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74)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 ②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 시인 안도현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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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
일찍이 김수영은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은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부분
시인은 이렇듯 절정에서 조금쯤 옆으로 비껴서 있어야 하는 자이다.
종교가 진리의 절정에 도달한 정신의 영역이라면 문학은 진리의 위기를 포착하는 풍향계여야 한다.
종교와 문학이 손쉽게 화해하면 둘 다 망한다.
시는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서도 안 되며,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시의 마음은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함께 가되,
시의 몸은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쪽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
그 어깃장, 그 버티는 안간힘. 그 불화의 순간에 가까스로, 시는 태어난다.
그해 가을 나는 세상에서 재미 못 봤다는 투의 말버릇은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이 결심도 농담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나 나둥그러진 매미를 주워
성냥갑 속에 모아두고 나도 누이도 방문(房門)을 안으로
잠갔다 그해 가을 나는 어떤 가을도 그해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아무것도 미화(美化)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비하(卑下)기키지도 않는 법(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이 다 살아
버렸지만 벽(璧)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女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家族)들이
매장(埋葬)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 해
그해 가을, 가면(假面) 뒤의 얼굴은 가면(假面)이었다
―이성복, 「그해 가을」 부분
이성복은 아버지라는 우상을 무너뜨림으로써 세계를 지배하는 폭력적 질서를 전복하고자 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 해’ 구절을 두고 사람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장면을 연상했다.
하지만 시인은 어느 대담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뱉는 욕설이라고 해명한 적이 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욕설인지 가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고전적인 관계 설정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시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최승자, 「Y를 위하여」 부분
최승자는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뒤에 이별의 아픔을 정면 돌파하는 자아를 보여준다.
사랑을 구걸하지 않고 자기 갱신의 기회로 삼는 이러한 태도는 시의 끝부분에 가서
“오 개새끼/못 잊어!”라는 결구로 마무리된다.
오, 얼마나 당찬 사랑인가.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10.15.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74)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 ②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 시인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