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앞머리를 5센티까지 기르게 해 달라. 하나, 학교 옆 공장의 소음을 작게 해달라. 하나, 선생님들은 너무 심한 욕은 하지 말아달라. 하나, 등교시간 교문 앞에서 복장단속이 너무 심하게 한다. 하나, 운동화를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게 하라. |
머리카락의 현행 기준은 3센티. 손바닥을 올려놓았을 때 스승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삐쳐 나오면 교칙 위반이라는 것이다. 공부를 시키려면 두발단속보다 하천 건너 공장의 쇳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것부터 시정해달라. 범생이들은 학업에 몰입할 수 없었고 불량상품들 역시 낮잠을 잘 수가 없다. 그런데도 스승님들이 아예 귀를 닫은 채 입에 욕만 달고 다니신다. 비속어 따위야 몸에 익숙한 것이지만 말끝마다 돌대가리 소새끼가 되어야 하는 건 집안 족보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수업시간에 도시락을 까먹으면 쥐새끼가 되고 가방에서 포르노 사진이 나오면 갈보 족보가 된다. 게다가 등굣길 교문지도도 너무 살벌하다. 훈육부 싸부들도 아침부터 인상 구기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지만 규율부 자슥들까지 설쳐대는 게 심히 불편하다. 동급생끼리 완장값 하느라고 이름 적는 밀고자 작태가 괘심해서 한판 붙었다가 노대위님한테 싸대기도 맞았다. 또 있다. 운동화라도 마음대로 신게 해달라. 매점에서 달표학교 마크가 찍힌 것만 사라는 건 억지다. 혹시 학교에서 운동화 장사로 돈을 벌려는 거 아닌가.
내가 (키순서 1번, 149센티. 사춘기가 2년쯤 늦게 왔음.)가.
“매점 운동화는 250부터인데 저는 240이라 맞는 게 없는데요.”
라고 얘기했다가 쪼인트만 한 대 더 맞았다. 집게로 발바닥을 늘려서 운동화 크기에 맞추라신다.
스승님들은 고딩들의 머리카락을 학대하는 게 바른 교육이라고 자부하시는 것 같다. 바리깡과 가위질이 시도 때도 없이 춤추는 것이나 특히 도망칠 방법이 아예 없는 시험 시간 출동 때에도 표정이 엄숙하고 교육적이다.
물론 머리를 깎여도 얼마든지 변종이 가능한 게 사춘기 타법의 정수다. 머리에 빵모자를 뒤집어쓰면 오히려 불량 포즈의 첨단으로 보이기도 하니 그 정도 뽀대만으로도 달건 선수들 앞에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더러는 아예 잘린 흔적 그대로 학교에 다니기도 했으니 그게 오히려 깡다구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귀밑을 자르면 그냥 반창코나 파스를 붙였지만 이마에서부터 바리깡 고속도로를 내면 ‘엣다 모르겠다’ 통으로 내놓고 다니기도 했다.
그나마 인정이 있었던 스승님은 독일어님(45세. 권투 선수 페더급 출신). 다른 티춰들처럼 귀밑머리를 쥐어뜯지 않는 대신 앞치마와 바리깡, 가위, 면도기까지 이발도구 일체를 갖춘 채 게시판 뒤편에 질서정연하게 배치시키고 정식 이발을 해주셨다. 다 깎은 다음 거울을 비춰주며.
“마음에 드냐? 깔끔하지.”
불안감을 다독거리며 인생상담도 시도하면서 나머지 모발까지 정리해준다. 물론 ‘성실’ ‘효도’ 따위의 진부한 스토리지만 스승과 제자가 두런두런 이야기할 기회도 절대 흔하지 않았으므로 달표 선수들 역시.
‘쪼다처럼 보이는 짧은 머리가 어른들 눈에는 진짜로 단정해 보일 수도 있는가?’
아무튼 독일어님의 단속 방법에는 아무도 불만이 없었다. 이발 수준 역시 프로 이발사에 근접하므로 강제성을 띈 것을 제외하면 이발비까지 절약되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셈이기도 하다.
나머지 스승들은 등장과 동시에 점령군처럼 무자비하게 초토화시켰다. 노대위님은 그나마 귀밑을 밀었지만 석교련님은 하루에도 스무 명 이상씩 이마마다 고속도로를 내었다.
“학생은 학생다운 게 정답인데 느그들이 당장 어른이 되고 싶은 심뽀야. 담배도 피우고 지지배들 팔짱 끼고 다방이나 포장마차에서 쐬주도 마시겠다는 것 아냐.”
교복 윗도리를 벗는 순간 어른과 학생의 구분이 되질 않는다는 거다. 그 나이 계급의 확실한 구분을 위하여 3센티 이상의 모발만 만나면 공격적인 철퇴를 찍어야 한다. 그렇다고 학동들이 늘상 절망의 표정만으로 사는 건 절대 아니다. 스승님들이 혀를 차고 나가자마자 거울 속의 괴물 용상을 마주보며 뺘샷빠샷 이소룡 포즈로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청춘의 에너지를 분출시켰다.
노대위님에게 이마빡 고속도로가 뚫린 기철이는 아예 백구로 밀어버렸다. 이부가리는 모발 3밀리 가량 남겨놓은 봐줄만한 스타일이고 빡빡은 바리깡으로 그대로 밀어버린 촌티가 덕지덕지한 포즈인데 두 가지 모두 날려버렸다. 그리고 백구머리가 쿵, 하고 등장한 것이다. 스님들이 면도기로 싸그리 밀어버리듯 번쩍번쩍 쳐버렸으니 마치 파리들의 미끄럼틀 같다. 새벽 등굣길부터 놀새떼들이 하나씩 기철이 곁에 몰려들더니.
“뭐라고 안 해. 꼰대들.”
“방법이 없지. 머리카락이 한 분도 안 계시시니 자를 수는 있어도 심을 수는 없거덩.”
아닌 게 아니라 훈육실에서도 민대머리만 문지르며 ‘반항하지 맛, 애구구.’ 슬컹슬컹 꼬집었을 뿐이다. 그 후 머리를 깎인 아이들은 하나씩 아예 백구대열에 합류하면서 반항을 표시하기 시작했으니 그게 ‘삭발 깡패’의 시초가 되기도 한다. 교실마다 알전구 대가리 서너 명씩 들어앉으니 급기야 형광등이 꺼져도 교실이 번쩍번쩍 눈이 부셨다. 그러나 ‘절망적 자해행위’의 매끈한 표주박 대가리 역시 며칠만 지나면 금세 터래기가 자라기 시작하면서 뽀대가 깨지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맨질맨질 밀어도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나면 길게 되므로 스승님의 바리깡은 녹슬 틈이 없었다.
석교련님은 육군병장 작대기 네 개 출신 교련 교사다. 원래 체육교사가 꿈이었으나 전문대 출신이라 교련 과목 보조교사로 교단에 채용되었다는데 간혹 교무실에서도 계급장 문제로 옥신각신 다투기도 했단다. 그 대신 아이들만큼은 확실하게 다루었다. 싸대기나 발길질은 기본이고 통닭구이나 원산철교 같은 신종 기합도 개발하여 야생마 고삐리들을 꽉 잡았다. 지시봉을 종횡무진 휘두르는 야전군 체질이었고.
스승들의 그 거침없는 행보에 달표 고딩들이 반발하게 된 것이다. 등굣길 교문에서 걸리고 담치기하다 걸려서 깎이고 시험 때마다 훈육부 스승들이 와그르르 출동해서 머리카락을 절단하니 도대체 문제풀이에 몰입할 수가 없다. 머리 짤리며 싸대기 맞는 코스가 오랜 동안 익숙했던 즈음이다.
“에휴, 인생이란 이런 건가?”
대충 자포자기로 늘어져 있는데 어느 순간 저쪽에서.
“한 판 붙자.”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찰나 두식이의 그 표정이 장난이 아님을 눈치 채면서 교실의 중심이 당장 그에게로 모아졌다. 그랬다. 스승님에게는 결코 저항할 수 없다는, ‘금기의 벽’을 깨던, 그게 ‘삼일 천하 거사’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일순 교실에 찬바람이 쌩 몰아치면서 어금니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몇몇 학교에서 데모를 벌이며 교문도 때려 부쉈다는 얘기도 들었다. 명문고 아이들은 대학생들 따라 ‘독재타도’를 외쳤고 삼류고 아이들은 ‘두발자율화’나 ‘무자비한 체벌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며 일단 수업부터 거부했단다.
“진짜로 한 판 벌이니 뜻이 있는 자는 따르라. 자퇴를 당하더라도 책임은 내가 지고 짤릴 때 짤리더라도 그게 더 이상 머리카락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될 거야. 전교생이 사열대에 모여 탄원서를 낭독하고 그게 단 되면 여의도까지 진출하자구. 오늘 밤 우리 집으로 모여.”
그렇게 탄원서를 만들고 검토했으니,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똑똑한 행위다.
모사를 실천하는 아침은 유리창으로 성에꽃이 핀 늦가을이었다.
“나가자.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말자.”
그가 교탁에 올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우우.
3층에서 계단 아래로 원숭이 떼처럼 숑방숑방 질주하려 했었다. 그러나 허당이었다. 2층에서 노대위님께 막히니 앞장서서 용감하게 뛰어내리던 아이들은 갑자기 고양이 만난 쥐떼처럼 화들짝 발발 떤다. 선두그룹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위쪽으로 원위치하려고 했지만 콰르르 밀고 내려오는 아이들을 당할 수가 없어 진퇴양난이 되었다. 위의 데모꾼들은 선두의 선 아이들이 노대위님의 서슬에 팥죽이 되건 말건 후미에선 오로지 밀어부칠 뿐이고.
“올라가. 빨리 안 올라가.”
그때 내가(조무래기 1호) 얼떨결에.
“뒤로 돌아 매점 통로로 빠져 사열대 앞으로.”
단발마로 외치자마자 우왕좌왕 대열의 데모꾼들이.
“뒤로 돌아 매점 통로로 빠져 사열대 앞으로.”
일사분란하게 전달되면서 2층 복도로 피해 교장실 정문 계단을 지나 사열대 앞에 집합했다. 자, 이제 넓은 데서 한 판 붙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두식이와 석봉이가 탄원서를 낭독하려는 순간.
스승들의 몽둥이 패거리가 운동장 쪽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노대위, 석교련, 훈육실 찐방님, 덩치맨 물리까지 쿵,쿵,쿵 맘모스 몸집의 전원출동이다. 그리고 2층 교장실에선 웬 망원경 하나가 스승과 제자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며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찐빵님(담임. 관악부 지도)은 키가 작았다. 160이 못될 성 싶은데 두상이 크고 어깨가 넓어 얼핏 가로 세로가 비슷해 보이는 체형이었다. 그래도 몸이 가볍고 운동 신경이 뛰어났다. 4층 창틀에서 교직원끼리 축구시합을 하는 장면을 보면 곰돌이 인형 같은 몸집 혼자 몇 사람씩 제켜내곤 했다. 빠르다. 아이들은 그 스피디한 동작을 보며 일찌감치 기가 죽기도 했다.
“들어가라.”
그런데 의외로 온화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제자들의 스크럼을 만난 찐빵님의 처음 목소리가 부드럽고 온화해서 학동들은 즉각 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보라. 우리들이 뭉치니까 선생님도 겁을 먹고 어쩌지 못하는구나. 저 무시무시한 노대위님, 석교련님, 찐빵님, 덩치맨 물리 선수님이 우리들의 스크럼 앞에서 타협의 미소를 짓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당당하게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 일면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 이틀 동안은 기가 승해서 나까지 몸이 허공 5센티 이상 떠나니는 것 같았다.
사흘 뒤에는 판세가 뒤집혔다. 우선 두식이, 종구, 기철이 등이 개별적으로 훈육실에 호출되면서 교실의 구심점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종례 시간에 각목을 치며 들어오시는 찐빵님의 노기 띤 표정을 보는 순간 모두 꼬리를 바싹 내리게 된 것이다.
찐빵님은 하필 맨 앞자리 가운데의 내 얼굴을 막대기로 겨누더니.
“1번 나와.”
일주일마다 같은 줄끼리 좌측으로 한 칸씩 옮기게 했으니 그게 소위 좌로 1클릭 로테이션이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으니 그게 60명 중 첫 번째 대면이다. 제기랄 키가 작으니까 단체로 깨지는 것도 항상 첫 빳따다. 처음 빳따(bat)와 60번째 몽둥이 강도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는 건 앞자리 번호들만이 안다. 찐빵님은 단도직입.
“왜 데모했어?”
“얼떨결에 휩쓸렸습니다.”
한심한 대답이었으나 일면 그 말이 정답이긴 했다. 솔직히 학년 전체가 단체로 움직이는데 교칙 운운 하며 혼자만 빠진다면 그건 배신자 행위이다. 학생은 학생끼리 같은 편이어야 하므로,
“넌 병신이냣!”
각목이 그대로 머리통으로 떨어지니 몸의 고통과 수치심의 혼재였다. 대여섯 대 연거푸 맞으면서 ‘대답을 잘못한 건가’ 반성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와중에도 채승필 임봉완 등 몇몇 범생이 소신파들이 데모대에서 빠지기도 했다.
“2번.”
학급 부반장 석칠이를 보며 손목시계 끈을 벗어 교탁 위에 올려놓는다. 아주 짧은 순간 교실은 공포보다 더 깊은 침묵에 빠졌다. 찐빵님은 키순서 2번 석칠이(158센티)보다 더 단신이지만 가슴둘레는 두 배쯤 되는 것 같다. 그대로 발길질과 뺨이 날아가자 석칠이의 목 부위가 시뻘겋게 불어났다. (이튿날 석칠이는 나에게 ‘어제 맞은 건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울멍거렸다.) 3번은 자퇴였고, 관악부인 4번 백남일은 일찌감치 알아서 칠판에 손바닥을 대고 엉덩이를 바싹 붙였다.
“관악부가 ……나를 배신햇.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했는데……배은망덕한.”
유리창 어디쯤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실제로 찐빵님은 관악부를 아주 열심히 가르쳤다고 소문이 났던 터이다. 방과후 늦게까지 무료 레슨을 시켰으며 등록금이 없는 애는 손수 월급통장을 털기도 했다. 그러니까 ‘화끈하게 가르치는 만큼 확실하게 때린다’는 찐빵님 원칙이었다. 그래서일까, 승일이는 다섯 대를 맞으면서도 칠판 짚은 손을 끝까지 떼지 않아서 칠판 정면에 손바닥 땀방울 자국이 찐득하게 묻어버렸다.
그러나 다섯 명 이후로는 찐빵님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는지 몽둥이의 강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뒤 번호 달표 건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짐을 눈치 챘지만 모두들 ‘코프라 트위스트’처럼 비틀면서 아픈 척 엄살을 했다. 결국 찐빵님이 원하는 대답은 자신이 가장 경멸하기도 하는.
‘그냥 얼떨결에 했습니다’
내가 그야말로 얼떨결에 뱉던 바로 그 문장이었다. 그렇게 대답하면 세 대씩 때리고 (점차 파워가 떨어지는) 정리할 참이었다. 그런데 가끔 뒤 번호 아이들 중에서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인권침해입니다.”
“의리를 버릴 수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지조 있는 발언의 소신파들은 당연히 차별화된 치도곤을 당했다. 그래도 1번 학생인 나와 2번 석칠이처럼 ‘마구잡이 두들기기’는 아니고 ‘엎드려뻗쳐’ 자세에서 다섯 대씩이었으니 조금은 품격 있는 체벌인 셈이다. 아무튼 62번까지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아무도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장엄했던 ‘두발 단속 삼일 거사’가 막을 내렸고 두식이는 자퇴 서류를 내게 되었다. 학부형들이 소환되면서 나머지 열댓 명도 조금 낮은 수위로 징계를 받으면서 흐지부지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석주네 엄마가 교무실 앞에서 사흘 내내 무릎을 꿇었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우리들은 그 거사를 금세 잊게 되었다.
두식이의 퇴학 기념으로 마지막 축구를 한 판 벌였다. 30번 안쪽과 30번 바깥쪽이니 덩빠리팀과 조무래기 팀으로 나뉜 셈인데 자퇴생 두식이가 심판을 보았다. 순둥이 창호는 60번이었으나 본디 작은 애들과 어울렸으므로 조무래기 팀으로 소속되었고 17번 공헌이는 키가 작았으나 원래 깡다구답게 흡연파가 많은 큰아이들 편에 섞여 축구를 했다. 그 송별 축구는 전후반 모두 팽팽하게 맞서다가 2:2로 동점이 되었고 패널티킥 승부에서 큰 애들이 한 골 차이로 이겼다. 그리고 이제는 두식이와 헤어지는 시간, 하나씩 작별의 악수를 나누던 두식이는 나에게.
“안녕 다음에 만날 땐 1번이 아니라 30번쯤이 되어서 만나자.”
“악수를 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헤어졌을 뿐이다. 이튿날 지방 학교로 전학을 가는 ‘두발 자율화 데모의 영웅’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본 게 끝인데, 자꾸만 눈시울이 시렸다. 진눈깨비가 희끗희끗 몰려와 눈동자를 적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