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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6번 말씀
제목 : 근심의 이유
본문 :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멘.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또 아버지 다윗을 배반한 압살롬와 아히도벨,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다, 남유다와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연결해보면서 왜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는지를 공부했고 그렇게 모두 사망으로 던져져야 하는 상황 속에서 생명으로 건져지게 된 우리 성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다 기억나십니까? 우리는 모두 아담이었고 유다였고 압살롬이었는데 그 저주받은 인생 속으로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양자들로 입적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면목 없는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대표로 등장한 사람이 베드로라 그랬죠? 그는 가룟 유다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아주 유약하고 무력하고 이기적인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의 종이 된 거죠. 13장 말미를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라는 사람의 실체를 발가벗겨서 폭로를 해버리시죠?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에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라고 말씀을 하시자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준비까지 되어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근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의외였어요. 마음만이라고 참 고맙다, 내지는 역시 내 수제자답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날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너는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하고 베드로를 머쓱하게 만드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설사 베드로가 그렇게 유약한 자인 것을 미리 아셨다 할지라도 많은 제자들 앞에서 그렇게 망신을 주는 게 옳은 일입니까? 주님은 13장 첫 머리에 끝까지 사랑하심에 대한 결론을 맺고 계시는 거예요. 구원은 주님 측에서 준비하신 끝까지 사랑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의 결단이나 결심 등이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완성이 된다는 것을 제자들과 성경의 독자들인 교회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를 거기서 개망신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 또한 우리의 능력과 재주와 의지에서 우리의 신앙을 출발시키려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우리 신앙의 출발 지점은 절망의 자리여야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지옥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 있는 거예요. ‘그래요 주님 저는 저의 유익을 위해서는 주님을 세 번 아니, 삼십 번이라도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잡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 제게 필요합니다.’ 로 가야 되는 것이지 아니에요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요, 라고 그런 의지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란 말에요. 그러한 자기부인의 고백에서부터 신앙의 가시적 행위들이 격발되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시죠? 후에는 네가 따라오게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후에는. 언제가 후에죠? 성령이 오신 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령이 오신 후에는 그가 주님이 가시는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성도가 내가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라는 객기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는 거예요. 누구에 의해? 성령에 의해. 그래서 ‘그 후에’ 라는 단어가 거기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이 요한복음의 맨 마지막 장에 나오죠?
요 21:17-19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은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어보셨어요. 베드로는 뻔뻔스럽게 자신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해요.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네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남이, 성령이에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그 일에 의해 너는 비로소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세 번이나 말씀을 하시고 그 다음에 이런 말씀하신 거예요.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너를 데려가리라‘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 죽고 싶으세요? 솔직히? 아니죠? 지금도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으면 좋겠죠? 그걸 밟고 올라서서 이 세상의 고지에 올라가고 싶은 게 우리의 마음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자리로 우리를 반드시 이끌고 가신다는 거예요.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셔서. 그래서 성도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행복 끝 고생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출발점은 I am nothing인 것이지 I can do everything for you가 아닌 거예요. 나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긴 뭘 할 수 있어요?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무장해제하고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잘 좇아오라는 거예요. 그게 신앙의 출발점이에요. 내가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을 근거로 내 목숨을 바치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 시간은 아주 깁니다. 당장 되어지는 게 아니란 말에요. 거기에서 비로소 나가 아닌 이웃 사랑이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순종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자기부인에서. 그래서 유다와 베드로의 이야기가 새 계명으로 끝나는 거라 그랬죠?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과 주님 사랑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의 목적지는 바로 거기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너희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에요. 그거는 옛 계명과 똑같은 내용이잖아요? 근데 왜 새 계명이라고요? 옛 계명은 우리의 힘으로 해야 되는 것이지만 새 계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게 새 계명이니까. 그죠?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불의를 보고도 참아야 되고 정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5년 동안 설교를 들으셨으면 어느 정도 제 이야기를 속성으로 이해하실 거라고 믿고 많은 부분을 이렇게 축약하고 생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직도 제대로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아요. 제가 은혜를 이야기하면 맘대로 살아도 되나보다? 지금 우리 목사가 그 이야기 하나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제가 행위를 강조하면 그러면 은혜는 뭐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요. 그 정도는 여러분이 정리가 되셨으리라고 저는 믿는데 여러분 우리 성도는 힘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돌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그 세상과의 대척점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에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게 맞습니다.
자연을 파괴해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자들 틈에서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친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성도에요. 다른 이들이 전부 길바닥에다 침을 뱉어도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침을 안 뱉겠다, 고 가야 되는 게 성도인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거라 할지라도. 이웃을 밟아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하는 좀비 같은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이웃의 이익을 챙겨주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 맞아요. 약자를 우습게 알고 강자에게 아부하는 이 세상 속에서 권력자들에게 대항하여 촛불을 들 수 있어야 하는 게 성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하기 전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어설프게 경고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에요. 그래서 제가 경계의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바울은 그 자기부인을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도 표현을 하는데.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성도가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이 먼저 새롭게 되는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착한 일, 정의로운 일이라는 게 뭐에요? 여러분. 착한 삶, 정의로운 삶은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며 사회정의 구현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게 선한 삶이고 착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 또한 확실히 이해하지도 못해서 늘 흔들리는 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에도 미천한 상태에서 옳은 일 선한 일 착한 일 정의로운 일에 먼저 관심을 갖는 것을 자기 의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게 위험한 거예요. 그래서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이지 그거는 성도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펠라기우스적 이단이라고 벌써 이단으로 정죄가 된 거예요.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이 그렇게 자기의 노력과 의지를 내어놓아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는 가르침을 가르치는 바람에 상당히 큰 혼란이 왔어요. 그래서 그걸 이단으로 정죄해버렸습니다. 펠기엔 페레스라고 벌써 이단 사설이 되어버렸어요. 그거는요. 근데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와갖고 그런 잘못을 그대로 반복을 했어요. 성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복음에 대한 이해가 미천한 사람들에게 무조건 성경의 ‘하라’ 의 명령을 갖다 디밀고 너희들, 나는 이렇게 사는데, 우리는 이렇게 사는데 너희는 왜 이렇게 못살아? 라고 사람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그게 펠라기우스적 이단이라니까요. 그거는 마치 사람의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는 강아지한테 도덕 강연 윤리 강연하고 사회법 강의하는 거나 똑같은 거예요. 성경은 사람들은 절대 그걸 못 알아듣는다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인이 되고 그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성숙과 양육의 시간이 필요하단 말에요. 그런데 그 전에 내가 촛불을 들고 경거망동을 하게 되면 그 자기부인의 자리로 내려가기 전에 나에 대해서 굉장히 내가 과대평가를 하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속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서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들 수 있는 자리로 가야죠. 그게 우리의 목표지점이 맞습니다, 여러분. 왜 촛불만 들어요? 대포를 들고라도 가야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긍휼의 마음에서 격발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분노나 아니면 나는 이렇게 정의롭게 산다는 것을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한 일이 될 때 그건 죄가 된단 말에요. 여러분 우리가 정의를 외치고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하고 할 때에는 반드시 우리 마음속에 긍휼한 마음이 전제가 돼야 돼요. 나도 전에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이웃을 밟고 약한 자들을 밟고 강한 자들에게 아부하면서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우리의 유익만을 취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알게 되었는데 그 힘의 원리가 정말 옳은 삶의 원리가 아니라는 걸 제가 알았어요. 그 힘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십자가의 삶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았고 그 삶이 정말 옳은, 우리를 행복에, 우리를 만족에, 참 안식에 참 평안에 이르게 해주는 삶이라는 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저는 이제 분연히 당신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내 목숨을 걸고라도 알려드리기 위해 촛불을 들고 나왔습니다, 라는 실력이 되면 그때 나가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부화뇌동하고 군중심리에 휩쓸려서 무조건 나가가지고 말이죠 내가 뭐를 했다, 라는 그런 의만 쌓고 돌아오게 되면은 여러분은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주장의 자리로 더 올라가게 된단 말에요.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그렇게 자기부인의 상태에서 그렇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옳은 삶,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를 더 열심히 추구해야지 먼저 여러분이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요? 구원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이 한 몸 불살라서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고요? 그 정의가 어떤 정의입니까? 도대체. 그것도 제대로 정말 올바르고 정말 선한 삶이 무엇인지도 정의가 안 된 상태에서 옳은 것을 외치면서 촛불을 들고 나간다는 게 이게 웬 말이냐 말에요.
옳은 건, 이 사회가 정의해놓고 약속해놓은 그런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어떤 옳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옳음이라는 건. 성경이 말하는 옳음이라는 건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 이라니까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좇는 것, 그것이 옳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나가갖고 착한 일 한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보람찬 일을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죠? 인간은요 죄인은 그때 자기에게 가장 큰 점수를 준다는 거 아세요?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 대단한 건 한번 했을 때? 내가 과분하게 하나님 앞에 헌금 드렸을 때, 내가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새벽기도 나왔을 때, 그때 인간들은 자기 자신에게 큰 점수를 준다니까요.
그런 일을 하고도 내가 나에게 점수를 주지 않는 실력이 되었을 때. 그건 하나님의 은혜로 다 되어진 것이지 내가 무슨 하나님의 일을 도왔겠어? 내가 무슨 정의구현을 해? 그러나 온 세상이 손을 잡고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상태에서 나는 그와 반대로 등을 지고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 라는 실력이 되기 전에 함부로 다른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하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 뭐가 악한 정부고 뭐가 좋은 정부입니까? 이 세상에 있던 권력자들 중에 정말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그런 이상적인 지도자가 있었나요? 그런 나라가 이 세상에 있었습니까? 어떤 지도자를 원하시는 거예요? 어떤 나라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미국 땅이 여러분 좋으세요? 여기가? 이 미국 땅이 정말 행복한 땅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잖아요. 여러분 사시면서 느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떤 정의를 원하시는 거예요? 어떤 정의를? 참 미련해요, 우리 인간은요.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유일한 길은 심령이 새롭게 되는 일이에요. 그것은 현재형이라 그랬죠?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숨이 이 땅에서 멋는 날까지 그건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올인 해야 되는 거예요.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에. 자기부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시위는 분노의 시위밖에 되지 않는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의 정의구현은 말씀드린 대로 긍휼에서만 비롯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은 자들의 정의구현을 향한 외침은 또 다른 이기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뿐이에요. 그들의 외침으로 누군가가 또 가슴 아픈 일이 생겨난단 말입니다. 그럼 그건 절대적 정의가 아니잖아요. 정작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핵심을 놓치고 그 핵심을 놓친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엉뚱한 것으로 자꾸 대체를 하려고 하는 것들이 그런 식으로 표출이 되버린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조심하셔야 되는 거예요.
주님은 계속해서 여전히 그렇게 자신들의 힘과 열심을 의지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 그래요. 그게 오늘 본문 1절이죠? 지금 13장은 계속해서 구원의 주도권에 관한 문제가 인간들의 자기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오던 차에요. 그런데 갑자기 근심이라는 주제가 튀어나왔어요. 근심이라는 것 또한 자기부인이 아닌 자기주장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근심이라는 주제가 또 하나 나오는 거예요. 14장과 13장은 별개의 장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원래 장과 절이 없는 거 아시죠? 그러니까 연결해서 읽어버릇 하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근심이라는 것의 주된 내용이 뭡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근심하시죠? 주로? 먹을 거? 입을 거? 마실 거? 사고 당하는 거? 병 걸리는 거? 죽는 거. 뭐 대충 이렇게 이야기 되죠, 그죠? 그런데 그게 왜 생긴 거라 그랬죠? 죄 때문에 생긴 거라 그랬잖아요.
원래 인간들은 근심이 없는 존재로 창조가 된 걸 아세요? 왜냐하면 그 근심의 동기들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통제하시는 분이 인간들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져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원래 인간들은 근심과는 무관한 자로 창조가 됐어요. 근데 바보 같은 인간들이 그 존재를 거부하고 떠나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인간들은 근심과 염려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된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부터 인간은 결핍과 부족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부터 근심이 인간들에게 온 거예요. 근심의 뿌리가 뭡니까? 왜 근심하세요? 여러분? 왜 염려하시죠? 지금 당장 굶어죽습니까? 지금 당장 여러분 죽을 별에 걸리셨어요? 아니면 내일 모레 돌아가십니까? 아니면 내일 사고 당하기로 예약되어 있어요? 근데 뭘로 근심하는 거죠? 아직 내게 일어나지 않은 어떤 것으로 지금 근심하고 있어요. 그죠? 보통 인간의 근심은 90%이상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근심한다. 그러는데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근심의 뿌리가 뭐에요?
내가 나를 지켜야 되는데 나에게 그만한 힘이 없다는 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게 근심입니다. 그렇게 모든 근심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거예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미래의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의식, 결핍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의 일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죠. 상인들은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상품을 개발해냅니다. 각종의 보험 상품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고안되고 팔리죠. 많은 사람들이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미래를 어떻게든 통제해보려는 시도에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기도 하고 보약을 먹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어느 정도 마련되고 준비된 사람들은 비교적 근심이 적다고 그래요. 그렇지만 그들에게 근심거리가 아주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준비해놓은 것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수한 사건들과 상황들과 정황들이 우리에게 밀물이 밀어닥치듯 밀어닥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새벽 우리 교회 김 ㅇㅇ 성도님의 딸 승희양이 결국 하나님의 품으로 떠났어요. 길에서 넘어져서 머리를 다쳤는데 불과 어제 저녁 근데 그게 뇌진탕이 돼서 하루 만에 숨을 거뒀어요. 저희가 새벽에 설교도 생략하고 정말 함께 모여서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들어줬어요. 여러분 보세요. 그런 사고를 우리가 돈이나 열심, 노력 등으로 막을 수 있어요? 쓰나미나 태풍 허리케인 같은 천재지변은 우리가 우리의 열심으로 막아낼 수 있습니까? 홍수를 일으키는 비구름의 진로를 인위적으로 변경할 수 있어요?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근심에 노출되어 있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쩔 수 없는 근심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향해 돌진해 들어오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근심 속에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때 그 근심 속에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게 뭐에요? 근심 속에 있는 이들에게 그 근심을 덜어낼 수 있는, 덜어낼 수 있게 해주는 이 세상의 비결이 있어요?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위로도 거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졸지에 사랑하는 막내딸을 읽은 우리 김병화 성도님께 제가 어떤 위로를 해드릴 수 있을까요?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됩니다, 여러분. 내 자식이 살아오기 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되지 않아요. 그 어떤 값진 선물로도 그분의 슬픔과 근심을 상쇄시킬 수 없어요. 이 세상 어느 누가 나는 그 민물과 같은 근심을 막아서서 위로할 수 있노라고 난 근심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그 근심을 상쇄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방법이 있다, 그래요. 주님이 그 근심의 천적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1절 보세요.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러니까 근심의 반대말은 ‘근심 안 함’이 아니라 ‘믿음’인 거예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를 근심케 하는 것은 현실에서 겪는 고난만이 아니에요. 차라리 이미 닥친 고난은 이를 악물고 이겨낼 수 있어요. 예전에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일병 이병 때까지 하여튼 매일 밤 하루도 안 빼놓고 매를 맞아야 잤어요. 고참들한테, 군기 잡는다고. 근데 일단 매가 한 대 딱 들어오면 그때부턴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빨리 때려야 잘 텐데 한 기가 됐는데도 안 때리고 두 시가 됐는데도 안 때리고 세 시가 가까워오는데도 안 때릴 때 그 불안감 때문에 사람이 더 미쳐요.
여러분 정말 근심에 대한 뿌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인 거예요.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능력이 있는 의사라도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견디지 못해요. 진실로 미래를 붙들고 있는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살아가기 까지는 인간에게 결코 평안은 있을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그랬죠? 그 말은 내일 일은 내일, 부사가 아니라 내일이, 주어라 그랬어요. 그죠?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는 뭐에요? 내일을 주관하는 하나님이 책임지니까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아라,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나의 내일을 하나님께 전부 맡기기 전에는 우리는 절대 근심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을 우리가 ‘믿음’ 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것이 근심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것을 살아있는 ‘믿음’ 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근데 잘 안 되잖아요.
여러분 근심 없으세요? 너무 많죠? 근심이 너무 많아요. 이 눈 밑에 다크서클 좀 보세요. 왜 그래요? 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우리 성도들도 그 근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까?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의 천적인 근심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야 옳지 않습니까? 마치 예수를 만난 귀신처럼 천적 관계라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야 맞아요.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한테조차 근심이 떠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믿음은 완료형으로 이미 수여된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형으로 쌓아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잘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제가 지금 쌓아가야 하는 믿음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한 번에 허락하신 믿음을 우리가 양육과 훈련과 교육을 통해서 조금씩 더 밝게 깨달아 간다는 의미로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객관적인 믿음이 주관적인 믿음으로 번역되어져 이해되어지는 그 과정을 제가 쌓는다, 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이런 것까지도 설명 안 할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와야 돼요.
사도들의 서신서를 잘 보시면 믿음을 굳게 하라는 권고가 아주 많이 나와요. 그렇죠? ‘믿음을 굳게 하라’ 믿음을 굳게 하라. 어떻게 굳게 하라는 거예요? 도대체?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이미 배웠어요. 그런데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믿음의 내용을 올바로 배워서 잘 정리를 하고 있으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얼마나 많이 들으셨어요? 근데 네 이입으로 한번 이야기해봐, 그러면 금방 정리가 잘 안 되죠? 그마 만큼 여러분 신상생활이라는 것은 반복적이고 집중적이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ㅎㅎ. 하도 답답해서 그래요.
사도베드로의 이야기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주님을 위해 죽는 게 믿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가 내놓은 믿음을 풍비박산 내버리셨어요. 믿음은 네가 나를 위해 죽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죽고 너를 구원해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믿음에 관한 상세한 해설이 적힌 책이 바로 성경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믿음의 내용을 반복하여 공부를 하고 확인을 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하고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 듣다가도 또 들려주시오. 듣고 싶어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가 복음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다 알아요, 이제 행하기만 하면 돼요. 이게 가당한 말이냔 말에요. 뭘 다 아세요? 여러분이? 평생 가는 거라니까요, 그거. 평생.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믿음의 내용을 반복하여 공부를 하고 확인을 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굳게 하는 거예요.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근심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딤전 6:1-1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찌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도 사도바울이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죠?]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 말은 내 주인이 같이 예수 믿는 자라고 해서 야, 형제야 자매야, 맞먹지 말라는 거예요. 그 정도로 종의 역할을 충실히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뒤집어 엎으라가 아니라니까요.]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않으면 경건조차도, 이 종교의 행위조차도 이익의 재료로 사용을 해서 하나님, 내가 이 정도 경건한 삶을 살았는데 아무런 보상도 안 해주세요? 하고 엉뚱한 자리로 가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전히 자기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이 세상의 힘으로 자신을 부하게 하려는 시험과 올무에 빠져서 그들에게 근심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경건에 관한 말씀을 잘 이해하고 배우고 양육을 받은 이들은 비록 그들이 종의 자리에 있다할지라도 그 주인을 잘 섬기며 마땅히 공경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열 두 시간 이상씩 죽어라고 공부하는데도 저도 여전히 근심이 많아요. 제가 교회에 몇 시간을 있나 따져봤더니 보통 Average 75시간. 어떤 주는 80시간을 교회에 있어요. 그 시간 동안에 여기서 성경 보고 책만 봐요. 근데도 근심이 머리꼭대기까지 쌓여 있어요. 여러분 어떡하실 라고 그래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연구에 매진하다가 뭐 너무너무 좋아서 황홀해하다가 화장실 잠깐 갔다 오는 사이에 잊어버려요. 여러분 그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는 거예요. 실패하면 또 제자리로 돌아와야죠. 또 실패하면 또 제자리로 돌아와야죠. 그렇게 가는 게 신앙생활인데 일주일에 한번 낼름 나와 주고 이 정도면 됐지 뭐. 예전에는 4주에 한 번씩 갔는데. 이거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일분일초가 너무 너무나 소중한 거예요. 신앙인들에게는.
그렇게 여전히 자기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이 세상 근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과 경건에 관한 말씀을 잘 이해하고 배우고 양육을 받은 이들이 비록 그들이 종의 자리에 있다할지라도 그 주인을 잘 섬기며 마땅히 공경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종의 자리에서도. 노예는 생사여탈을 주인에게 뺏긴 사람이거든요. 그럼 언제 죽을지 몰라서 두려워해야 되잖아요? 근심해야 되잖아요. 근데 종이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말씀, 그 교훈에 착념하게 되면 거기서도 두려움 없이 오히려 그 주인을 예수님 모시듯 모시면서도 불안해하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 믿음이 지향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반복하여 확인하지 않게 되면 인간은 즉시로 이 세상을 자신의 삶의 목적지인 냥 살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근심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원래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이러한 사망의 증상들을 겪게 된 거고, 그러한 사망의 증상들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사망에서 건져지게 되었고, 그 구원의 현실이 가시적 현실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경험들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의 완성이라는 목적지로 열심히 끌고 가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계시며 나를 보호하고 계시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일은 나에게 결코 해가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우리를 근심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말씀인 거예요. 모든 것은 합력되어서 선을 향해 수렴이 되고 있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 말은 염려하는 건 불신앙이니까 절대 염려하면 니네 죽여 버릴 거야, 이런 포악한 권고나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상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염려를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상을 내가 나중에 해줄게, 라는 그런 약속도 아니에요. 그 말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그 일을 겪어낼 힘이 생긴다는 뜻이에요. 그 상황을 풀어주고 해결해준다는 말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너에게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겠다는 거예요.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게 되면 나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내 욕심이 채워진다는 말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뭐라 그래요? 마음과 생각을 바꿔주겠다, 그러지 문제를 해결해줄게 안 그래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라 내 등에다가 다 얹어라 그러지 않으시죠? 너희의 마음을 위로하리라, 그러죠. 내가 다 짊어주고 가 줄게 가 아니라 그냥 계속 짊어지고 와 근데 그게 더 이상 무겁지 않게 해줄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똑같이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목을 매달아 죽고 어떤 사람은 그 상황을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세상의 힘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나의 교만을 깨기 위해 나에게 허락하신 감사한 선물입니다. 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너끈히 이겨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죠?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 있어요. 태종이 같은 친구는 굉장히 크게 사업을 했던 친군데 쫄딱 망했죠? 그래서 늘 제가 물어봐요. 넌 예전에 스무 살 때부터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었는데 쫄딱 망해가지고 지금 깨스비까지 걱정하면서 이렇게 다니고 있는데 불안하지 않니? 제가 목사라서가 아니라 저는 그 친구의 진심을 알아요. 아니요, 예수님을 알게 되고난 이후부터는 그게 저에게 얼마나 큰 복인지 제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앞으로 더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도 걱정 안 하는데 왜 목사님이 걱정하세요? 여러분 그게 신앙의 힘입니다. 믿음의 힘. 어떤 사람은 그것 때문에 근심하여 목매달아 죽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재사이나 우리의 외적인 모양을 바꿔주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는 거예요. 그게 구원의 힘입니다. 여러분을 이 땅에서 부자 만들고 여러분을 이 땅에서 멋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뭐에 쓰시게요, 그거를? 내 자식을 자식답게 바꾸는 거에 목적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발가벗겨버리실 수 있다니까요. 그러나 그 부끄럽고 그 고단한 경험이 나의 하나님 백성 됨에 도움이 된다면 그게 복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깊이 이해하고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근심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를 한번 평가해보세요. 예전에 여러분과 지금의 여러분과 여러분이 고난을 대처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봤을 때 사실 많이 성숙해있죠? 그렇게 바뀌어지는 거예요. 옛날 같았으면 그냥 팔팔팔팔 뛰고 난리가 났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하도 많이 겪어서. 그 하도 많이 겪은 것이 여러분에게 복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또 갈게요. 얼마 전에 제가 이제 제 친구가 저희 교회 웹싸이트에 자주 들어온다는 그 소식을 듣고 교회 게시판에다가 친구야 연락 좀 해라 이렇게 메시지를 올렸더니 이 메일이 왔어요. 매일매일 들어와서 게시판을 보긴 하는데 제가 너무 바쁠까봐 연락을 못했다는 거죠. 그 친구가 군대에서 퇴행성 류마티스에 걸린 친구에요. 온몸이 다 굳었어요. 손가락 세 개밖에 못써요. 나중에 저랑 헤어질 무렵에는 그 친구가 하드를 너무 좋아해서, 그 친구가 하드를 좋아한 게 아니라 제가 좋아해갖고 자주 먹이다보니까 좋아하게 됐어요. 이 하드가 입에 안 들어갔어요. 턱 관절이 망가져가지고. 근데도 그 친구가 그랬다니까요. 하나님이 어떤 뜻이 있으셔서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어. 그게 믿음인 거예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걸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안 될 거 같아요. 저는 가까이에서 그 친구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사는지를 너무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있다하더라도 못 견딜 거 같아요. 근데 그 친구는 갈 수 있을 거 같애. 왜? 한번 겪었거든요. 그렇다면 그 친구에게 그 질병은 복인 것입니다. 그걸 이해할 수 있는 분들이 실력자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함부로 우리 주변에 고난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당신 하나님 앞에서 뭔가 해결이 안 된 게 있어서 그렇지!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의 손길 안에 있는 사람일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건 지금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다는 것인데 왜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었죠?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자기들이 그동안 투자해놓은 것들이 헛것이 될까봐 근심하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제자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도 네가 크니 내가 크니 하고 싸우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 말은 자기부인이 전혀 안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다른 제자들도 그러한 강력한 힘을 소유한 민족 해방자로써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그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유대인들의 호산나 환호를 직접 들은 사람이에요. 주다 마카비만 들었던 환호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스승이 그 환호를 듣고 있단 말에요. 얼마나 흥분됐겠어요? 얼마나 기대가 컸을까요? 야, 그 출세를 위해 이까짓 고생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저도 참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그까짓 한 삼년? 아니 삼십년도 참아요. 그 후에 이 세상에서 정말 엄청난 복이 약속되어 있다면 삼십년 그까짓 거 못 참겠어요? 제자들이 그런 마음이었단 말입니다. 보세요, 이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인지.
막 10:3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지금 세 번째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베드로만 나쁜놈이에요? 야고보하고 요한도 똑같죠? 할 수 있어요. 난 죽을 수 있어요, 라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근데 목적이 뭐냔 말에요? 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시켜주세요. 이게 목적이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난 이제 곧 죽게 될 거야. 예수님이 민망했다 그러죠?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근데 그 앞에서 예수님을 위로는 못할망정 나 우의정 시켜줘야 돼요. 확실히 약속하셔야 돼요. 마태복음에 보면 엄마까지 데려왔어요. 최초의 치마바람이 여기 기록돼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가 찾아오신 거예요. 너희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너는 탈락! 이게 아니라 그 자들에게 찾아오시더라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똑같이 야고보 요한 베드로처럼 그렇게 이 세상의 힘만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어떻게 가당하냐는 것이에요.
그렇게 복음을 하나, 하나 이해하고, 성경말씀을 하나, 하나 깊이 이해하게 되면은 조금씩, 조금씩 우리가 그런 터무니없는 삶 속에서 내려오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계세요. 오직 믿음만이 근심을 날려버릴 수 있는 거야. 너희들이 아직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 지금 근심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믿음을 가져라,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믿음을 가져라. 그런데 주님께서 그냥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를 믿으라, 라고 이야기하세요.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은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처럼 이제 나를 그렇게 믿어봐! 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지키고 보호하고 복을 주실 것을 믿었어요.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이 로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고 그로인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자기들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를 박살을 내고 화려한 다윗 왕국의 풍요를 재건해주실 것을 믿었어요. 그들은 그러한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거예요. 니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런 민속 메시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지금까지 버틴 것처럼 이제 내가 십자가에서 이렇게 하릴없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나를 믿어라, 라는 거예요. 난 반드시 돌아온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까지 민속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러면서 너희들이 그런 수모와 고난을 다 참아냈잖아. 그것처럼 내가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 그렇게 지금까지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은 것처럼 나를 믿어라, 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어라’ 라는 의미인 거예요. 그 예수가 여러분에게 돌아오셨죠. 성령의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약속을 지키신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 예수가 돌아와서 뭐 하신다고 그래요?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여 너와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함께 살 거라 그래요. 우리가 지금 그 상태로 간 거예요. 근데 지금 그 상태에 우리가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으며 우리가 과연 그러한 자격이 있는 자들인가를 우리 삶 속에서 경험시키기 위해서 신기루 같은 근심들을 여러분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신기루 같은 근심들을 밟고 일어서는 거예요. 세상은 우리에게 풍랑과 홍수로 계속해서 공격을 해대지만 우리가 그 물위를 걸으신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풍랑 속에서 같이 헤매면 안 돼요. 밟고 일어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건 신기루야, 아니야 없는 거야. 그게 여러분을 지옥으로 못 끌고 가요. 그게 여러분을 절대 사망으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그 믿음이 있냔 말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근심할 이유가 없잖아요. 본문 2절의 말씀처럼 이미 우리가 가야할 곳이 예수님에 의해 준비되어져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그리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근데 그곳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좋은 거예요. 우리는 그 나라를 이 땅에서 조금‘씩 맛보기도 해요. 근데 그 무엇이 우리를 근심케 할 수 있어요?
자, 어떠세요? 지금, 다른 거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세요? 맞아, 근데 우리가 무엇을 근심할 거야? 다 내려놓자. 이런 마음이 드시죠? 근데 보세요. 여러분 이 문을 나가서 자동차 키를 딱 여는 순간 여러분은 또 다시 근심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깨어있음이 필요한 거예요. 더욱 더 진지함과 성실함이 필요한 거예요. 분명히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을 우리가 했잖아요? 근데 또 다시 거기에 빠진다는 건 우리가 신기루에 자꾸 잡힌다는 뜻이거든요. 없는 거란 말에요. 지금 여러분은 분명히 맞아,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데 무슨 근심이야, 근심은? 그거 다 내려놓고 뭐 끝까지 한번 가보자. 결심하셨는데 금방 세상이 여러분을 꽉 붙들게 또 내어준단 말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생각하셔야 돼요. 아니구나, 이건 조금 전까지 파도처럼 없었던 건데 왜 또 나에게 다가오는 거야? 여러분이 쳐버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모이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는 절대 우리가 이 세상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애굽에서 꺼내진 순간 가나안이라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도록 자동 설정돼 있어요. 마치 강철이 자석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 끌려가는 길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여러분 죽이려고 하나님이 때리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을 중도에 그냥 포기시킬라고 여러분들을 그렇게 힘들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분명 우리의 삶에 유익이 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더 슬퍼하시고 가슴 아파 하시면서 우리의 삶 속에 그런 것들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참으셔야 돼요. 여러분은 지금 아버지의 세심한 간섭과 배려 하에 가나안으로 끌려가고 계시는 거예요. 신명기 6장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어서 어디로 보낸다고 그래요? 너희들이 짓지 않은 집, 너희들이 마련하지 않은 땅. 너희들의 열심을 보태지 않은 그런 풍요, 그거 내가 준비해놨어. 거기로 끌고 가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시잖아요. 그런데 그 길에 우리에게 양육과 훈련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 신, 맘몬을 붙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양육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딛 1:11-1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뭐가 우리를 양육하세요? 은혜가. 은혜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양육한단 말에요]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양육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서 우리를 양육하시는데, 그 양육의 내용은 우리가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리고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심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진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부인과 순종의 삶을 사는 자로 완성되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의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친 백성이라는 것은 구별된 백성이라는 뜻이에요. 구별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우리를 양육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그 양육의 과정에서 들이닥치는 근심과 염려를 다른 이들보다 조금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단 말입니다. 양육이니까.
여러분 군대 갔다 오신 분들은 아시지만 유격 훈련받을 때 정말 힘들지 않아요?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괜히 흙탕물에 처박아 놓고 그 물 마 멕이고 말이죠. 그거 뭐 (?) 하나 타는데 그냥 세 시간을 천국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게 훈련이라는 것, 우리를 정말 용사로 만들기 위한 훈련이라는 그 전제가 없으면 그거 어떻게 견뎌내요? 못 견딥니다, 여러분 힘들어서. 그러나 그 훈련이 바로 우리를 어떤 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사로 만들기 위한 그러한 방법이요 도구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에 이 악물고 해내는 거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오는 시험, 고난, 근심들, 염려들 그런 것들은 전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고 양육시키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잘 견뎌내세요.
제가 마지막으로 제가 참 평소에 좋아하는 프랜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라는 그 시를 앞 뒤 부분만, 너무 길어서 읽어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프랜시스 톰슨은 노숙자에요. 홈리스. 원래 목회자가 되려고 했던 사람인데 아편 중독에 걸려서 평생을 그렇게 고통 속에서 노숙자로 살다가 죽었는데 이 <The hound of heaven> 이 시가 아마 현존하는 기독교 신앙 시 중에 가장 뛰어난 시라고 그렇게 인정받는 시에요.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내 마음의 미로로. 눈물의 안개 속으로 웃음의 시냇물 속으로 그를 피해 숨었습니다.
나는 조망이 활짝 트인 희망의 가로수 길로 달려올라 갔습니다.
그러다가 밀침을 받아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 쏜살 같이 거꾸로 떨어졌습니다.
쫓고 또 쫓아오는 저 힘찬 달을 피해,
그러나 서두르지 않은 추적으로,
침착한 보조로, 계산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 그 발소리 울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쫓아오더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심지어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까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나를 쫓는 하나님이...
그리고 발 보다 더 급한 목소리 울렸습니다.
네가 나를 등지기 때문에 만물이 너를 등지는 것이다.
-너에게 오는 고통이 바로 네가 나를 등졌기 때문에 오는 거야.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그를 쫓아가시면서 계속 미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은 그만한 공로가 있어야 받지 않느냐?
너는 무슨 공로가 있느냐?
엉긴 흙덩이 같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거무칙칙한 흙덩어리인 네가 애석하다.
너는 아무런 사랑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보잘것없는 너를 사랑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나밖에는. 단지 나밖에는 말이다.
내가 네게서 무엇을 빼앗았던 것은
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것을 내 품에서 다시 찾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 어린애 같은 착각으로 잃었다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가 너를 위해 집에 간수해두었다.
일어나서 내 속을 꼭 쥐고 가자.
아, 제 곁에 저 발자국 소리가 멎었습니다.
제 어두움이
결국 쓰다듬으려고 내민 그분의 손 그림자였단 말입니까?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고 앞 못 보고 악하기 짝이 없는 자여,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밀어냈기 때문에 사랑도 함께 밀어냈던 것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상황은 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다듬으려 내미시는 손길인 것을 잊지 마시고 힘을 내세요. 여러분이 지나시는 곳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동굴은 끝이 막혀있지만 터널은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밝은 태양 아래로 연결이 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