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기를 열자 푸른 바다가 와락 달려든다. 그 뒤를 따라 거북이 한 마리도 느릿느릿 따라 들어온다. 몇 년 전 오늘 내가 있었던 곳이라는 자막이 뜬다.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곳, 여덟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섬, 카메라 렌즈로는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했던 찬란한 바다가 다시 내 앞에 펼쳐진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늘 복잡한 마음이 된다.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는 기대감보다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묘한 두려움, 낯선 곳에서 홀로 길을 잃게 될 것 같은 불안함까지 섞여 헝클어진 실타래를 쥔 느낌이 든다. 떠나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과 떠난 후 나의 부재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걱정까지 뒤섞이기 마련이어서,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여러 갈래의 마음으로 몸까지 무거워지기도 한다.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식품들의 유통기간을 확인한다. 먹지 않을 것 같은 채소들은 과감하게 정리한다. 옷장을 연다. 계절마다 한 번씩 정리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어김없이 서랍을 열어 이삼 년 동안 입지 않았던 옷가지들과 이별한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장롱을 열었을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왜 여행을 하느냐고. 그때 어떤 답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일까. 여행에서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행복감이 더 크기 때문일까.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내 기도는 시작된다. 어제까지의 복잡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떠나는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신께 기도한다. 끝없이 펼쳐진 구름 아래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가 우주의 눈처럼 반짝인다.
낯선 거리, 낯선 풍경, 낯선 음식, 낯선 사람, 낯선 언어들과 온종일 어울리다 숙소로 돌아올 때면 쓸쓸한 마음이 든다. 방금 세탁한 듯한 침대보에서 나는 낯선 냄새와 반듯하게 정리된 무미건조한 것들과 마주하면 나의 작은 화단에 피어있을 꽃들이 그리워진다. 잔뜩 서 있던 날이 조금씩 무뎌질 때쯤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다음엔 어디로 떠날까?”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화두는 매번 같다.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서야 낯선 곳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럽게 떠 올랐다. 현실 세계와 너무 달라서 경이로웠던 카파도키아,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에서 까닭 없이 흐르던 눈물. 길가에 무심코 피어있던 검붉은 빛의 꽃양귀비와 빨려 들어가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하늘,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지중해의 푸른 바다, 붉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오랜 세월을 견뎌낸 흰 빛의 집들, 물이 고여있는 석회층마다 하늘을 가득 담고 있던 파묵칼레.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야 그때의 떨림이 되살아나는 건 어떤 이유일까. 낯선 곳에서 잔뜩 경계하고 있던 것들이 해제되면서 그곳이 다시 그리워진다.
휴대전화를 열어 밀린 문자들을 확인한다.
‘여행 중이신가요?’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내는 수녀님의 문자다. 어떻게 여행 중인지 알았을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성당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을 위해 올린 기도가 화살처럼 수녀님께 도달했을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스러운 어떤 힘이 텔레파시처럼 전해졌을까. ‘지구별 여행자’라는 수녀님이 사용하는 닉네임이 떠올라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시 여행을 준비한다. 쓸쓸함과 설렘이 교차하는 밤, 유난히 큰 별 하나가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