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41)
# 선이가 잠들다
악독한 오참봉에게 원한 맺힌 거지들
오참봉의 삼대독자 손자 선이가
죽어간다는 소식에 축배를 드는데…
며칠후
거지떼 소굴위를 지나던 오참봉이
“선이야, 네가 하고픈 것이 뭐냐”......
척산교 돌다리 밑은 거지 떼들의 소굴이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계절은 역시 겨울이다.
매서운 강바람이 몰아칠 때면 거적때기 움막집 속
거지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자도 뼈까지 와들와들 떨린다.
지난 겨울엔 모닥불 불똥이 튀어 움막집 열일곱 채가
전소했다. 간들거리는 목숨을 부지하고 겨울을 난
거지들은 봄이 유별나게 새롭다.
척산교 돌다리 아래서 술판이 벌어졌다.
윤진사댁 잔치판에서 술을 얻어와 모닥불 가로 빙 둘러앉은
거지 떼들이 축배를 높이 들어 올렸다.
“오참봉 가슴에 못이 박혔다! 축배!”
모두가 벌컥벌컥 탁배기를 들이켰다.
이곳 거지들 대부분은 천석꾼 부자 오참봉에게 원한이
맺혀 있다. 보릿고개를 못 넘겨 오참봉의 장리쌀을
야금야금 받았다가 몇 년 만에 서너마지기 밭뙈기를
모두 넘기고 식솔들을 데리고 온 사람,
오참봉에게 겁탈당한 마누라가 목을 매 숨지자
술독에 빠져 살다가 무마조로 받은 밭 두 마지기를 다시
오참봉에게 넘기고 이곳으로 와 거지가 된 사람,
오참봉네 행랑아범으로 있다가 도둑누명을 덮어쓰고
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사람….
그들이 축배를 높이 들며 희희낙락하는 건 오참봉의 손자,
삼대독자 선이가 심장이 막혀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들의 두목, 척산두취가 돌아와 호통을 쳤다.
“야 이놈들아! 우리가 아무리 오참봉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지만
인간의 도리는 지켜야 하는 법이여!”
그도 오참봉에 대한 원한이 겹겹이 쌓였지만 불씨처럼
꺼져가는 어린아이의 불행을 기뻐하는 거지 떼들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꾀죄죄한 두루마기에 구겨진 것이지만 의관을 갖추고
윤진사댁 잔치에 갔던 척산두취도 벌컥벌컥 탁배기를 들이켰다.
며칠 후, 춘삼월 봄바람에 진달래는 산을 벌겋게 물들였고
나비는 너울너울 춤을 추는데 구인당 한의원을 나오는
가마 속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숨을 할딱거리는 일곱 살 선이를 무릎에 앉혀 안고 있는
오참봉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보름을 못 넘긴다는
의원의 말이 오참봉의 오장육부를 쥐어짰다.
“선이야, 네가 하고픈 것이 뭐냐?
이 할아버지가 무엇이든 들어줄게.”
그때 오참봉 조손을 태운 가마는 까딱까딱
척산교 돌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잠깐!”
선이가 가마를 세우고 가마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남녀노소 거지 떼들이 개울 옆 풀밭에 앉아 얻어온 밥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할아버지,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냐?”
“저 사람들 우리 집에 불러 이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여주고 싶어요.
제기차기 하던 내 친구도 저기 있어요.”
이튿날, 오참봉네 집에서는 때아닌 잔치판이 벌어졌다.
소 한 마리를 잡아 가마솥에 고깃국이 설설 끓고
석쇠에서는 불고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선이가 친구들과 뒤꼍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노는 동안
사랑방에선 오참봉과 척산두취가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나의 업보인가?”
오참봉이 오랜 침묵을 깨자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척산두취가 무겁게 대답했다.
“저기 남향받이 산자락에 내 밭이 다섯마지기가 있네.
그곳에 척산교 아래 사는 사람들이 살 집을 짓게.
우리 고을 목수들을 다 불러와 가구 수대로 집을 짓고,
그리고….”
오참봉이 말을 끊고 천장을 보고 있자 척산두취는 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오참봉의 입이 열렸다.
“논 백마지기, 밭 백마지기를 내놓을 테니 자네가 적당히 나눠주게.”
척산두취가 방바닥에 얼굴을 박고 어깨를 들썩였다.
열흘 후, 봄 햇살을 담뿍 받으며 목수들과 거지들이 어울려
집 짓는 모습을 구경하던 선이는 할아버지 오참봉 품에
안겨 안온한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