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는 일종의 편지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혹시 당신은 그 전에 제가 보낸 편지를 받아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편지들 속에 저는 쓰러진 나무 한 그루, 공중에서 오래 떠도는 나뭇잎 몇장,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흙 묻은 사과, 뒷굽이 삐뚜름하게 닳아빠 진 구두 한 켤레, 빨간 엑스란 내복 한 벌, 아주 좁은 방 한 칸,쐐기 고구마 한 접시,야트막한 포도밭,뻐꾸기 울음소리,상처입은 짐승 의 발자국....이런 것들을 담아 보내곤 했습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쓸모도 없을 것 같은 남루한 존재들에 제 마음을 실어 보냈습 니다.
제 시가 지나치게 자기고백적인 것도 그 존재들과 저를 지나치게 동일시해버렸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그리고 시가 일종의 편지라는 형식의 존재증명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고 요. 어떤 마음의 해변에 가 닿게 될까....마치 망망대해를 향해 '유리병 편지'를 띄우는 것 같은 막막함이 시를 쓸 때마다 늘 따라다 니곤 했지만, 언젠가는 가 닿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시를 계속 써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제 손을 떠나 시라는 소인이 찍히게 되면 그 편지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듯합니다. 사신(私信)이면서도 동 시에 사신이 아닌 어떤 힘을 가지게 된다고 할까요. 때로는 그런 방 식으로 제 속에 갇혀 있던 것을 털어내는 해방감을 느꼈던 것도 사 실입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났다고 해도 실은 떠난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를 세상에 던진 다는 것은 저를 함께 던지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셈이 지요.
시가 웅덩이에 처박혀 있으면 그것은 제가 웅숭깊은 어딘가에 고 여 있는 것입니다. 시가 어떤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면 저 역시 혼란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요. 또 시가 물 결을 타고 빠르게 흘러내리고 있다면 저의 욕망이 무언가를 향해 질주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다가 시가 다시 잔잔한 물결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있다면, 저 역시 잠시나마 고요의 순간을 맞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공간, 나는 바로 그것" 이라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시의 자리가 곧 시인의 삶이 가 있는 자리니까요. 그 자리에 대해서는 어떤 해설도 변명도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시 가 모든 걸 말해줄 뿐이지요. 그런 점에서 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글은 본문이 아니라 시에 대한 일종의 부기(附記)에 불과한 셈입니다.
밥 주는 걸 잊으면 그 자리에 서곤 하던 시계가 있었지 긴 다리 짧은 다리 다 내려놓고 쉬다가 밥을 주면 째각 째각 살아나던 시계, 그는 늘 주어진 시간만큼 충실했지 내가 그를 잊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지만 억지로 붙잡아두거나 따라가려는 마음 없이 그냥 밥 생각이나 하면서 기다리는 거야 요즘 내가 그래 누가 내게 밥 주는 걸 잊었나봐 깜깜해 그야말로 停電이야 모든 것과의 싸움에서 停電이야 태엽처럼 감아놓은 고무줄을 누가 놓아버렸나 봐 시간은 흘러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냉장고의 감자에선 싹이 나지 않고 고드름이 녹지 않고 시계바늘처럼 매달려 있어 째각 째각 살아있다는 소리 들리지 않아 반달이 보름달이 되고 다시 반달이 되는 것을 보지만 멈추어버린 나는 항상 보름달처럼 둥글지 그러니 어디에 부딪쳐도 아프지 않지 부서지지 않지 내 밥은 내가 못 주니까 보름이어도 나는 빛을 볼 수 없어 깜깜해 그냥 밥 생각이나 하고 있어 가끔은 내가 밥을 주지 않아서 서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지 밥을 주지 않아도 잘 가는 시계가 많지만 우리가 이렇게 서버린 건 순전히 밥 생각 때문이야 밥을 주다는 것은 나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