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02) 창작 과정의 실제 - ② 고심했던 흉악범 찾기/ 시인 이형기
창작 과정의 실제
브런치 https://brunch.co.kr/@zhoyp/ 高壓線(고압선) - 이형기
② 고심했던 흉악범 찾기
범박하게 유형화하면 〈낙화〉는 여성적 감수성이 그 정서의 바탕으로 되어 있는 부드러운 서정시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 와서도 나를 만나 그 시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 중 대부분이 젊은 여성이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류의 서정시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집은 모두가 그런 류의 서정시만을 모은 책이다.
읽어주는 독자가 많다는 것은 시인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그런 기쁨을 안겨줄 가능성이 좀 있다고 할 수 있는 〈낙화〉와 같은 시를 오래 쓸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20대 후반부터 그런 시에 차츰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런 서정시는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과거에 많이 썼고 앞으로도
많이 쓸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달리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30대로 접어들 그 무렵부터 새로운 시의 방향을 찾느라 방황과 모색을 거듭했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방향이 크게 바뀐 것이다.
흉악범 하나를 쫓고 있다.
인가(人家)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와선
혼자 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모습은 아니다
뉘우치는 모습은 더욱 아니다
성큼성큼 앞만 보고 가는 거구장신(巨軀長身)
가까이 오지 말라
더구나 내 몸에 손대지는 말아라
어기면 경고 없이 해치워 버리겠다
단숨에
그렇다 단숨에
쫓는 자가 모조리 숯검정이 되고 말
그것은 불이다
불꽃도 뜨거움도 없는
불꽃을 보기 전에
뜨거움을 느끼기 전에 이미
만사가 깨끗이 끝나 버리는
3상(相) 3선식(線式) 33만 볼트의 고압전류……
흉악범은 차라리 황제처럼 오만하다
그의 그 거절의 의미는
멀리 하늘 저쪽으로 뻗쳐 있다
— 이형기, 〈고압선(高壓線)〉 전문
이 시를 쓴 것은 10·26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1979년이다.
그 무렵 나는 부산의 〈국제신문〉에서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편집국장은 시국의 동향에 대해 민감한 안테나를 세우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나의 안테나에 걸려든 많은 정보는 민주화의 여망이 실현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 무렵 나의 의식 속에는 울분과 불안과 압박감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나는 동래의 온천장에 가서 온천욕을 하고는 부근에 있는
금강공원에 들렀다가 우연히 저쪽 산 위에 우뚝하게 솟아 있는 고압선의 철탑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철탑에 마음이 끌렸다.
고압선의 철탑은 여러 번 본 적 있지만 그렇게 마음이 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계속 바라보고 있었더니 이윽고 뇌리에는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독하게 고독한 사나이,
그러면서 자신의 그 고독을 군소리 없이 꿋꿋하게 견디고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었다.
저 사나이의 모습을 살려서 시 한 편을 써보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를 써보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이미지는 〈낙화〉의 서정시를 버리고 나서 내가 새로 추구했던
요소의 하나인 남성적 강인성과 어울리는 것이었고,
둘째로 그것은 또 시국의 압박감에 대응하는 바람직한 정신 자세의 상징이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의 정신 속에는 그날 이전에 이미
그 사나이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소지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서재에 들어앉아 노트에
‘외로운 사나이/ 혼자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고압선 철탑’이라고 써놓고
그것을 시가 되게끔 발전시킬 수 있는 다른 표현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럴듯한 구절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그 사나이가 어째서 외롭고 또 어째서 산등성이를 넘어가야 하는지부터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막연히 ‘외로운 사나이’니 ‘고독한 사나이’니 해서는 좋은 표현이 나올 리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사나이의 고독이 무엇에 기인하는가를 먼저 밝히는 쪽으로 생각을 모았다.
즉 그 사나이의 모습을 좀 더 구체화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상상의 날개를 펼쳐본 것이다.
나는 인물이든 상황이든 사물이든 간에 내가 시에서 어떤 대상을 묘사하려 할 때는
대체로 이렇게 상상력의 힘을 빌리는 방법을 취한다.
하지만 그날은 상상력에 발동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자정 무렵까지 연거푸 담배만 피우다가 내일의 출근을 위해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사나이는 모호하고 막연한 그대로 하나의 골치 아픈 숙제가 되어 내 의식 밑바닥에 숨어들었다.
그 후로 보름쯤 흘렀다.
오후의 편집회의 때 사회부장이 요즘은 기사가 없어 죽을 지경이라면서
큼직한 사건 한 방 터지게 고사라도 지냈으면 좋겠다고 익살을 부렸다.
사건은 기사를 낳기 때문에 기사로 먹고사는 신문기자들이 쉽게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나도 예사롭게 흘려들었을 그 말이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는 갑자기 ‘사건→범인’, ‘큰 사건→큰 범인→흉악범’이라는 연상작용이 일어났고,
동시에 의식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문제의 사나이가 떠오른 것이다.
‘아, 그렇다’ 하고 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 사나이는 쫓기는 흉악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숨을 곳을 찾아 혼자 고독하게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시를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세부적인 표현은 앞으로 찾아야 하겠지만 어떤 흉악범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등성이를 넘어간다는 시의 큰 줄거리는 잡힌 셈이었다.
나는 다음 날 일요일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큰 어려움이 없이 먼저 쓴
‘흉악범 하나가 쫓기고 있다./ 인가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와선/ 혼자 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다’는 첫 연이었다.
그러나 뒤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뒤가 잘 이어지지 않게 나를 가로막은 것은 주인공이 흉악범은 흉악범이라도
누구나가 고개를 돌리는 단순한 흉악범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차라리 확신범에 가까운 흉악범,
그리고 거기에 마카로니 웨스턴의 냉혹성과 꿋꿋한 의지를 가진 그런 흉악범을 나는 그려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는 그 무렵 내가 추구하던 남성적 강인성을 구현하게 될 것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윽고 2연이 떠올랐다.
그러나 겁에 질리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않는 당당한 모습만으로는 부족했다.
주인공은 그런 흉악범이면서 동시에 무서운 고압전류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고압전류와 흉악범의 동일화를 긴장감 있게 표현할 수 있는 구절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찾으려고 누웠다 앉았다 하다가 나는 그만 낮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저녁 무렵이었다.
전등을 켰다. 그 전등의 불빛과 함께 떠오른 것이 3연이다.
3연 이하는 밤에 비교적 수월하게 썼다.
다만 고압선 타고 가는 전기의 전압이 어느 정도인지를 몰라서 5연만 여러 번 쓰고 지우곤 했다.
이럴 때 내가 도움을 청하는 것은 백과사전이다.
3상 3선식이란 사전에서 알아낸 고압전선의 한 종류이다.
그리고 33만 볼트는 흔히 볼 수 없는 특별 고압이지만 3상 3선식에 맞춰 일부러 택한 수치이다.
이 시에는 철학적 관념이나 윤리적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다.
성공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노린 것은 고압선을 흉악범으로 의인화한
좀 엉뚱한 비유의 재미와 또 그로 인해서 조성된 강렬한 남성적 긴장감이다.
시는 이렇게도 쓸 수 있는 것이다.
<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2.1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02) 창작 과정의 실제 - ② 고심했던 흉악범 찾기/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