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77)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② ‘소주는 국어’와 ‘빗발의 투석전’/ 시인 이형기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lcm531012/ 시창작강의 - (232)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① 은유의 개념/ 시인 강희안
② ‘소주는 국어’와 ‘빗발의 투석전’
“은유는 계속적으로 수명이 다해서 죽어간다.
쓸모없는 시인은 자기도 모르게 죽어가거나 죽은 은유를 사용하지만
훌륭한 시인은 끊임없이 새로운 은유를 창조한다.”
이미지즘운동의 창시자인 흄의 말이다.
새로운 은유는 그것을 만든 시인이 처음 쓰게 되지만, 같은 표현을 또 쓰지 않는다.
두 번째로 쓰는 은유는 이미 낡은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시인의 은유는 영원히 일회용이라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는 유치환의 시, 〈깃발〉의 첫 구절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도
‘깃발’과 ‘아우성’을 일체화시킨 빛나는 은유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유를 그 자체로 독립된 시의 부분적인 표현 장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의 은유를 따로 떼어본다면 그런 생각이 나올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하나하나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통일된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한 편의 시다.
시는 작은 은유들이 모여서 이룩한 큰 은유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소주는 서울에서 제일 사나이다운 잘난 사람들의 국어다
진눈깨비 내리는 저녁에는 소주를 파는 집에 가자
두부찌개 명태들이 바다를 밀고 가는 물결 소리 빈대떡 균일 몇십 원짜리 불티들
모두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들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마다 올라가는 도깨비들처럼 올라가는 빌딩 밑
소주집은 강한 침묵이 잎사귀를 피운 수풀
소주는 서울에서 제일 사나이다운 잘난 사람들의 국어다
―김요섭, 〈소주론〉 부분
이 시에서 첫 줄부터 ‘소주’와 ‘국어’를 일체화시킨 은유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명태들이 밀고 가는 바다’. ‘몇 십 원짜리 불티’,
‘강한 침묵’, ‘침묵의 수풀’ 등과 또 그밖에 다른 은유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은유들은 물론 따로 떼어볼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봐도 충분히 평가에 값하는 것들이다.
특히 인용문에서 두 번 되풀이되고 있는 ‘소주는…… 국어다’의 은유는
소주잔과 함께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건강하고 선량한 서민들의 생활 감정을
새로운 시각에서 성공적으로 표현한 은유이다.
상대방에게 권하는 소주 한 잔이 백 마디,
천 마디의 언어보다 더 깊이 가슴에 와닿는
진실에 찬 언어로 구실한다는 인식이 이 은유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은유들을
‘독불장군’ 같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시라는
통일체를 형성하는 부분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의 은유 중에 액자 구조의 은유가 있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액자 구조의 은유란 은유 속에 은유가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편의상 형태가 비교적 단순한 액자 은유 하나를 예로 들면
‘소주집은 강한 침묵이 잎사귀를 피운 수풀’이라는 구절이 그러하다.
이 구절에 있어서는 1차적으로 ‘소주집’이란 T가 ‘수풀’이란 V와 결합하여 은유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또 두 개의 작은 은유가 들어 있다.
하나는 ‘강한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그 ‘침묵’이 다시 ‘수풀’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침묵의 수풀’이라고 요약해볼 수 있는 은유이다.
그러니까 세 개의 은유가 어울려 하나의 큰 은유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액자 구조의 은유는 잘 쓰면 은유 상호간의 유기적 결합 효과를 드높이지만
잘못 쓰면 독자를 혼란에 빠뜨려 시의 이해를 방해할 우려도 있다.
하루가 천 근의 추를 달고
가라앉는다
빗발이 무수한 투석전(投石戰)을
벌이는 바다
비에 쫓긴 오후 네 시의 태양은
어디쯤에 있을까
손 흔들며 흔들며
작별하는 바람
어제가 한 다발 꽃으로 살아나는
생의 변방에 배는 닿았다
―홍윤숙, 〈변방에서〉 부분
이 시의 이 인용 부분도 각 연이 모두 은유로 되어 있다.
우선 1연의 경우는 ‘하루’라는 T가 ‘천 근의 추를 달고 가라앉을 수 있는 그 무엇’이란 V와 결합되어 있고,
또 2연의 경우는 ‘빗발’이란 T가 ‘투석전’이란 V와 결합되어 있는 은유이다.
그리고 3연은 ‘태양’(T)과 ‘쫓길 수 있는 것’(V),
4연은 ‘바람’(T)과 ‘작별할 때 손 흔드는 것’(V),
5연은 ‘어제’(T)와 ‘꽃다발’(V)의 결합이다.
이렇게 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은유의 원리를 여기서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 2연의 한 대목만 살펴보면,
거기서는 ‘빗발’과 ‘투석전’이 결합되어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빗발이 바다 위에서 투석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빗발이 투석전을 벌일 수 있는가?
결코 사실일 수 없는 이 명백한 허구 앞에서 우리는 작은 물방울인 비가
엉뚱하게 돌멩이로 변용된 것에 충격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식의 틀을 깨고 비와 돌멩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충격이다.
또 우리는 투석전에 따르는 상처와 피흘림의 아픔을 과히 어렵잖게 상상의 공간 속에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아픔은 자연 빗방울을 돌멩이로 변용시킨 그 새로운 인식의 배경적 정서가 된다.
달리 말하면 이 은유 ‘빗발의 투석전’은 상처받고 피흘린 아픔을 바탕으로
바다 위에 내리는 비를 새롭게 인식한 독창적 언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물론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상상적 유추의 소산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개인적 편차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유일한 정답’이 될 수가 없다.
전혀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또 그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이 나오든 이 은유가 어느 날 바다 위에 내리는 비와
또 그 비를 바라보는 특정한 정서적 시각에 대해 새로운 개안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개인이 바다 위에 내리는 비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한 결과의 하나가 위의 해석이다.
<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10.2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77)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② ‘소주는 국어’와 ‘빗발의 투석전’/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