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87)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 – ⑤ 공부의 아마추어 키우기/ 시인, 한양대 교수 송재찬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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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공부의 아마추어 키우기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늘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는 공부의 프로를 양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마추어를 양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문제 풀이의 프로들은 너무 많이 만들어놨는데 그중에 정작 페르디난드나
조성훈 같은 아마추어는 키우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 아마추어(amateur)란 단어는 프로보다 못한, 실력이 미숙한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이 단어의 가장 좋은 뜻은 사랑하는 자, 곧 애호가(愛好家)라는 의미이지요.
바둑이나 조기축구든, 등산이나 낚시든, 요리나 꽃꽂이든, 뭐든 좋아하는 자는 못 말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바둑 아마추어, 곧 바둑 애호가들은 급수를 올리기 위해 스스로 더 힘든 묘수풀이를,
그것도 매우 즐겁게 합니다. 사서 고생합니다.
또한 바둑을 잘 두는 사람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잘 두는 사람은 잘 두는 사람끼리,
잘 못 두는 사람은 또 그들끼리 스스로 즐기고 더불어 즐깁니다.
말하자면 공부를 잘하기보다 공부를 좋아하게 하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평생 공부만 해야 하는데 고작 십대까지 공부 좀 잘한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공부 잘하는 친구도 공부 애호가여야 바람직할 것이며,
또 공부를 못해도 공부를 좋아할 수는 있는 겁니다.
좋아하는데 못 하는 게 어디 공부뿐인가요? 물론 공부 말고 다른 걸 좋아할 수도 있지요.
다만 우리 사회에서 공부라고 하면, 공부를 잘하건 못하던,
하기 싫지만 억지로 해야 하는 것처럼 통하는 게 참 속상할 따름입니다.
“공부 좋아서 하는 사람 어딨니? 다 힘들지만 참고 이겨내는 거야.
그래야 대입에 성공할 수 있고, 나중에 잘 살아.”
공부가 힘든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
사실을 밝히자면 힘들수록 더 즐거울 수 있는 것이 공부입니다.
공부의 아마추어라면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나라 교육계는,
마치 공부의 원수처럼 여기는 컴퓨터 게임계로부터 한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하게 만들까요?
아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을 한번 보십시오. 컴
퓨터 게임 만드는 분들이야말로 교육학의 대가들입니다.
그들은 스테이지 1에서 스테이지 2로 올라가면 이용자들이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테이지 1과 2 사이에는 적절한 반복과 비약이 존재하죠.
단계들이 서로 너무 비슷하면 자루해선 안 하고, 너무 차이가 나면 절망해서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정성껏 배열해놓고서 어느 순간에는 ‘현질, 현금 결재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단계까지 만들어놨어요.
심리학자 비고츠키(Lev Semenovich Vygotsky)의 용어를 빌리자면,
컴퓨터 게임의 과정은 아동의 실제 발달 수준에서 잠재적 발달 수준으로 건너가도록,
마치 건물 공사장의 임시 발판처럼 비계(飛階)를 만들어주는 스캐폴딩(scaffolding)과 유사한 겁니다.
사실, 알고 보면 컴퓨터 게임은 정말 어렵고 힘든 문제 해결 과정입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거기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그것도 스스로 밤을 새워가며 더 어렵고 높은 단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 과정이야말로 자기주도적 학습이라 부르기에 가장 적합한 예입니다.
그러니 한번 상상이라도 해보는 겁니다.
우리 아이들이 ‘만렙’을 꿈꾸며 게임 스테이지 1을 끝내자마라 스테이지 2로 올라가듯,
우리 아이들이 ‘미분’을 끝내자마자 “선생님, 적분 주세요!”라고 외치는 광경을.
학업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에 관한 공부의 아마추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어느 분야든 그 공부에 대한 사랑을 키워주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조선의 문장가 유한준이 한 이 말의 대전제에 주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질문이 생깁니다. 더 알고 싶어지니까요. 알면 보입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됩니다.
관찰은 창의를 낳고 창의는 다시 더 큰 사랑을 낳게 되는 선순환이 이어집니다.
기존의 정답처럼,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는 관계 안에서는 새로운 세렌디피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세렌디피티를 우연처럼 번역해 쓰지만, 사실 그때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바꿔보면 기존 루틴답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페니실린이든, 아스피린이든, 포스트잇이든,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거든,
하나같이 기존의 정답을 거듭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게 된 것들입니다.
세렌디피티란 뭔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냥 우연에만 맡겨진 것도 아닙니다.
저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분야에서 꾸준히 관찰하고 공부하고 숙련해온
아마추어 출신의 프로들입니다.
그렇게 축적된 능력이 어느 날 필요한 순간에 튀어나오는 겁니다.
마치 세렌디프의 왕자들처럼 말이지요. 세렌디피티란 이름의 창의성, 그
것은 사실 준비된 우연, 어쩌면 그런 이들에게 허여된 필연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12.21.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87)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 – ⑤ 공부의 아마추어 키우기/ 시인, 한양대 교수 송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