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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가 되면서, 뉴스에서는 ‘얼굴 없는 천사’들에 관한 소식이 이따금 들려오고 있다. 자신의 정체를 전혀 밝히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는 말과 함께 거액을 기부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해 기부 문화에 선뜻 동참할 수는 없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소식을 통해서 한 순간이라도 가슴속에 따뜻한 온기를 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체로 과거에 어렵게 지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 주위의 소외된 이웃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이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 달린 제목 ‘결핍의 힘’이라는 표현을 보고, 문득 ‘결핍이 축복이다’고 했던 어느 사회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수 년 전 어느 잡지에 실린 조한혜정 선생의 글에서 읽었던 구절이다. 늘 풍족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무언가 결핍 상태에서 출발할 때 하나하나 채워나간다는 것에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규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인가 교육 시설에서 생활하는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스스로 자신의 할 일을 찾아가는 그들을 통해 느꼈던 경험을 기록한 글이라고 기억된다.
저자 역시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모두 깜언>에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결핍을 갖고 있다. 결핍은 사람과 사람을 맺어 주는 매개가 되고, 사람과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힘이 된다.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 가는 청소년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 먼저 주인공인 유정이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생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입 모양이 이상하여 발음이 잘 되지 않는 이른바 ‘언청이’로 태어나,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의 기형에 대해 결혼 전의 병력을 의심하는 아버지 때문에 집을 나가고, 아버지 역시 몇 년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런 조카를 친딸처럼 품어주는 작은아빠, 그리고 국제결혼을 하여 베트남에서 온 작은 엄마와 사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작은 아빠는 친환경 농업을 하면서, 농촌을 지키고자 하는 열정을 지닌 인물이다. 매번 퉁명스런 말을 하면서 속정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할머니는 유정이를 비롯한 손자들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인물이다.
축구를 좋아하고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광수네 가족 역시, 조선족 출신의 엄마가 집을 나가서 할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광수의 아버지는 구제역으로 인해 멀쩡한 소를 땅에 묻고 빚을 떠안은 채, 다시 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더욱 어려워진 농촌의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찍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공고에 진학하고자 했던 광수는, 아버지와 함께 소를 키우는 꿈을 꾸며 농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유정이의 동성 친구인 지희는, 아버지의 형제들과 오빠와 언니들에 헌신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성공회 신부의 아들로 매사 반듯하고 공부도 잘하는 이른바 ‘엄친아’인 우주가 있다.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청소년 소설이지만,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문화 가정의 문제와 농촌의 어려운 현실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 청소년들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미묘한 심리를 잘 포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제목의 ‘깜언’은 베트남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작은 아빠가 베트남에서 온 작은 엄마와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듣고 서운했지만, 다문화 가정이라는 놀림을 받는 사촌들을 보면서 작은 엄마와 점점 가까워진다. 마침내 이국에서 외로웠을 것이라는 현실을 이해하면서, 어쩌면 작은 엄마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이른바 ‘엄친아’라고 할 수 있는 우주가 자신의 생각을 유정에게 털어놓는 부분이었다.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엄친아’는 아무런 고민도 없을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들의 고민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결정이 부모(엄마)의 의견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신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과학고와 의대 진학을 결정한 엄마의 뜻에 따라야 하는 우주의 처지를 보면서, ‘엄친아’는 결국 부모인 ‘엄마 친구’의 욕망에 의해 휘둘리는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엄친아’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권을 잃어버린 존재를 지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엄친아’인 우주 역시 친구들과 다른 의미에서 ‘결핍’을 지니고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유정이를 비롯한 친구들이 모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끝을 맺는다. 특히 태어나면서 엄마 젖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은 강아지 ‘꼬맹이’와 버스에 치어 다리를 다친 고양이에 대한 유정이의 관심은 아마도 자신처럼 약하고 소외된 존재에 대한 애정의 표출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다문화 문제를 비롯한 농촌의 현실이 잘 드러나 있으며, 유정이를 비롯한 청소년들의 미묘한 관계를 적절히 그려낸 것은 결국 작자의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작가의 말처럼 ‘결핍’을 그저 상처로 마음속에 담아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채우려고 노력할 때 상처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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