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76)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① 제3의 의미를 만들다/ 시인 이형기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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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제3의 의미를 만들다
이번에는 은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은유도 비유이기 때문에 T+V라는 구조를 갖게 된다. 그
러나 은유에서 T와 V가 결합하는 방식은 직유의 방식과 다르다.
직유의 경우에는 T와 V가 ‘처럼’이나 ‘같이’라는 비교조사를 매개로 결합하지만,
은유는 그것을 중간에 끼우지 않고 T와 V가 직접 결합한다.
예를 들면 ‘불꽃 같은 사랑’은 직유가 되고 ‘사랑의 불꽃’은 은유가 된다.
이것이 직유와 은유를 구분하는 일반화된 형태상의 차이점이다.
이러한 차이점만을 보면,
은유는 직유에서 단순히 비교조사만을 빼내어 그것을 약간 압축시킨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은유와 직유의 차이가 그 정도뿐이라면 그 의미 내용의 차이도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직유와 은유 사이에는 결코 비교조사의 유무에만 그치지 않는 중요한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T와 V의 원형 보존 여부이다.
먼저 ‘불꽃 같은 사랑’이라는 직유를 살펴보자.
여기서는 ‘사랑’이란 T와 ‘불꽃’이란 V가 각각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채 서로 비교되어
후자가 전자를 보완하고 있다.
‘불꽃’이 ‘사랑’의 어떤 상태를 인상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이 그 보완의 내용이다.
이러한 조명의 배후에는 ‘사랑’과 ‘불꽃’의 속성에 대한 그 나름의 합리적 사고가 작용하고 있다.
즉 사랑은 이러저러하고 불꽃은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이런 보완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내용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상대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직유는 합리적·설명적 요소를 갖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은유는 그렇지 않다.
‘사랑의 불꽃’이라는 은유에서는 T와 V가 원형을 유지한다고 할 수가 없다.
T인 ‘사랑’과 V인 ‘불꽃’이 서로 상대방 속에 침투되어 원래의 사랑, 원래의 불꽃과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침투에 의해 모습이 바뀐 두 가지 사물은 의미론적으로도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이질적인 사물이 일체화되어 그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결코 그렇게 될 리 없는
제3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 언어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정한모의 말을 빌리면 이러한 은유는 네모꼴(□) T와 마름모꼴(◇) V가 합쳐져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그림,
즉 은유가 창출한 새로운 의미는 직유의 경우처럼 V로써 T를 설명적으로 보완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은유에 있어서는 또 T와 V의 결합이 합리성을 초월한 직관적 사고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어떤 속성을 ‘불꽃과 같은 것’(직유)이라 할 때는 합리적 분석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바로 불꽃 그 자체(은유)라 할 때는 합리적 대응이 원칙적으로 봉쇄되어버린다.
은유가 합리성을 초월한 직관적 사고의 소산이란 사실은 이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직관은 상상력의 한 양식이다.
직관의 소산인 은유는 불꽃 그 자체인 사랑이라는 명백한 상상적 허구를 제시한다.
우리는 그 상상력이 시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은유는 보다 시적인 비유,
나아가서는 그 뿌리가 시의 본질로 직결되는 비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은유를 어찌 직유에서 비교조사만 뺀 것이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은유라고 번역해 쓰고 있는 영어인 메타포(metaphor)는 원래 뜻이 ‘옮김’ 또는
‘자리바꿈’이었던 고대 그리스의 메타포라(metaphora)에 어원을 두고 있다.
자리바꿈을 한 대상은 언어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자리바꿈을 한 그 이름,
즉 언어는 의미론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사랑의 불꽃’이란 은유도 언어의 그러한 자리바꿈과 그에 따른 의미의 변화를 실증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사정을 다시 한 번 설명한다면
거기서는 ‘사랑’과 ‘불꽃’이 서로 상대방 쪽으로 자리를 옮겨 하나로 어우러져 있고,
또 그 어우러진 하나가 새로운 제3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의미의 기호이고,
따라서 새로운 의미의 창출은 곧 새로운 언어의 창조를 뜻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의 창조는 세계를 언제나 새롭게(낯설게) 바라보고
그 새로운 인식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인의 필수적 과제이다.
흔히 시인을 언어의 창조자라고 말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그러나 사회적 공유물인 언어를 개인이 함부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시인의 언어 창조 작업은 어떻게 수행될 수 있을 것인가?
얼핏 생각하면 길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이 문제에 해결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은유’이다.
그 은유가 언어의 자리바꿈을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의 기호, 그것이 곧 새로운 언어이다.
그러나 모든 은유가 곧 새로운 언어는 아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새로웠던 은유도 되풀이해서 쓰다 보면 헌 것이 되고 마침내는 습관화된다.
이른바 죽은 은유(dead metaphor)인 것이다.
앞에 든 ‘사랑의 불꽃’도 실은 죽은 은유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죽은 은유를 엄청나게 많이 쓰고 있다.
‘교통전쟁’, ‘입시지옥’, ‘증권파동’, ‘무거운 침묵’, ‘달콤한 말’, ‘자연의 숨결’ 등 예를 들자면 그야말로 끝이 없다.
이처럼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널리 퍼져 있는 무수한 은유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은유가 언어를 새로 창조하는 방법의 모델이란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시인을 언어의 창조자라고 하는 것은 시인이 은유를 새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한 은유가 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10.2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76)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① 제3의 의미를 만들다/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