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극한 대결의 해법을 찾는 릴레이 인터뷰의 마지막은 손호철(57)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그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공동의장(2000~2005년)을 지낸 진보 학계의 대표적 인사다. 스스로의 이념 성향을 ‘사회민주주의보다 왼쪽에 있다’고 했지만 북한에 대해선 매우 비판적이다.
“나는 조갑제씨의 우파적 주장도 보호돼야 하고, 광화문에서 김정일 만세를 외쳐도 놔둬야 한다고 본다”며 “그래야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하루 전날인 17일 본지 편집국에서 진행됐다.
-보수진영에선 대한민국에 좌파만 있고 진보는 없다고 합니다. 진보와 보수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
외국에선 좌파와 우파가 보편적인 개념이죠. 우린 전쟁을 겪어 좌파라는 표현에 너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어요. 그래서 진보 대
보수라는 개념을 사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데 요샌 우파나 중도나 좌파가 모두 스스로 진보라고 주장하는 ‘진보 천국’이
됐어요.”
-군사정권 때 ‘빨갱이’가 색깔론이듯 ‘수구 꼴통’도 낙인찍기 아닙니까.
“분명히 낙인을
찍는 거죠. 그런데 보수세력은 스스로 보수라고 말하길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제가 어느 세미나에서 ‘냉전적 보수’라는 용어를
썼더니 뉴라이트 쪽의 교수가 기분 나쁘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냉전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주의를 구했으니 옳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니, 냉전이 옳다고 믿는데 ‘냉전적 보수’는 왜 거슬립니까.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죠.”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 우파는 긍정적이고 좌파는 부정적입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
저는 해방공간 속에서 농지개혁이나 친일 청산이 역사적 과제였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이 상대적 우위에 있었다고 보이고요.
미 군정 여론조사에 따르면 70%가 사회주의를 선호했어요. 외세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아마 사회주의로 갔을 거예요. 그게 옳으냐
그르냐는 다른 문제고. 그래서 북한이 남한보다 발생학적인 정통성이 있을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지금도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저렇게 인민을 굶기고 정권 세습을 하는데 무슨 정통성이 있습니까. 저는 뉴라이트와 주사파가
‘일란성 쌍생아’라고 봐요. 주사파는 북한에 아직도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뉴라이트는 해방공간에서 북한에 조금이라도 더
정통성이 있다고 하면 우리가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보수세력도
해방 상황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는 친북세력도 있지만 저는 그들에게 전혀 찬성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조갑제씨가 노무현 정권에 대항해 무장 봉기를 일으키라고 쓴 적이 있지요. 친노 진영에서 조씨를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고소했어요. 그때 제가 ‘조갑제를 위한 변명’이란 칼럼을 썼어요. 조씨 주장도 문제지만 소송을 걸면 극우세력과 뭐가 다르냐는
거죠. 자유민주주의는 틀린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자유예요. 조씨의 주장이나 주체사상이나 억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광화문에서
김정일 만세를 외치면 그게 체제에 위협이 됩니까? 다들 돌았다고 생각하겠죠. 저는 북한이 좋다는 사람은 거기 가서 살라고 하고
싶어요.”
-‘계급전쟁’이란 말을 자주 쓰시는데 사회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봅니까.
“역사가 계급사회로 진행돼 왔다는 건 팩트죠. 계급은 갈등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넓은 의미에서 전쟁으로 부른 겁니다. 복지예산 줄이고, 부자들을 위해 감세하는 건 계급적 정책이죠. 용산참사는 공권력이 계급전쟁을 한 것이고.”
-좌파와 우파는 공존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
공존해야죠. 아니면 강제수용소로 보낼까요. 감옥에 보내거나 세뇌하지 않는 이상 사회는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죠.
다양한 사상을 인정하되, 어떻게 상호 논쟁을 통해 창조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죠. 요새 중도를 많이 얘기합니다.
중도가 별개의 이념으로 따로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양한 이론이 경합하는 힘의 벡터 속에서 중간이 생긴다고 봐요. 대립을
하면 어딘가에서 수렴돼 중간이 나오는 거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인권유린과 3선 개헌, 독재 때문에 비판받지만 비교적 깨끗했고 경제개발로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평가도 받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
과연 박정희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건지, 그게 사실이어도 다른 분야의 희생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는지 따져봐야죠. 그런
논리라면 소련 사람들은 스탈린을 무지하게 존경해야 해요. 러시아를 세계 양대 수퍼 파워의 하나로 만들었잖아요. 경제 때문에
박정희 향수가 나타났지만 박정희 암살도 1979년 경제위기의 결과입니다. 또 97년 경제위기의 가장 구조적인 문제는 ‘박정희
모델’에 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국가주도적 발전 경제의 비효율성, 재벌 체제의 문제점, 정경유착 등이죠.”
-북한 인권을 거론하면 우파에게 이용되니까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하십니까.
“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1905~80)가 소련에 대해 그렇게 얘기했죠. 북한 인권에 침묵한다고 비판하는데 저는 뉴라이트나
보수언론의 이중잣대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더 가까이 있는 우리 인권 문제에 침묵했는가, 그걸 반성할 때 북한 인권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진보진영도 북한 인권을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북한 민중이 스스로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나중에 북한 민중이 우리 진보진영에 ‘너희가 해준 게 뭐냐’고 물을 때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인권을 북한 인권과 비교하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데요.
“진보진영도 남한 체제 정당화에 악용될까 봐 북한 인권 비판을 자제한다는 수준은 벗어나야죠. 하지만 ‘북한에 비하면 남한은 천국이니 입 닥치라’는 식의 논리도 안 되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를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신화라고 극찬했는데 근거가 뭡니까.
“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기결정과 참여라고 봅니다. 촛불시위는 직접 민주주의가 구시대의 모델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고 평가해요.
여중생들까지 나와 자발적으로 집회를 만들어 가는 모습, 그게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전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아나키스트
혁명가 에마 골드만(1869~1940)은 자기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고 했죠. 촛불시위는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즐거운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직접민주주의가 중우(衆愚)정치나 포퓰리즘이 된다는 건 어떻게 보십니까.
“중우정치에 대한 우려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어긋나는 거예요. 민중은 우매하지만 철인왕(哲人王)보다는 똑똑해요. 대중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대통령 선거를 뭐 하러 합니까.”
-대중은 히틀러와 무솔리니 체제도 선택했습니다. 중국의 문화혁명 때도 수많은 사람이 미쳐 돌아갔습니다.
“
그게 과연 대중이 잘못해 그랬던 건지 따져봐야겠죠. 문화혁명은 위로부터 동원된 것이었죠. 물론 저도 대중을 무조건 아름다운
것으로 그리는 것은 잘못됐다고 봐요. 촛불시위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이기 때문에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일종의 매체 환원적 낙관론도 경계해야 합니다. 또 대중에 대한 일면주의적인 미화론 등은 잘못됐죠. 대중이 얼마나
변덕스럽습니까.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면 민주주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명박 정부의 중도실용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지켜볼 문제죠. 아직까지는 중도실용이라고
부를 만한 설득력이 없다고 보이고요. 정책을 바꾸는 게 아니라 홍보 부족을 탓하는 것 같거든요. 물론 대학 등록금 융자제도 등
일부 친서민적인 정책이 있지만, 아직까지 전반적 기조는 중도라고 이야기하기에 거리가 있다고 봅니다.”
-올해 세계경제 위기로 민생파탄이 심화되고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한국이 최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현실은 그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
제가 경제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본 것 같습니다. 비교적 빨리 회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더 이상 발전국가 모형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빈부격차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두 정권이 추진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책임이 있는 겁니다. 경제가 잘 안 되는 이유가 세계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라는데 그게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소위
‘747정책’(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 진입)의 허구성이 나타난 거라 여겨져요.”
-우파는 법치주의를 강조하고 좌파는 법이 기득권층을 위한 거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
본인들이 법을 지키면서 법치를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죠.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만 법치를 이야기해선 진정성이 없지요. ‘법
물신주의’에 빠져선 안 된다고 봅니다. 법을 무조건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요. 잘못된 법에 대해선 도전하고, 거부도 하면서
고쳐나가는 거죠. 법 자체가 시대의 사회적 힘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 이상이 아니에요.”
-북핵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은 남과 북에서 모두 지켜져야죠. 핵을
가진 열강들도 비핵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북한의 잘못이지만 자신들은 수천 개의 핵을 보유하면서 북핵만 시비 걸고,
이스라엘의 핵 개발과 보유는 침묵하는 기존 핵 강대국들의 이중잣대와 위선에 대해서도 침묵해선 안 됩니다.”
대담=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정리=배노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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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교수=1952년 생. 70년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 71년 위수령으로 제적됐다. 졸업 뒤 동양통신 기자로 일하다 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 미국 텍사스대(오스틴)로 유학,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94년부터 서강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 소장
진보 정치학자들의 연구모임인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민교협 상임공동의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레드 로드』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공저) 『해방 60년의 한국 정치』 『빈수레의 개혁을 넘어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