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나리 개나리 / 기형도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
만 29세의 나이에 요절한 기형도 시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문학청년들이 가장 많이 읽은 시집 중 하나라고 합니다. 평론가 김현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명명한 그의 어법(?)은 적지 않은 아류를 양산해서 한국 시단의 한 유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요. 1980년대 이후 각종 지지(紙誌)의 등단 작품들 중에는 이런 유형의 시들이 많은데, 이런 어법에 익숙해지는 공부도 습작에 필요할 것 같네요.
이 시는 개나리꽃을 보며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난 누이를 떠올리고, 죽음의 허망함과 삶의 비애를 술회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얼마나 많은 죽음들 위로 봄은 또 오는 것이지만,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 법이라는군요. 신생의 봄날에 죽음의 그늘을 보는 비관적 인식이 그의 수명을 단축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시의 제목을 그냥 ‘개나리’로 하지 않고 ‘나리 나리 개나리’로 한 것도 헤아려보면 좋겠네요. ‘개나리’는 감정 개입이 없는 어휘(보통명사)일 뿐이지만 ‘나리 나리 개나리’에는 죽은 누이를 연상하는 애틋한 감정이 실린 것이지요.
*
< 기형도 >
1960.
2월 16일(음력),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아버지(奇字敏)와 어머니(張玉順)의 3남 4녀 중 막내로 출생.
황해도에서 피난온 부친은 교사를 거쳐 당시 공무원으로 재직중이었다.
1965.
부친이 서해안 간척사업에 실패, 유랑하다가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 정착하여 가족을 불러들임으로써 이사.
걷기도 전에 노래를 배움.
여섯살 무렵에는 한자 투성이인 신문을 읽어 '신동' 소리를 듣다.
'85년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은 [안개]는 이 마을이 배경이 된다.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 수해 이재민의 정착촌이 되기도 했고 아직까지 도시 배후의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1967.
시흥국민학교 입학. 당시 부친은 마을의 개발에 앞장서는 한편, 성실히 농사를 꾸려나가 집안은 유복한 편에 속하다.
1969.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눕다.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며 모친이 가계를 꾸려나가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위험한 가계 1969」에서), '열무 삼십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엄마 걱정」에서) 등의 시는 이 무렵의 체험이 시화된 것이다.
1973.
시흥국민학교 졸업. 국민학교 시절 성적은 항상 우등이었으며 노래와 그림에 재주를 보이다. 특히 만화를 잘 그렸고 스스로 수십 권의 만화책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이 빌려가기도 하다.
1975.
당시 고등학교 2년이던 셋째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
이 사건이 깊은 상흔을 남기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나리 나리 개나리」).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
1979.
중앙고 수석 졸업.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 입학.
교내 문학서클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하다.
1980.
대학문학상인 박영준문학상(소설 부문)에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영하의 바람」).
1981.
7월 방위병으로 입대. 안양 근교에서 복무.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 동인지에 「사강리」등 발표. 시작에 몰두, 초기작의 대부분을 이때에 쓰고 습작을 정리하다.
1982.
6월, 전역 후 복학. 「겨울판화」「포도밭묘지」「폭풍의 언덕」등 다수의 작품을 쓰다.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시 부문)에 당선(「식목제」).
신춘문예에 관심을 돌려 응모하여 최종심에 오르내리다.
1984년.
10월, 중앙일보사에 입사.
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 당선(「안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다. (「전문가」「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늙은 사람」「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백야」「밤눈」「오래된 서적」「어느 푸른 저녁」.
2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에서 수습을 거쳐 정치부에 배속되다.
1986년.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주목을 받다(「위험한 가계 1969」「조치원」「집시의 시집」「바람은 그대쪽으로」「포도밭 묘지1,2」「숲으로 된 성벽」). '시운동' 동인, 문단 선후배, 출판관련 인사들과 활발한 교류.
1987년.
여름 짧은 유럽여행. 「나리 나리 개나리」「植木祭」「오후 4시의 희망」「여행자」「장미빛 인생」발표.
1988.
여름, 휴가를 이용 대구, 전남 등지로 홀로 여행(여행기「짧은 여행의 기록」).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김. 「진눈깨비」「죽은 구름」「추억에 대한 경멸」「흔해빠진 독서」「노인들」「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물속의 사막」「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삼촌의 죽음 ― 겨울 版畵 4」「너무 큰 등받이의자 ― 겨울 版畵 7」「정거장에서의 충고」「가는 비 온다」「기억할만한 지나침」발표.
1989.
「성탄목 ― 겨울 版畵 3」「그집 앞」 「빈 집」「질투는 나의 힘」「가수는 입을 다무네」「대학시절」「나쁘게 말하다」발표. 가을에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다.
3월 7일 새벽,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다.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독신.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음.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본명 그레고리오).
죽음 직후 유작「입속의 검은 잎」「그날」「홀린 사람」발표되다.
5월, 유고시집「입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다(시집의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