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평대군이 꿈 속에서 거닐었다는 도원이 부암동에 있다는데...무계정사 이야기
1447년 음력 4월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노닐었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수성동계곡 수성궁으로 불러 자신의 꿈 얘기를 하며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수성궁은 인왕산 아래 있던 안평대군의 거처였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꿈속에서 박팽년과 복숭아동샨을 유람하다 최항, 신숙주를 만났던 얘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안견은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몽유도원도>다.
기암절벽과 구불구불한 냇가, 복숭아나무 숲에 떠오른 붉은 노을을 노니는 환상적인 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450년 9월, 안평대군은 자하문(창의문) 밖 계곡에서 물에 떠내려오는 국화를 보고 다래 덩굴과 석벽을 잡고 올라 <몽유도원도> 속 풍광과 닮은 터를 찾아냈다.
안평대군은 이곳에 두어 칸 집을 짓고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걸었다.
무계(武溪)라는 이름이 바로 '무릉도원이 있는 계곡'이라는 뜻이다.
복숭아나무 1000여 그루가 무계정사를 에워쌌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를 3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자신이 직접 붓을 들어 제목을 적었다.
그리고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며 시를 짓게 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서화 감상록인 발제(題跋), 신숙주, 김종서, 정인지, 박팽년, 최항, 성삼문 등 23명이 쓴 시가 긴 두루마리 형태로 남았다.
한양도성 안 수성동계곡의 비해당(匪懈堂)과 도성 바로 바깥 무계정사, 한강변 담담정(淡淡亭, 지금의 마포대교 북단 벽산빌라 자리)은 안평대군이 문객들과 담소하는 사랑방이었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서 시를 읊으며 때때로 활을 쏘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은 36세 나이로 사사됐다.
수양대군의 편에 선 신숙주를 제외하고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적은 이들 대부분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몽유도원도>가 살생부가 된 셈이다.
무계정사는 불타 사라졌다.
<몽유도원도>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빼앗겨 일본의 텐리대(天理大)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에서 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 윤동주문학관'에서 내려 자하문(창의문)을 통과해 한양도성 안에서 밖으로 나가도 좋고, 자하문 밖 '부암동주민센터'에서 하차해도 좋다.
자하문 밖은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풍경이 수려하다.
자하문 바로 바깥 부암동은 지금도 아파트가 없다.
부암동의 동명은 부암동 134에 부침바위(付岩)가 있던 데서 유래됐다.
부침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숫자대로 문지르다 붙여서 떨어지지 않으면 잃어버린 아들을 찾거나 사내아이를 얻는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높이 2m 정도 되던 바위는 1960년 자하문 도로공사 때 깨뜨리기 전까지 서 있었다.
지금은 이 바위를 기념하는 비슷한 크기의 조형물이 세검정 삼거리에 있다.
부암동주민센터를 끼고 오른쪽 골목길을 걸어 올라간다.
무계동이다.
겸재의 그림 <창의문>에 그려져 있는 기차바위(백련봉)와 해골모양바위 아래 골짜기 동네가 무계동이다.
부암동주민센터에서 100m쯤 올라오면 한옥 건물 무계원을 만나는데, 여기서 다시 100m쯤 더 올라간다.
부암동 319-4번지.
무계정사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아무도 살지 않아 쓰러져 가는 한옥집이 있는데, 안평대군과는 관련이 없다.
무계정사 터 앞 바위에는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지만, 사유지여서 이 바위를 쉽게 볼 수는 없다.
옛 무계정사 터 직전엔 <현진건 집 터>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상황과 하층민의 삶을 고스란히 소설로 담았던 빙허(憑虛) 현진건의 생이 짤막한 글귀로 새겨져 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술 권하는사회>(1921년), <빈처>(1921년), <운수 좋은 날>(1924년) 등은 식민지 궁핍한 현실을 작품으로 고발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집터엔 잡초만 무성하다.
현진건은 언론인이었다.
시대일보 등을 거쳐 192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이듬해부터는 사회부장으로 일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1위를 해 월계관을 쓰고 단상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발행했다.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정착한 곳이 여기다.
현진건은 이곳에서 양계를 하면서 <무영탑>을 집필했다.
신문사를 그만둔 그를 찾아오는 친구들 덕분에 닭은 점점 줄어들었다.
현진건은 이곳에서 장결핵으로 죽었다.
빙허는 '허공에 뜬 공허함'이란 뜻이다.
무계정사 터 오는 길 초입에 만난 고풍스러운 한옥 무계원은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무계정사의 활터가 있던 곳에 자리잡았다.
무계원은 복합문화 공간으로 개방돼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계단을 따라 올라간 부지 위에 팔작지붕에 홑처마를 인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이라는 요정 건물을 옮겨온 것들이다.
대문을 비롯해 기와, 서까래, 기둥 등 다양한 곳에 오진암의 건물 자재를 옮겨왔다.
오진암은 1953년 익선동에 문을 열었고, '장군의아들' 김두한의 단골집으로 유명세를 탔다.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불리며 군사정권 시절 즐겨 이용됐다.
오진암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이들이 오진암에서 만나 논의한 것이 1975년 7월4일 발표된 ‘7·4 남북 공동성명’이다.
7·4 남북 공동성명은 남북한 당국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오진암이 있던 자리는 익선동의 종로세무서 옆이다.
원래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내시이자 서화가였던 이병직의 집이었다.
2010년 오진암 자리에 관광호텔이 신축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김영종 종로구청장과 각 분야 장인들이 노력해 현재 무계원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옛 무계정사 터에서 인왕산 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윤웅렬의 별서가 나온다.
1906년에 완성한 이 집은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이 당시 한양도성에서 널리 퍼지던 성홍열(猩紅熱, scarlet fever)을 피하기 위해 지은 별장이다.
담이 높아 기와 지붕만 보일 뿐 안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윤웅렬은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한일 강제병합 이후 남작 작위를 받는 등 친일의 길을 걸었다.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첫째 아들 윤치호는 옥살이(105인 사건)를 한 뒤 변심했다.
아버지로부터 남작 작위를 계승하고 학도병 강연과 징병을 권유하는 글을 작성하는 친일 행위를 했다.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인왕산 초입까지는 600m 남짓이다.
인왕산을 올라가는 여러 등산로 가운데 능선에 닿을 수 있는 가장 짧은 길이라고 한다.
오르막길이지만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길 중간쯤 옛날의 누군가가 새겼을 청계동천(靑溪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동천'이란 단어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의미하는 만큼 이곳 경치가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뜻이다.
인왕산 등산로 입구에는 자하미술관이 있다.
해발 180m 산기슭에 위치한, 서울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이다.
북악산이 내려다보이며 북한산 비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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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아랫줄 오른쪽은 4월 비 내리는 날 자하미술관에서 찍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