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반을 끙끙대면서 드디어 완성했다. 짙은 밤색의 쫀득쫀득한 도토리묵. 친정 엄마가 알려주신 묵 쓰는 방법을 노트필기 해 그 방법대로 쒀보니 정말로 엄마가 해주신 그 묵 그대로가 탄생한 것이다.
도토리 녹말가루는 김포에서 사시는 큰 이모가 매년 보내 주시는데 가루가 얼마나 좋은지 묵을 쒀놓으면 맑은 갈색으로 탄생한다. 우리가 보통 시장에서 사오는 도토리묵은 점성이 약해 툭툭 끊어지고 빛깔도 탁한 밤색인데 이것은 도토리 녹말을 충분히 우리지 않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귀한 가루를 얻었으니 최상의 도토리묵을 만들어야겠지. 도토리 녹말가루를 물에 개어 작은 멍울 하나 없이 일일이 풀어준 뒤 녹말가루의 7배 양의 물을 붓는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티를 잡기 위해 고운 채로 바친 다음 불 위에 올려 익히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쉬지 않고 주걱으로 저어주는 일이 제일 힘든 일이다.
점성이 강한 녹말가루를 저어주지 않으면 밑에 갈아 앉기 때문에 젓는 일이야말로 좋은 묵을 얻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저으면서 주걱으로 끈끈한 정도를 확인해야 한다. 주걱에서 주르르 쏟아지면 덜 된 것이고 한두 방울 떨어질 정도로 끈끈해지면 거의 다 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도토리묵을 더 맛있게 하려면 약간의 간이 필요하다. 중간쯤 졸여질 때 올리브 오일과 소금을 약간 넣어준다. 그러면 도토리묵이 윤기가 나고 간도 들어 그냥 뜯어 먹어도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1시간 가까이 어깨가 뻐근하도록 쉼 없이 저어 완성한 도토리묵, 음식 만드는 데 이만큼 정성을 쏟은 일이 내 평생 있었던가?
잘 다듬어진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하는 것도 힘들다고 투덜대던 때가 비일비재했는데. 어쨌든 온갖 정성을 다 해 묵을 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지인의 부모님이 결혼 60주년 그러니까 회혼을 맞으셨다는 것이다.
식구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나를 위하여 친 형제라도 그리 못 할 정도로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던 지인 부부. 그 정성이 어찌나 대단한지 우리가 전생에 부부나 형제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지인의 일이니 만큼 돈으로 손쉽게 하는 것 말고 내 정성을 담은 뜻 깊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남남으로 만나 아들 딸 낳고 60년을 해로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슬하에 팔남매씩이나 되는 자식들은 하나도 잃지 않은 어른들. 그 어른들이야말로 복중에서도 상복을 타고나신 어른들이 아닐까.
그 어른들의 맏며느리로 들어 와 시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지인. 그 친구는 시부모님의 회혼식을 제 손으로 차려드리겠다고 나섰다. 일이 무섭지 않느냐고, 웬만하면 음식 맛이 깔끔한 뷔페식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내 충고도 듣지 않았다.
부모님을 위한 잔치가 당신들 평생에서 마지막이 될 텐데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싶다는 게 그 친구 고집이었다. 아무리 손끝이 야물어도 그렇지 20~30명이라면 몰라도 꼭 와야 할 직계만도 70명이라는 데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동서들이 여럿이니 걱정 말라며 음식 준비를 도와주겠다는 내 요청을 극구 사양하는 지인을 위해 뭐 한 가지라도 해 주고 싶었다. 친정 엄마께 무엇을 해 주면 좋겠냐고 여쭈니까 좋은 도토리 녹말가루가 있으니 묵을 쑤어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부조 중에선 음식 부조가 최고지. 옛날엔 누구 집 잔치라 그러면 모두 음식 부조를 했단다. 너 생각 안 나? 할아버지 환갑 때도 친척들과 가까운 이웃들이 모두 음식을 해왔지 않니. 도토리묵, 청포묵도 쒀오고 감주도 해오고 콩나물 숙주나물까지 길러 왔잖니.”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옛날에는 환갑까지 사시는 게 장수에 들었던지 잔치를 크게 했다. 우리 할아버지 회갑연도 3일에 걸쳐 잔치를 열었다. 동네 사람은 물론 근동 어른들까지. 하여튼 초청 규모도 대단했다.
그러자니 음식도 무진장 많이 차려야 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한 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하시고 친척들도 분담을 했다. 갖은 떡과 과일 그리고 엿까지 곤 것은 물론 두부 만들기도 빠지지 않았다.
어떤 아줌마는 전 부치는 데 쓰라며 당신 집 암탉이 난 유정란을 모아 갖고 오시기도 했다. 하기야 한 해 농사로 먹고 사는 농촌에서 현금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자신들 손으로 가꾼 농산물로 이웃 간의 정을 나누던 시골 인심.
그 훈훈한 정을 이제 어디서 맛보나. 도토리 주워 까고 갈아 녹말가루를 만드는 정성은 들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쑨 도토리묵을 선물하고 보니 너무나 기쁘다. 상품으로 나온 도토리묵과는 천양지차인 그 맛.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그 맛은 지인에게 보내는 내 마음이다.
첫댓글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지요. 해마다 가을이면 허리가 아프도록 도토리를 주워 갈아 묵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제는 힘이들어 망설여 지네요.그래도 또 가을이 되면 산으로 갈것 같아요.반짝빛나는 도토리 줍는게 재미 있어서..
묵쑤기도 어려운데 큰일 하셨습니다...어렸을때에 동내에 잔치나 초상이 나면 음식으로 부조를 했는데..정겨운 우리내 삶의 방법이였죠.^^
해마다 엄마표 도토리묵으로 묵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젠 그 맛을 즐길수가 없네요. 시장이나 마트에서 산 묵은 엄마표 묵맛과 사뭇 다르니깐요. 올 가을에 도토리 주우러 갈까 봐요.그 맛이 그립습니다 ^^*
아..........정말 세상에서 제일 귀한 둘도없는 선물 입니다^^ 받으신 어르신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신 모습 오래도록 뵙기를 바랍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하셨군요. 정성이 가득 담긴 도토리묵.. 드신 분들 모두 다 행복하셨을 거 같습니다. ^^*
묵을 맛있게 쑤는 거야 가루가 첫째지만, 그래도 좋은 요리법 배웠습니다. 비록 사온거지만 응용해서 맛있게 쑤어볼께요. 사는 정이 뚝뚝~~흐르는 글 잘 읽고갑니다.
바지런도 하십니다. 이런 귀한 선물을 받으셨으니 어른신들이 행복하시겠어요.
그 맛있는 도토리묵을 혼자 먹으면 뭐가 어떻게 된다는 소리를 내 들은것도 같고 못들은 것도 같아서리
더운 날씨에 보통 정성이 아니죠...진짜베기 도토리묵 묵고잡다~~~^^**
묵 만드는 일이 보통 정성이 아닌데 귀한 선물을 하셨네요. 참 아름답습니다^^**
아~ 어릴 적 생각납니다. 혼사가 있으면 준비한다고 알록다록한 옷이랑 음식을 광에 넣어두었지요. 색다른 모양이니 살짝 몰래 내어먹기도 했지요. 그리고 이웃집에서 묵이랑 두부, 식혜랑 막걸리를 동이에 이고 들어오는 동네아줌마들이 생각나요. 북적북적이는 사람들속에 들떤 어린애의 마음이 생각납니다. 님 글을 읽으니 옛날이 그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