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정착 초기 1년은 번개와 같이 지나갔다.
그 번개 같은 1년 동안 나는 수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또 다시 느꼈다.
어떨 땐,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무능하고 약했기 때문이다.
나중엔 그 초기 1년도 다 유익하고 내게 값진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초기 1년 안에 있을 때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크로아티아라는 나라로 인도하신 이유를 다 알지 못하지만 나름 내가 깨달은 바가 있다.
그 중 한가지는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실 때, 언제는 남들이 가지 않는 곳, 생소한 곳, 아직 개척되지 않은 곳으로 보내셨다. 96년 이스라엘 키부츠가 그러했고 99년 몽골이 그러했다. 영국은 제외하겠지만(그곳은 유학이니), 마지막으로 오게 된 크로아티아도 2009년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나라였다.
물론 장단점이 있다.
단점은 모든 것이 초기였기에 불편한게 많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키부츠도, 몽골 울란바타르도(비록 선교사님들이 있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생소한 곳이었고), 크로아티아도 그러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물을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렇기에 좌충우돌하며 습득해야 했다.
장점은 초기였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통제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더욱 그러했다.
이곳은 내가 왔을 때에는 과거의 한인 선교사들 가정은 다 철수하고(그만큼 크로아티아는 개척이 쉽지 않았다), 세르비아에서 온 UBF 평신도 선교사 가정 한 곳 밖에 없었다. 누가 날 지도할 사람도 없고, 가이드 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게 나에겐 도리어 좋은 기회였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기도하며 도전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에게 광야와 같은 곳에 인도하셔서, 초기 선교지의 기초를 닦는 작업을 하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초기 1년에 나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며 다음과 같다.
1. 긴장과 두려움
체류 문제는 항상 내게 어려움을 주었다. 선교사가 체류방법이 없으면 떠나야 하는데, 크로아티아는 외국인 체류에 굉장히 까다로웠다. 비자 갱신 기간도 1년 단위가 아니라 6개월이었다.
체류증을 주는 경찰서는 아주 경직되고, 날카롭고, 그냥 들어 가기도 해도 긴장과 기를 죽게 했다.
뭐라고 하며 대들면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체류증을 받을 때만 되면, 몇 달 전부터 슬슬 긴장이 되었고, 또 신청 당일은 새벽에 나가서 경찰서 문 앞에 기다리고 서서, 알아 먹지도 못하는 크로아티아 말로 야단치고 호통치는 경찰관의 지시에 따라 비자 업무를 해야 했다. 체류증 연장 일은 한번에 절대 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서에 가게 되면 적어도 세 네번을 갈 각오를 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괜시리 체류 문제부터 시작해서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카톨릭 국가에 개신교 선교사로 왔기에, 이에 대한 스스로가 갖는 중압감이 있었다.
물론 경찰서 비자과가 그걸 생각하고 일처리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나 혼자 스스로 그런 중압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선교사로 왔다고 큰 소리로 말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 직업을 묻거나? 왜 크로아티아에 왔느냐? 물으면 그 때 곤욕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선교사로 왔다고 하면, 왜 선교사가 이곳에 올 이유가 있느냐? 고 도로 반문할 것 같아서 말이다. 영광스러운 일을 하러 왔지만, 마치 밀매꾼처럼, 스파이처럼, 나 자신을 숨기고 될 수 있으면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배경에는 아마, 체류에 관련된 긴장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체류에 관한 문제는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했다.
나는 환경에 의해서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지만(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자신의 메시야임을 숨긴 것 같이-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다-나는 주님과 달리 두려움에 근거한 숨김이었다) 동시에 크로아티아의 체류는 오직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와 섭리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곳 경찰서에 의해서 추방되거나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두려움과 긴장의 끈은 항상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다.
2. 어학의 집중
초기 1년 동안 말 배우는 데 최고의 집중을 가했다. 초기 크로아티아어 학습은 대단히 어려웠다.
전혀 생소한 언어와 발음, 그리고 문법구조는 나를 패닉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특유한 사교성과 인내로 꾸준히 공부를 했고 다니던 어학원에서도 모든 이들과 원만하게 공부에 집중을 했다.
나의 장점 중에 하나는 성실함이다.(지금은 예전보다 게을러진 것 같은데...) 선교사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 우리 학급의 어느 학생보다 떨어지지 않게 공부하려 했고, 또 비록 동양인이기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성실로 대처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때 만난 자그레브 대학 어학당 교수들은 나와 가까운 관계가 되고 이 일은 이후 나에게 많은 유익이 되었다.(학교에도 친구가 생겼으며, 당시 평교사였던 교사가 몇 년 후엔 학과장이 되면서, 여러가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어학당에서 문화 수업을 하던 중에, 한국 음식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직접 재료와 기구를 준비하고 와서 수업 시간에 깜짝 요리를(해물파전) 만들어서 학생과 선생님에게 시식을 하게 한 적이 있다.
이 일은 지금도 한국 학생들이 오면 회자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고 있다.
나는 매일 아침에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수업을 마치면 도서관에 가고, 귀가할 때는 언제나 단어장을 가지고 전차 안에서 외우곤 했다. 마치 고3이 된 것 같이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했다. 초기 1년의 어학 공부 때에는 아이들 케어를 대부분 아내가 맡아서 했다. 그래서 난 자유롭게 또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학교와 도서관을 다니며 어학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아내에게 감사한다. 반면 그런 이유로 아내는 크로아티아 말을 잘 배우지 못했다.
나는 근래에 이 곳 선교사들을 보면서 나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더 많이 가정과 가족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나와는 괜한 괴리감을 느낀다.
그렇게 공부를 했지만 1년 이상을 하진 못했다. 어학이라는 것이 적어도 3년 이상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아쉽게도 중도하차하고 말았다.(그 후에 나는 다시 자그레브대학 어학원에 등록해서 4학기를 더 공부를 했다.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고, 2년 쉬다 1년, 등 이런 식으로 계속 공부를 해 나갔다).
그 이유는 첫째, 정착과 사역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1년 정도가 지난 때부터 학생 비자가 아닌 다른 비자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일 또는 비자 소스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업이 뒷전이 된 것이다. 둘째, 그리 큰 돈은 아니었지만, 재정적인 부담도 있었다. 매학기 600유로라는 돈을 내어야 했는데, 초기 정착시 비용이 많이 들어가(세금, 의료보험, 집세 등등을 빼고 나면 정말 남는 것이 없었다) 그만 쉬고 말았다.
하지만 자그레브 대학 크로아티쿰(어학당)은 내게 많은 재미와 즐거움과 만남을 준 곳이기도 하다. 나는 학생들과 어울려 공부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그곳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또 그곳의 교수들의 교수법과 수업 매너는 내가 한글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절대 학생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고 존중하고 인내하는 것... 그것이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3. 두드림과 무응답
초기 1년동안 나는 현지 교회와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많이 만나려고 했다.
그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었고 또 선교사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달리 현지 교회나 사역자들은 그렇게 호의적이진 않았다. 내가 한국 선교사로 왔지만 그들에게 한국은 생소했고 또 함께 협력할 이유도, 프로젝트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하든지 길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만난 여러 명의 현지인 목회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많이 만났다고 해서 관계가 다 이뤄지진 않았다.
어떻게 본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했고, 남을 사람과 떠날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교회도 찾아가서 예배도 드리고, 협력도 모색하고 했지만, 결론적으로 별 성과는 없이 끝이 났다.
초기 1년 동안 나는 아무런 성과 없이 그렇게 지냈다. 물론 성과를 꼭 낼 이유도 없었다.
정착도 정신없고, 이곳에 적응하는 것도 정신이 없었으며, 말 배우는 일에도 온통 몰두해 있었는데, 거기에 더하여 현지 교회와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먼저 손을 내 밀어 주길 바랬지만 사실 그런 교회나 현지인들은 없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교제하다 보면 다른 생각이 있고, 그들만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두드리기만 하고 그렇게 시간을 지나 버렸다.
하나님께서 이런 1년을 보내게 하면서 내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현지 교회나 사역자들과의 직접적인 협력사역이나 동역보다는, 나 자신만의 사역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현지 교회와 협력하고 동역할 수 있는 간접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게 하셨다. 그것이 이후 NGO가 되고, 한글 학교가 되고, 한인 교회가 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