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의 눈물
김현주. 2022.0822.
한달 전 쯤이었다. 열 살 은호가 검정 비닐봉투를 가지고 들어왔다.
“경로당 할머니가 울 할머니 주라고 했어”
비닐봉투를 열었더니 카스테라 빵 종류의 완제품을 만들고 나서 남은 주변부 찌끄러기 빵들을 뭉쳐놓은 듯한 모양의 덩어리가 보였다.
시어머니는 평상시 남은 반찬, 남은 음식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냉장고에 넣어두고 한참을 지나서 곰팡이가 피거나 아무도 먹지 않으면 버리곤 했다. 남이 갖다 버린 노끈 하나도 주워와서 밭일 할 때 쓰시곤 했다.
그 날 이후 카스테라빵 찌끄러기들은 시어머니와 손주가 조금씩 먹는 듯 했다. 양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냉장고 구석에 자리잡은 그 빵 부스러기 덩어리를 볼 때마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십사년째 시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고단한 삶의 굽이굽이를 수없이 들은터라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습성을 이해하고 지나쳐야 했다. 때로는 퉁명스럽게 이야기하거나, 꾹 참고 모르쇠로 침묵하기 일쑤였다.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빵을 즐겨 먹지는 않았지만, 종종 집 근처 조00 제과점에 아이들과 들러 빵을 사면 시어머니와도 함께 먹었던 날들도 많았다.
하지만 어제 저녁 또 다시 냉장고에 자리잡은 뭉쳐진 빵덩어리를 보는 순간 폭발하고 말았다. 기분좋게 아이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어지럽기 그지 없는 냉장고를 열었다. 못 봤던 검정 비닐봉투에 무언가 담아져 있었다. 손으로 눌러 본 말랑한 느낌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뭘까 싶어 비닐봉투를 여는 순간 내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파트 할머니에게 받은 카스테라 부스러기가 뭉쳐진 빵덩어리였다.
그동안 뱉어내지 못했던 말들을 요란스럽게 설거지를 하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에 받은 빵 덩어리가 아직도 있는데 왜 또 받아 왔어요? 누가 저런 빵을 남들한테 먹으라고 준대요. 우리가 빵을 안 사먹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 빵 모두 버릴거에요. 제가 빵 사다 드리면 되잖아요.”
거실에서 손주들과 TV를 보던 시어머니도 맞받아치며 말하기 시작했다.
“버리지 말고 냅둬라. 내가 먹고 있으니까...”
거실 소파와 부엌 공간은 보이지 않지만 서로의 표정이 읽혀지고 두 사람의 언성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점점 높아졌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냉장고에 들어있는 두 개의 비닐봉다리 빵 덩어리들을 모두 버렸다. 순간 ‘할머니와 엄마의 언성높은 소리를 듣고 있을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마음 속으로 멈칫 했으나, 이미 성난 화살은 활시위를 떠나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가시고 어느때보다 요란했던 설거지도 마무리 될 즈음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을 느꼈다.
거실로 가보니 은호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 방으로 들어갔더니 은호가 숨죽여 울고 있었다. 귀여운 곰인형 쿠션으로 눈물을 연신 훔쳐내고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왜 이렇게 우는지 여러차례 물어 보았으나, 억울하고 서러운 표정도 아니고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열두살 누나가 잠깐 방문을 열자 언능 나가라고 눈짓, 손짓을 했다.
“은호야, 왜 이렇게 우는 거야. 엄마가 할머니한테 빵 버린다고 해서 그런거야. 엄마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해서 미안해.”
“아니, 내가 그 할머니한테 빵을 받아 왔잖아. 할머니랑 나랑 그 빵을 먹었어. 근데 엄마가 그 빵을 버리면 할머니가 못 먹을거 생각하니까 자꾸 눈물이 나와.”
순간, 가슴 저 밑바닥에 매달린 커다린 징을 은호의 눈물로 내리치는 듯 했다. 울먹이는 아이의 말은 가슴 속 진동으로 계속 울리고, 표현할 적당한 말도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은호가 그런 마음이었구나. 엄마가 미안해”
열 살 손주와 할머니 사이에 흐르는 그 온도는 내가 감히 상상하지도 재어볼 수도 없는 기운이었다. 시어머니와 살면서 우린 서로 얼굴을 붉히며 또 다시 작은 생채기를 만들어내는 날들을 만날 것이다. 서로의 감정을 숨기며 말하지 못한 채 살아온 십년의 세월을 훌쩍 넘으며 고부간의 갈등도 칼로 물베기하듯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싸움을 넘어서면서 나는 시어머니의 삶에 한발 더 다가서기도 했다.
삼대가 함께 하는 우리 가족의 일상 속에서 열 살, 열두살 아이들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할머니와의 오만가지 감정을 공유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세월의 파도 속에 내 안의 소심함도 상처도 씻겨나가 멀리 바다로 흐르는 날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첫댓글 은호가 효심이 깊네요
다시 읽어도 뭉클해지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