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의 정원 누가복음 2장 1-7절
얼마 전에 이태리 밀라노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가 한국에 와서 이태원 갤러리에서 예술 작품 전시회를 했습니다. 그 친구가 미술을 하는 친구는 아니고 기독교 미술사를 공부한 친구인데 저희 교회에도 한번 왔었던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감리교 기관지인 “기독교세계”에 3년 동안 표지 그림을 연출했는데 그때 연결되었던 국내외 작가들을 초청해서 1029 참사를 추모하면서 치유와 공감의 정원 “아가서 정원”이라는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아마도 전시회는 오래전에 준비되어 있었는데 1029 참사가 일어나면서 추모 전시회로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작품 몇 점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전체적인 주제는 아가서의 정원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을 연인과의 사랑으로 그려내고 있는 사랑의 정원 치유의 정원 위로의 정원입니다. 그 정원에 있는 작품들입니다.
<잃어버린 길을 찾아서>입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성별을 알 수 없는 뭔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듯하고 어깨에 나비가 한 마리 앉아있습니다. 나비는 다시 태어나고 싶은 듯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저는 이 작품은 아래 일자로 목을 세우고 함께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는 동물이 눈에 확들어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이 작품은 여수에 있는 한센인 마을인 도성 마을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이랍니다. 울다 지쳐 눈물도 메말라 버린 듯한 표정이지만 뭔가의 희미한 바라봄이 가냘프게 살아있는데 그것이 옆에 서있는 동물때문인지 생에 대한 의지 때문인지는 모릅니다. 이 작품을 보다보면 신영복 선생님의 “함께 맞는 비”의 작품이 생각납니다. “돕는 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그 아픔을 느끼면서 함께 서있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기쁘고 즐거운 일들도 많았지만 힘들고 슬프고 아픈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때그때마다 아무런 말없이 그냥 곁에서 동행해주신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판단이나 조언보다도 공감의 마음으로 같이 울어주고 기뻐해주고 함께 길을 걸어오면서 공감의 정원을 가꾸어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는 <애도>라는 작품입니다. 한 여인이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무릎 꿇고 온 몸을 구부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몸이라 그 슬픔이 더 강열하게 느껴집니다. 작가가 이 애도의 작품을 만들 때 뒤의 바탕을 전부 흙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생명의 어머니 대지가 이 여인의 깊은 슬픔과 애도를 감싸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끌어안고 비통해하는 피에타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깊은 고통과 아픔속에서도 생명의 어머니이신 하느님은 함께 고통스러워하시고 아파하고 함께 통곡하면서 그 존재 전체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다음은 <시선>이라는 작품입니다. 이것도 그림이 아니라 일종의 공예입니다. 여러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매우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가 어디서 오는지 아십니까? 작품의 제목이 <시선>이예요. 그런데 새들에게는 하나같이 눈이 없어요. 어떤 새도 눈이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뭐로 시선을 교감하고 있나요? 예 마음입니다.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한해 동안 예배를 위해 교우들의 마음 공부를 위해 그쪽으로 길을 내오신 분들도 있고 기후 위기를 생각하면서 생태적 삶의 모습에 대한 길을 내오신 분들도 있고 공동체 안의 어려운 분들을 생각하면서 돌보고 챙기면서 그쪽의 길을 내오신 분들도 있고 교회 안팎으로 그리고 지역안에서 다양한 평화의 기운을 담아 다양한 결들을 내오신 분들도 계시고 땅을 살리는 농사가 곧 세상을 살리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정성과 사랑을 담아 공동체 텃밭을 가꾸어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저마다 다양한 모습이지만 직접 몸을 헌신하고 시간을 내고 땀을 흘리고 공부를 하고 열정을 냈던 분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모자이크는 다양하면서도 풍성하게 그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누구도 뭐라하지 않고 있는 결대로 다양한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면서, 하나의 방식을 절대화 시키지 않고 다양한 모습들의 결들이 결대로 자라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지하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속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시선이 공존하는 정원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이제 정원같은 정원이 나옵니다. <비밀의 정원>입니다. 온갖 꽃이 피고 작물들이 풍성하고 동물들이 너무나도 평화롭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뭔가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기다림의 정원, 대림절 느낌이 나기도 하구요. 재미있는 사실은 친구가 이 작가의 작품을 받으려고 작가의 집에 찾아갔는데 이 작가가 사는 곳은 경기도 시흥시의 어느 비닐하우스 집이라는 것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논과 밭이 무성할 뿐 꽃이나 나무들이 있을 법할 것 같지 않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친구가 살짝 충격을 받습니다. 이 작가가 그린 그림들이 대부분 이렇더라는 겁니다. <화가의 눈>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일상에서 만나는 동물들, 사람들, 마을 주민들, 계단들, 언덕들, 주변의 길가에서 이런 신비롭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뭐와 같냐면 이런 이야기가 있죠. 어떤 환자가 동시에 같은 병실을 쓰게 되었는데 한사람은 창가쪽이고 한사람은 문쪽에 있었더라는 거죠. 둘은 몸이 너무 불편해서 침대에서 조차 일어설 수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문쪽에 있었던 사람은 늘 창밖의 세상이 궁금했던 겁니다. 그래서 창가에 있는 친구에게 보이는 세상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는 거죠. 그랬더니 동네에 핀 꽃들, 나무의 열매들, 그 사이로 지나가는 아가들을 싣은 유모차, 뛰어노는 아이들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라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문쪽에 있던 사람이 창가의 자리에 욕심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창가쪽에 있는 사람에게 위급한 상황이 오죠. 그 자리를 차지할 욕심에 모른채하죠. 그 다음날 이 창가에 있던 사람은 실려나가고 결국은 그 창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대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커튼을 열었다는 거죠. 그랬더니 눈에 나타난게 뭐예요? 높은 담벼락 뿐이었더라는 거죠. 화가의 눈은 깨달음의 눈입니다. 평범한 일상안에서도 조차도 신비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안에서도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인 겁니다. 싸가지 없게 보이는 사람과 솔직한 사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자기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아 한옥타브 더 높은 삶을 살아온 그런 일상에 숨겨진 비밀들을 깨닫는 깨달음의 정원을 가꾸어온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허연행복>읿니다. 끈들이 뒤틀려있습니다. 벌어지고 뒤틀려있고 뭉쳐있고 뒤엉켜있고 체인도 박혀있고 끊어져 있고 다양한 힘들과 격렬하게 씨름했던 삶의 흔적들이 보여집니다. 그런데 그런 힘들고 어려웠던 삶의 시간들이 쌓여 뭔가 자기 자신이 되어 갑니다. 그걸 작가는 허연행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저마다 다른 관심과 다른 열정속에서 자신을 가꾸어갑니다. 저는 삶의 모든 곳에서 영성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자연안에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때로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도 개인의 내면의 영성, 관계적인 영성, 사회적인 영성, 생태적인 영성 이렇게 다양한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 어느 영성이든 자신만의 삶의 장에서 어제의 나와 치열하게 씨름하면서 <변화된 몸>을 살아내기 위해 살아온 삶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들고 어떤 사람은 기후위기의 주제를 들고 어떤 사람은 관계의 주제를 들고, 어떤 사람은 돌봄의 주제를 들고 어떤 사람은 인간다운 노동의 주제를 들고 치열하게 변화된 몸을 만들어내기 위해 <허연행복의 정원>을 일구어오신 분들이 있고 곁에서 보면서 많은 도전도 받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애씀과 수고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아가서 사랑과 치유의 정원에 어떤 소재들을 담고 싶으십니까? 잘 생각해보면 이 작품들의 표면적 현실은 참으로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한센인들의 삶, 한 여인이 당하는 고통과 슬픔, 겹겹이 쌓여있는 비닐하우스에서의 삶, 눈이 없는 새들, 그리고 그것이 내면의 영성이든 관계적 영성이든 사회적 영성이든 생태적 영성의 길이든 매일매일의 내 거짓자아에 직면해야하는 삶의 현실은 날것 그대로 척박하고도 메마른 광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성탄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잘 보십시오. 그안에 등장하는 소재들 가난, 마굿간, 말밥통, 들에 양을 치던 목자들, 그저 평생 세상의 권력 부귀안락에는 안중에 없이 성전에서 줄곧 성실하게 청소를 하고 단을 쌓고 사람을 키워갔던 시므온이나 안나의 이야기들 참으로 루저들의 지지리도 못난 팍팍한 삶의 이야기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쯤인가에서는 마치 이 아가서의 정원사들과 같이 사람에 대한 생명에 대한 신실함, 따뜻한 시선, 공감과 애도의 마음, 치열한 변화를 꿈꾸는 열정을 담고 살아가는 바로 그곳에 신비가 있고 메시야가 있고 삶의 거룩함이 있다고 오늘 성서의 기자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전시회를 마치고 떠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이태리의 있는 교회도 무척이나 작은데 돈 한푼없이 애도와 공감에 대한 열정하나가지고 한국에 들어와서 전시회 기간 내내 아침부터 저녁늦게까지 오는 사람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서 그 작품을 설명하고 그랬데요. 그랬더니 함께 전시회를 준비했던 사람들이 목사님은 이게 목회시군요. 그러시더라는 겁니다. 그게 교회면 어떻게 전시회장이면 어떻고 텃밭이면 어떻고 회사면 어떻고 카페면 어떻겠습니까 무슨일을 하든 목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현장이 교회고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해동안 귀한 하나님 나라의 열정을 가지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