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 김경미 시창고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아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 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경미 시인
1959년 경기도 부천 출생
한양대 사학과 졸업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비망록]이 당선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쉬잇, 나의 세컨드는>
[출처] 비망록 / 김경미|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