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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년은 그 후 8년 동안 갇혔다가 2001년 가석방 형식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에 비해 형량이 가벼운 것은 미성년자였기 때문입니다. 석방된 이들은 새로운 이름으로 생활하였지만 2010년 이 중 한 사람인 존 베너블스가 다시 수감되었다는 소식이 언론에 퍼졌고, 영국 사회는 다시 한 번 그 끔찍했던 사건을 떠올리는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영국의 작가 조나단 트리겔은 이 실제사건을 배경으로 2004년 소설을 발표합니다. 소설에서는 피해자가 열두 살 소녀, 가해자 역시 열두 살의 소년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피해자의 이름은 안젤라로 명기하지만, 범행을 저지른 소년 둘은 그저 A와 B라는 익명의 이니셜로만 등장합니다. 소년 A는 출소할 때 ‘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소설은 출소한 잭이 고향과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운송업체 직원으로 일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가석방 교섭자인 아버지뻘의 테리가 유일한 친구인 잭은 일주일에 한 번 그를 만나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듣습니다. 테리는 잭이 무난하게 사회에 적응하도록 애써줍니다. 테리에게 잭은 아들 쯤 되는, 애초 길을 잘못 들어선 안쓰러운 앳된 청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소년의 이름과 범행 당시의 사진을 틈틈이 공개하면서 세상에 경고합니다.
“살인마가 언제 당신 주변에 나타나 당신과 당신의 어린 아이의 뒤통수에 흉기를 휘두를 지 모른다. 수십 년이 지나고 세상이 끝나더라도 우리는 이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범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라. 이것이 정의다.”
언론은 출소한 소년 A의 행적이 궁금하지만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진 터라 아무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직장 동료들의 눈에 잭은 한없이 여리고 순수하고 지나치게 순박하고 소심한 청년으로 비칩니다. 당연합니다. 어린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느라 잭은 실제로 이성을 사귀어본 적도 없고,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도, 조직생활을 해본 적도 없으며, 심지어는 좋아하는 물건을 고르거나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하는 일이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잭은 직장에서 의롭고 순수하고 성실하고 착한 동료로 인정을 받았고 아주 멋진 글래머 여자친구까지 생깁니다. 잭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성과 사랑을 나누며 한없는 행복감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잭의 행복은 거기까지입니다. 직장동료와 함께 일을 하던 중에 교통사고 피해자를 구출하고 살려내어 영웅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조심하고 꺼렸건만 성인남자로 자라난 데다 야구모자까지 깊숙하게 눌러쓴 ‘잭’이 바로 그 소년A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잭이 세 들어 사는 집 앞에는 언론사 기자들이 와서 죽치고, 그토록 친절하던 모든 사람들은 한순간에 냉랭하게 돌변합니다. 그를 모르던 사람들마저 깊은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잭은 막다른 골목에 이릅니다. 그가 열어젖힌 비상구는 자살이며, 이제 그는 편안해졌습니다.
작가 조나단 트리겔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봅니다. 잭이 무서운 살인을 저지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건 학교에서마저도 따돌림 당하는 바람에 도심의 상가를 배회하였고, 때마침 같은 반 소녀를 우연히 만나 뒤를 밟던 중에 우연히 벌어진 사건입니다. 작정하고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소년 B가 칼을 휘두르면서 일은 묘하게 꼬였습니다. 한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이 이렇게 처참한 비극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로 인해 한 생명이 도륙 당했고, 피해자 가족은 평생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며, 소년 A의 가정도 깨어지고 가족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재앙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살인마’라는 꼬리표입니다. 그가 아무리 자신을 숨겨도 세상은 그를 찾아내어서 단죄하고 또 단죄하며, 세상을 설령 속일지라도 그 스스로에게 자신의 과거는 언제나 주머니 속의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았습니다. 생명이 파닥이는 세상에서 살인마가 편안하게 숨을 쉴 공간은 없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단어가 꼭 두 개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의식’과 ‘참회’입니다.
한 사람의 죄는 어디에서 시작하며, 어떻게 끝날 수 있을까요? 죄 값을 치렀다 해도 당사자는 ‘내가 죄를 저질렀다’는 죄의식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숱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기억과 자신의 가슴에 깊이 뿌리내린 ‘죄에 대한 의식’ 그 ‘죄의식’마저 깨끗하게 씻겨나가야만 비로소 그는 용서받은 자유의 몸이 될 것입니다. 아마 ‘참회’라는 것은 바로 이걸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 그게 가능할까요?
천수경에서 만나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가 얼마나 어려운 ‘깨달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이가 있고, 잔인하게 살인을 한 이가 있는데,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피비린내 나는 현실이 눈앞에 벌어졌는데, “죄는 자성이 없으며, 그저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는 구절은 과연 사람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무책임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구절이 ‘진리’이려면, 사람은 얼마나 지독하게 자신을 비워내야 할까요? 사람이란 것이 이처럼 어렵게 느껴지기는 또 처음입니다.
(이미령/보리살타의 서재/불교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