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간지 게재 시
가을 무렵 악기 한 소절 / 박성현 / 조선일보
가을 무렵 악기 한 소절
박성현
담장 밑 버려진 소주병에 바람이 들었습니다 볕이 내려앉아 알맞게 데우고 갔습니다 날벌레 몇 마리도 깊숙이 들어갔다 걸어 나왔습니다 조용히 숨죽이며 날개를 접었습니다 어디선가 금 간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모락모락 부풀고 느릿느릿 퍼졌습니다 악보가 수집하지 못한 소리라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음표와 음표 사이에 고여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멀어서 늦은 당신처럼 기록되기를 잠시 멈춘 가을, 그 무렵의 악기 한 소절이 늦은 달을 틀어 놓고 있었습니다.
ㅡ 박성현(1970~)
가을은 각자의 시간, 각자의 공간으로 분할되는 계절입니다.
같은 뿌리, 같은 가지에서 났던 상수리들도 열매가 되고 씨앗으로 여물어 각각의 나라가 되어 헤어집니다.
높은 자리 말고 낮고 조그만 자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을의 나라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람 들락거리는,
‘담장 밑 버려진 소주병’은 폐허의 ‘스틸 컷’입니다.
폐허의 유적은 이제 용도가 바뀌어 ‘날벌레 몇 마리’나 드나들다가 조용히 ‘날개를 접’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비극의 나라를 살펴보노라니 ‘금 간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그러고는 퍼져 나갑니다.
이제 ‘음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음표와 음표 사이에는 어떤 ‘말’들이 폐허의 잔해처럼 떠돕니다.
‘멀어서 늦은 당신’이 이유였습니다.
‘당신’이 없으니 ‘기록되기를 잠시 멈춘 가을’의 비극이 있습니다.
달빛이 음악으로 흐르고 있는 시각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여전히 ‘멀어서 늦은 당신’을 간절히 부르는 음악입니다.
그 ‘당신’에 가을은 ‘진실’ 혹은 ‘심판’이라는,
가혹한 이름을 넣어 부르게도 합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