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 (누가복음 17장)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
사도들이 예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5절). 사도(Apostle, 보냄을 받은 사람)는 제자(Disciple, 배우는 사람)와 달리 복음서에 매우 드물게 쓰이는 명칭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예수의 많은 제자 중 특별히 구별된 열두 명이라고 알려집니다(6:12-16). 더 정확하게는, 이스라엘 각 동네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예수께서 파송하셨던 열두 명을 가리킵니다(9:1-6). 그들은 일찍이 자신의 재산을 버리고 가족을 떠나 예수를 따른 이들이며(5:1-11), 보냄을 받아서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며 능력을 행했던(9:1), 제자 중의 제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무슨 믿음이 더 필요한 것일까요?
사도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구합니다. 믿음을 달라는 말인데, 스스로 노력을 통해 믿음이 생겨나게 하거나 키울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믿음은 갈고 닦아서 증가시킬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를 믿음이라고 한다면, 이 믿음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큰 믿음 vs 작은 믿음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말은, 없는 믿음이 생겨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을 증가시켜 달라는 뜻입니다. 즉, 지금 이대로도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더 큰 믿음이 되길 바란다는 얘기지요. 다시 말해, 작은(약한) 믿음과 큰(강한) 믿음이 있으며, 믿음은 자라는 것으로서 작은 믿음보다는 큰 믿음이 낫다는 전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초창기 때의 초보 믿음과 현재의 진보된 믿음이 다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믿음과 성숙한 믿음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습니다. 이는 유아 적의 나와 성인이 된 나는 같으면서도 같지 않음과 같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겪듯이, 살아 있는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움직여갑니다. 한 사람의 신앙 여정에서 믿음의 크기와 깊이는 달라질 수 있으며, 더 나은 믿음을 추구하는 태도는 권장할만합니다.
흔히들, 큰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청하는 사도들의 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앞에서, 작은 자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고(1-2절), 형제의 잘못을 꾸짖고(3절), 무한히 용서하라(4절)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런 명령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흔히, 믿음의 크기는 능력의 크기로 인식되기에,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구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6절)
‘큰 믿음’을 구하는 사도들에게,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마태, 마가에서는 산)를 뽑아 바다에 심을 수 있다’(6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짧은 말씀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비유입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갖기 어려운 대단한 믿음이 아니라 매우 작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궁금한 것은,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는 사도들에게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에게 있으면”의 가정법은 “없다”는 부정적 현실이 아니라, “당연히 있다”는 긍정적 상태를 가리키는 용법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언급하시는 예수의 의도는, 겨자씨만큼의 믿음조차 없는 사도들의 실상을 지적하려 함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이후 지금까지 예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도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던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가지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미 겨자씨 이상의 믿음이 그들에게 있음을 상기시키는 발언입니다.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을 수 있다 (6절)
뽕나무(산)를 뽑아 바다에 심거나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치는 건 일상에서 불가능합니다. 이런 불가능을 돌파하는 힘이 능력이며, 능력의 원천은 믿음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 신앙 상식입니다. 큰일일수록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들 생각하기에, 나무를 뽑아 들고 산을 내던지는 엄청난 일에는 큰 믿음이 소용되어야 한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께서는 그런 능력을 행하는 데에 겨자씨 한 알 정도의 믿음이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는 그런 일들이 별것 아닌 믿음으로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별것 아닌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으로 커다란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소위 기이하고 놀라운 믿음의 이적으로 보이는 일들이 실상은 겨자씨만큼의 믿음만으로도 가능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능력의 크기를 믿음의 크기라 여기는 인식을 무너뜨리는 비유라는 점에서 충격적입니다.
무익한 종의 비유 (7-10절)
뒤이어 또 하나의 비유(7-10)가 이어집니다. “무익한 종의 비유”라고 명명되는 이 비유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주제로 하는 앞 절의 대화와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이 비유는 “큰 믿음”이 무엇이며 큰 믿음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무익한 종’은 큰 믿음을 지닌 사람의 전형으로 제시됩니다.
이야기 속의 종은 집 밖에서 종일 밭을 갈고 양을 치는 일로 수고를 합니다. 많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 식탁을 준비하고 수발을 듭니다. 이 종이 하는 일은 누구의 이목을 끌거나 찬사를 받기에 어울리지 않는 당연하고 사소한 일상입니다. 이 일을 묵묵히 하는 종에게 주인이 고마움을 표하지도 않고, 아무도 격려해 주지 않습니다. 그가 매일 반복하는 일에 무슨 믿음이나 능력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능력은커녕, 철저히 무능해 보이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종을 ‘큰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이다 (10절)
남다른 공적이나 특별한 일을 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행하고 나면, 그에 따른 보상이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들 생각합니다. 종이라면, 위험 속에서 주인을 구해내거나 막대한 이득을 주인에게 안기는 일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그런데 이 종은 그런 일을 하려고 의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인 역시도 종에게 고마워하거나 사례하지 않습니다. 마땅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나거나 특별한 일들이 아니라, 마땅하고 평범한 일들이 생명의 일입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밥상을 차리고, 생계를 꾸리는 마땅한 일들로 생명은 보전됩니다. 낮과 밤이 바뀌고,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며, 새들이 씨앗을 먹고 강이 흐르는 당연한 일이 생명의 기적입니다. 주인의 집이 건사되는 것은, 엄청난 능력을 자랑하는 종들로 인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마땅한 일을 소리 없이 행하는 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일 역시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땅한 일입니다.
무익한 종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10절)
믿음의 크기는 곧 능력의 크기라는 생각은 오류입니다. 사소하고 마땅한 일을 하고 있는 종을 “큰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종임을 알고 있고, 자신이 하는 일이 특별하지 않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무익한 종’일 뿐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다고 토로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대가를 헤아리는 품꾼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하고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 말하는 종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아는 사람이며, 이 앎이 큰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있습니다(9:51-19:27). 이 길 끝에서 예수께서는 죽음을 당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일은 그야말로 무익함과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길을 예수께서 가시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자기를 아시는 예수께서는 보내신 분의 뜻에 복종하는 마땅한 일을 하시는 중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이를 살리신 능력에서 증명되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음에서 드러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믿음의 능력은 세상을 쳐서 내 발아래 두는 능력이 아니라, 나를 쳐서 하나님과 생명을 섬기는 능력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는 비범한 능력으로 땅을 뒤엎고 놀라운 수확의 결과를 이뤄내는 종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종임을 자처하면서 경쟁적으로 능력을 과시하고 그 능력을 큰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더 큰 능력을 행하겠다며 큰 믿음을 달라고 주님께 구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구하는 이들은 사도들, 즉 보냄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능력을 행할 힘으로서의 믿음을 갖길 원하지만, 앞서 그들을 파송하신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지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내신 분이 있음을 아는 것이 보냄 받은 이들의 믿음이요, 그분의 뜻에 복종함이 사도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사도들의 요구에 응답하여, 예수께서는 무익한 종의 비유를 예시하십니다.
겸손의 띠를 띠고 땅을 갈고 식탁의 시중을 드는 쓸모없는 종들이 하나님 나라를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하여야 할 믿음이 이런 종들의 믿음입니다. 큰 믿음이란 귀신을 축출하고 병자를 일으키는 능력에 있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는 무익한 일에 말없이 복무하는 무능력에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보상과 갈채를 받으며 지위를 차지하는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종으로서 허리를 숙이고 사는 삶입니다. 큰 믿음은 거대한 뽕나무를 휘어잡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굴복시키는 힘입니다. 산을 들어 던지고 나무를 뽑아버리는 힘으로 세상을 호령할 수는 있으나, 구원하거나 평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에는 그저 있으나 마나 한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고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는 일은 무익한 종의 연약함에서 성취됩니다.
https://youtu.be/gFoujz4eW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