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79) 목숨을 끊기 직전에 쓴 시와 끊기기 직전에 쓴시 – 황현의 〈절명시〉와 강우규의 〈사세시〉/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
목숨을 끊기 직전에 쓴 시와 끊기기 직전에 쓴시 – 황현의 〈절명시〉와 강우규의 〈사세시〉
뉴시스 http://v.media.daum.net/v/ 황현의 절명시
◇ 저항시의 백미
일제 강점기 때 쓰인 민족적 저항시의 대표작으로 우리는 흔히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와 심훈의 〈그날이 오면〉(1930) 두 편을 듭니다. 작품의 질적 함량은 이 두 편에 미치지 못하지만 〈절명시〉와 〈사세시〉는 목숨을 불태워 쓴 시이기에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난리 속에 살다 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그 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게 되었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치는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 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해만 길구나
이제부터는 조칙(詔勅)이 다시 없을 것이니
옥같이 아름다웠던 조서(詔書)에 천 가닥 눈물이 흐르는구나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시름하는구나
무궁화 이 강산도 이미 사라졌도다
가을 등잔불 아래 책을 덮고 수천 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를 위해 한 일 조금도 없는 내가
다만 살신성인할 뿐이니 이것을 충(忠)이라 할 수 있는가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
―황현, 〈절명시〉 전문
단두대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강우규, 〈사세시〉 전문
대한 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이 됨으로써 나라를 통째로 잃는 비보를 접하자
한말의 문장가요 역사가요 우국지사인 황연(1855~1910)은 〈절명시〉를 써놓고
아편을 술에 타 마신 후 절명했습니다.
아편 가루를 물이나 술에 타 마시면 독약이 되는데,
김소월도 이 방법을 택해 자살에 성공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합병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황연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더니 이 시를 써놓고 9월 10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칠언절구 한시인 이 작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제1연에서 황연은 이미 보호조약이 체결된 을사년(1905)부터 자결을 결심해왔음을 말합니다.
나라를 완전히 잃었으니 가물거리는 촛불처럼 마침내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2연에서는 요망한 일본의 기운이 사방천지를 어둡게 하더니
국권을 빼앗아가 이제는 임금의 조칙을 받을 길이 없어졌음을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제3연에서는 나라가 망하고 산천을 빼앗겼으니 누구를 위해 공부할 것이냐고 하면서
지식인으로서 못다 한 책무를 드러냅니다.
제4연에서는 자신이 죽는 것은 충(忠 )를 다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적을 탄핵했다가 참형당한 진동(陳東)을 본받지 못하고 겨우
몽고병의 침입 때 자살하고 만 윤곡(尹穀)의 뒤나 따를 뿐이라고 통탄하고 있습니다.
강우규(1855~1920)의 이 짤막한 시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가 직전에 쓴 것입니다.
강우규는 북간도와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모종의 정보를 입수하고는
1920년 8월에 서울로 잠입했습니다.
9월 2일, 남대문정거장으로 간 그는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일본의 고위 인사 37명을 다치게 했고 그중에는 사망자도 나왔습니다.
의사는 그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는데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에 쓴 시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강우규는 몸은 있어 사형이라도 당할 수가 있지만 나라가 없는 것이 너무나
비통하다는 말을 이 시에 담았습니다.
세상에 사직하는 시, 제목부터가 비통합니다.
나라를 빼앗기자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자살한 황현이나 식민 지배의 최고 우두머리를 암살하려다 붙잡혀
사형당한 강우규의 애국심을 지금 이 시대에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혹은 ‘목숨을 다해’ 시를 썼던 두 사람의 자세는 우리 모두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쓰인 시는 쉽게 잊혀질 테니까 말입니다.
<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수업, 시(詩) 어떻게 쓸 것인가?(이승하, 도서출판 kim, 2017)’에서 옮겨 적음. (2021.10.2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79) 목숨을 끊기 직전에 쓴 시와 끊기기 직전에 쓴시 – 황현의 〈절명시〉와 강우규의 〈사세시〉/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이승하|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