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制文字 乃服衣裳 (시제문자 내복의상)(백우)
始制文字 乃服衣裳 (시제문자 내복의상)
【本文】
始制文字 乃服衣裳
시제문자 내복의상
伏羲氏 때 처음으로 文字를 만들었고
이어서 黃帝 때는 衣制를 갖추었다.
【훈음(訓音)】
始 비로소 시 制 지을 제 文 글월 문 字 글자 자
乃 이에 내 服 옷 복 衣 옷 의 裳 치마 상
【해설(解說)】
始制文字(시제문자) 복희씨(伏羲氏) 때 처음으로 문자(文字)를 만들었고 문자가 없었던 상고시대는 셈을 하거나 남과의 약속 등에 새끼줄을 맺어 의사 소통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결승(結繩)이라고 하지요. 이와 같은 일은 간단한 약속들은 가하나 의사소통을 하는데는 불편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후로 나무에 어떤 부호나 사건의 양태를 새겨서 의사를 전달하거나 기억하려는 일이 시도되었는데 이를 각목(刻木)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의사를 전달하는데 많은 불편함이 있어 이것이 차츰 문자화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결승시대를 지나 복희씨(伏羲氏)가 비로소 글자를 만들어 정사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신인(神人) 창힐(蒼頡)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를 조적문자(鳥跡文字)라고 합니다. 마치 글자가 새의 발자국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를 조전(鳥篆)이라 하기도 하고, 올챙이를 닮았다고 해서 과두문자(蝌蚪文字)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힐이 처음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에 앞서 갑골문자가 발견되어 창힐이 문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정리했다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시조로 받들고 있는데 삼황오제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다고 했습니다. 진시황 때의 재상을 지낸 여불위(呂不韋)는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책을 썼는데 삼황(三皇)으로 태호복희씨(太皥伏羲氏),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이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를 추가하여 오제(五帝)라 하여 중국의 조상으로 받들고 있습니다만 이들은 모두 다 동이족(東夷族)이라고 지난 번에 밝힌 바 있습니다.
복희씨 때에 문자를 처음 만들었다고 하지만 <한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이보다 훨씬 앞서 기원전 3,897년경 이전에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한국시대(桓國時代)에 한웅(桓雄)은 한인천제(桓因天帝)의 아들로 한인천제는 한웅에게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주어 세상을 다스리게 했는데, 그는 무리 3,000을 이끌고 천산의 남동쪽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에 신시(神市)를 열어 개천(開天)했는데 이름이 박달(檀)이라 합니다. 배달국이지요. 기원전 3,897년 10월 3일입니다.
배달나라 초기에 기록 담당이던 신지(神誌)가 상형표의문자를 만들게 되었는데, 사슴이 지나간 자리를 보고 영감을 얻어 녹도문(鹿圖文)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글자의 모양이 사슴뿔모양으로 생겨 녹서(鹿書)라고도 합니다. 상형문자가 발전하면서 학문도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서기전 3,500년경 태호복희(太皥伏羲)가 역학(易學)을 발전시켰으며 글자모양을 용의 형상을 본따 용서(龍書)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700년경에는 더욱더 학문이 발전되어 자부선인(紫府仙人)의 삼황내문경(三皇內問經)이 황제헌원(黃帝軒轅)에게 전수되는 등 하였으며, 자부선인은 빗방울모양을 본딴 우서(雨書)를 만들었고, 창힐(蒼頡)은 조족문(鳥足文)과 과두문(蝌蚪文)을 만들었으며, 이때는 배달나라 14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인 치우천왕(蚩尤天王) 시절로서 꽃모양을 본따 만든 화서(花書)라는 글자체도 있었다고 합니다. 황제헌원(黃帝軒轅)은 창힐 (蒼頡)의 조족문(鳥足文)과 과두문(蝌蚪文)을 받아들여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자에 대해 나왔으니 한글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하겠습니다.
한글은 세종대왕 때 창제되었다고 하는데 한글의 원형은 단군조선시대 기원전 서기전 2,181년 만들어진 가림토 문자라고 합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단군세기(檀君世紀)」에 보면 제3대 갸륵단군(嘉勒檀君)께서 경자(庚子) 2년(BC 2,181)에 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며 정음 38자를 만든 취지를 밝혀 놓았습니다. 글자 모양이 지금의 한글과 거의 같습니다. 세종 25년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발표문에 의하면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었다." 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음가는 없이 고전(古篆)으로만 내려오는 것을 음가를 부여한 것 같습니다. 아마 고전을 되살려 재창조하신 것이니 위대한 위업을 이루신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자주성과 독창성, 애민사상은 길이길이 칭송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글의 원형이 단군시대에 만든 가림토 문자라는 것을 어떤 분이 이십 수년 전에 가지고 와서 보여 주길래 이 방면의 책을 구입하여 본 바 있어서 이 기회에 적어 보았습니다.
乃服衣裳(내복의상) 이어서 황제(黃帝) 때는 의제(衣制)를 갖추었다.
상고시대에는 나뭇잎이나 풀로 가리거나 아니면 짐승의 가죽을 가지고 더위와 추위를 면했습니다. 그러다가 황제(黃帝) 때 호조(胡曺)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는 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드는 것을 보고 고치의 실을 뽑아 비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윗옷(衣)과 아래옷(裳)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입게 하니 사람들은 의관을 갖춰 위의를 엄숙히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황제(黃帝) 때 기백(岐伯)이 의상(衣裳)으로 관품(官品)과 제례(制禮)를 표시하고, 음악을 짓고 갑옷과 투구, 북과 호각(號角)을 만들고 집과 관각(官閣)을 지었다고 합니다. 기백은 황제 때의 명의(名醫)입니다. 저 유명한 황제내경(黃帝內經) 18권을 저술한 사람입니다. 이 황제내경은 의서(醫書)의 고전(古典) 중의 고전입니다. 이 책은 현재까지도 동양의학을 구성하고 있는 기초이론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문자를 처음 만든 것과 의복을 처음 지은 것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인이 나라를 다스림에 백성을 위하는 덕이 컸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