성숙해지는 인간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평범한 시어 속 풀잎 같은 날카로움 느껴져"
사람의 눈에 닿으면 동행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말이 있다.
노래가 되고 싶어서 춤까지 추는 언어가 있다.
시인은 그 율려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런 노래는 시인의 깊은 마음 바닥을 짚고 나온다.
심사자의 눈과 가슴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시를 기다렸다.
오래된 서당이나 과거시험장의 시가 아니라,
저잣거리와 편의점과 고시원이 즐비한 골목길의 흥얼거림을 원했다.
태초와 시원의 바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 터진 입술과 언 뺨을 때리고 가는 질풍의 시를 기다렸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만만치 않은 시를 읽으며, 심사자들은 긴장했다.
물론 좋은 시만 있는 건 아니었다.
때론 현란하고 모호했으며, 오랜 학습의 지층에 눌려 화석화된 문자도 있었다.
화장이 지나쳐서 돌비늘이 된 언어들도 있었다.
우리는 원보람 시인의 「악어떼」 외 3편에서 싱싱하게 팔짱을 끼는 젊은 숨결을 만났다.
미래의 역량이 느껴졌다 .
무의미하고 불분명한 감각으로 사유되는 시의 범람 속에서 그의 시는 오롯했다.
평이한 시어 속에 긴장의 풀잎을 날카롭게 세워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현실을 정직하게 읽을 줄 알았다.
언어와 표현법 뒤에 숨지 않았다. 가슴에 이미 시인의 자세가 자리를 잡은 증거였다.
손끝 재주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 진물과 용광로에 펜을 찍는 당찬 의지에 손을 들어주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풋풋한 결점을 덮기에 충분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외 4편,「탄금」외 2편이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았음을 덧붙여야겠다.
두 분은 이미 충분한 관록이 느껴졌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외 4편은 아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에 함몰되지 않고 팽팽한 운율로
시적 순간을 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에 일정한 틀이 생긴 건, 혹 응모작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이마 위에 견고한 벽이 생긴 걸까?
오래 망설이게 했다.
「탄금」외 2편은 우리말의 가락과 정서를 잘 형상화한 수준 높은 시였다.
다만, 전통적인 것이 흔히 그렇듯 오래 쓴 수수 빗자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만큼 언어의 깊이에 닿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선에 들지 못한 분들도 이미 시인이다. 시를 가장 사랑하는 분들이다.
막 여행 차표를 받은 당선자는 출발지에 섰다고 여기시길 바란다.
선외 분들은 갈아타야할 승차시간이 조금 지체됐다고,
마음 토닥이시길 부탁드린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시영 이정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