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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응봉산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한정주 역사평론가
①…남녘 바다 향해 날아가는 대붕(大鵬)
조식은 성리학자다. 그러나 그는 동갑내기(1501년생)이자 학문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같은 전형적인 성리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삶과 기상은 성리학이 담은 세계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넓었다.
필자가 생각할 때 그는 성리학을 넘어선 유일한 성리학자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당시 성리학자들이 요서(妖書), 즉 요망하고 요사스러운 책으로 취급하며 배척했던 『장자(莊子)』에서 자신의 호(號)를 취한 것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속의 기준이나 세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의 늠름하고 당당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조식을 대표하는 호는 ‘남명(南冥)’이다. 남명이라는 말은 『장자』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곧바로 만날 수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북녘의 아득한 검은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그 곤의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곤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변신하는데,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이 붕의 등 넓이 또한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 이 붕이 한번 떨쳐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펼친 날개는 창공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에 큰 바람이 일어나면 남녘의 아득한 바다(南冥)로 날아가려고 한다. 남녘의 아득한 바다(南冥)란 천지(天池)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편
『장자』는 수수께끼 같은 우화(寓話)와 전설 속의 동물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과 기호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노자(老子)』와 더불어 도가(道家) 사상의 바이블로 정치사상서 혹은 사회 사상서라고 하는데, 위에 소개한 내용만 보면-사상서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고-도대체 이게 설화(說話)인지 아니면 동화(童話)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북녘 바다를 뜻하는 ‘북명(北冥)’에 대비해 남녘 바다를 뜻하는 ‘남명(南冥)’이 등장한다. ‘명(冥)’이라는 한자는 ‘어두운 혹은 아득한’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바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북명’은 북녘 바다 혹은 북녘의 아득한 바다, ‘남명’은 남녘 바다 혹은 남녘의 아득한 바다로 해석할 수 있다.
조식의 호 ‘남명(南冥)’은 글자 뜻만 보자면 남녘 바다 혹은 남녘의 아득한 바다라는 뜻을 갖는다. 그냥 이대로만 보자면 참으로 심심한 호(號)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을 알면 조식의 기상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먼저 조식의 호를 이해하자면 위에서 인용한 『장자』의 첫 구절부터 알기 쉽게 해석해야 한다. 곤(鯤)이라는 물고기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곤(鯤)은 그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물고기인데 홀로 자유롭게 북명(北冥 : 북녘의 아득한 바다)의 푸른 바다를 마음껏 휘젓고 다닌다.
이 곤(鯤魚)이 어느 날 갑자기 변신해 붕(鵬)이 된다. 붕(鵬)은 전설 속의 새로 한 번의 날개 짓으로 9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난다고 해서 ‘대붕(大鵬)’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고전(古典)을 뒤지다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遊鯤獨運 凌摩絳霄(유곤독운 능마강소)”. 이 말은 “곤어(鯤魚)는 홀로 자유롭게 놀다가 붉은 하늘을 넘어서 미끄러지듯 날아간다”는 뜻인데 곤어(鯤魚)가 동쪽 하늘에 붉은 빛이 떠올라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대붕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웅장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한 번의 날개 짓으로 9만 리를 날아오른 대붕은 그 날개가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고 3천 리에 걸쳐 파도를 일으킨다. 옛 사람들은 대붕의 이 날개 짓으로 태풍이 만들어진다고 믿을 만큼 이 새를 신성하게 여겼다. 그런데 대붕은 자신이 살고 있는 북녘 바다를 벗어나 끊임없이 남녘 바다로 날아가고자 한다.
여기에서 필자는 장자가 ‘북명(北冥 : 북녘 바다)’을 세속의 삶에 비유하고 ‘남명(南冥 : 남녘 바다)’을 모든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세속의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난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곤(鯤)이 대붕으로 변하는 과정 역시 이와 비슷한 이치로 이해할 수 있다. 대붕은 모든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세속의 더러움을 벗어던진 자유롭고 위대한 존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식의 호는 이상향인 ‘남녘 바다(南冥)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을 뜻하며, 이것은 모든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세속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의 삶과 ‘위민(爲民)과 안민(安民)의 나라 조선’을 꿈꾼 그의 철학을 온전히 담고 있다. 조식의 학문 세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서 나타나듯 다분히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던 이황의 성리학과는 다르게 의리(義理)와 의기(義氣)의 실천을 강조해 사회현실과 정치 모순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추구했다. 이황의 성리학이 ‘사변철학(思辨哲學)’에 가까웠다면 조식의 성리학은 ‘사회비판철학(社會批判哲學)’에 가까웠다.
②…대붕(大鵬)의 기상 ‘을묘사직소’
조식은 일상적인 생활과 몸가짐에 있어서도 의리(義理)와 의기(義氣) 그리고 사회비판의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유학자로서는 아주 특이하게도 칼을 차고 다녔는데, 이 칼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 :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고, 외물을 끊는 것은 ‘의(義)’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마음을 더럽히는 바깥 사물로부터의 유혹이나 욕망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겠다는 뜻으로 칼을 차고 다녔던 것이다.
더욱이 조식은 칼로도 모자라다면서 ‘성성자(惺惺子)’라고 이름붙인 방울까지 차고 다녔는데, 이것은 나태하거나 교만해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일깨우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조식의 제자 중에는 홍의장군이라는 별호로 유명한 곽재우나 정인홍처럼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한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이렇듯 독특한 학풍과 정신세계를 보였던 조식은 ‘출처(出處)’ 문제에 있어서도 아주 파격적이었다. 그는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을 위해 성리학을 공부하는 당시의 유학자들을 대단히 혐오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산림(山林)에 거처하며 출세나 부귀영화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 현실 및 정치적 모순을 고치기 위해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삶을 살았지만 단 한 순간도 사회 현실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조식이 품은 ‘대붕의 기상’이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난 사건은 명종(明宗)이 그를 단성현감으로 임명하자 이를 거절했던 이른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을묘(乙卯)는 1555년(명종 10년) 을묘년을 의미한다.
“또한 전하의 나라 다스리는 일이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벌써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멀어져버렸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백 년 동안 벌레가 그 속을 갉아먹어 고액(膏液)이 말라버린 고목(枯木)이 있는데 망연(茫然)히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성스러운 뜻을 지닌 신하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밤이 늦도록 나랏일에 애쓰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형세가 극한에 이르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쓸 곳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酒色)질이나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대충대충하면서 오로지 재물만 늘리고 있습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데도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궁궐 안의 권신(權臣)은 후원하는 자들을 심는 일을 마치 용(龍)이 연못에서 잡아당기듯이 하고, 외직(外職)의 신하들은 백성들을 갉아먹기를 마치 늑대가 들판에서 날뛰는 듯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닳고 나면 한 터럭의 털도 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러한 이유로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면서 낮으로 하늘을 우러러본 지가 여러 차례이고, 크게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제하며 밤으로 천장을 바라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자손일 뿐이니 백천(百千)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개울이 마르고 곡식이 비처럼 내리니 이것은 무슨 조짐이겠습니까? 음악은 구슬프고 소복(素服)을 입었으니 그 형상이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는 비록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을 겸한 재주가 있고, 그 지위가 정승의 반열에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보잘것없는 한 몸으로 풀과 티끌처럼 하찮은 재주를 가진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만에 하나라도 위태로움을 부지(不持)할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을 비호(庇護)할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가 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그맣고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의 관작을 받고 그 녹봉을 먹으면서도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남명집』 ‘을묘사직소’
유학을 이념으로 하는 왕조국가의 ‘군신(君臣)’ 관계는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의 관계다. 그러나 조식은 달랐다. 그는 임금을 향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직언(直言)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누가 감히(?) 임금을 ‘선왕의 한 외로운 어린 아들’일 뿐이라고 부르고, 또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던 살아있는 권력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를 향해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나 세속의 이욕(利慾)에 초탈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조식은 평생토록 더러운 권력과 어지러운 세상에 나아가 부귀공명을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이름 없는 산림처사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또한 그는 비록 산림에 거처하는 선비였지만 더럽고 어지러운 세상사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개선하는데 자신의 삶과 학문을 바쳤다.
그런 점에서 조식은 현실을 도피해 산림에 은둔한 은사(隱士)와는 완전히 다른 선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을 미덕으로 여긴 왕조의 군신 관계를 거부하고 권력의 부조리와 잘못된 사회현실에 당당하게 맞섰던 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글이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민암부(民巖賦)’다.
임금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글은 제목에서부터 불경(不敬)하고 불충(不忠)한 것이다. 민암(民巖)이란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민암부’에서 조식은 임금의 덕목은 백성을 아끼고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것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 백성이 나라를 엎을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을 주저하지 않았다.
“유월 여름 장마철에 / 거대한 바위가 말(馬)과 같아 / 올라가지도 못하고 / 내려가지도 못하네 / 아아!! / 험악함이 이보다 더한 곳은 없네 / 배가 이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 또한 이로 인해 전복(顚覆)되기도 하네 / 백성이 물과 같다는 이야기는 / 옛적부터 있었으니 / 백성은 임금을 받드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리는 존재이기도 하네.” 『남명집』 ‘민암부’
이 때문인지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의 ‘명종조(明宗朝)의 유일(遺逸)’에서 조식에 대한 이러한 기사를 남기기까지 했다. “산림에 물러나 지냈지만 세상일을 잊지 못해 달이 밝은 밤이면 항상 홀로 구슬프게 가사(歌辭)를 읊고 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일찍이 선비들과 더불어 대화하다가 당시 나라 정치의 잘못과 백성의 곤궁한 삶에 말이 미치면 팔을 걷어붙이고 목이 메어 눈물까지 흘렸다.”
③…‘위민과 안민의 철학’
조식은 ‘물러날 퇴(退)’자를 평생 품고 살았지만 임금이 부르면 어쩔 수 없이 벼슬에 나섰다가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거듭했던 이황의 애매모호한 ‘출처(出處)’와는 다르게 죽을 때까지 더러운 권력에 몸담지 않겠다는 자신의 ‘출처(出處)’ 철학을 오롯이 지킨 조선 유일의 산림처사였다.
그는 1553년(명종 8년)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벼슬을 권하는 이황에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 즉 명망(名望)을 훔쳐서 벼슬을 도모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정중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출사(出仕)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조식과 이황 사이에 오고 간 편지와 답변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여기에서 ‘건중(楗仲)’은 조식의 자(字)다.
“지난번 이조(吏曹)에서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천거하자 성상(聖上)께서 어진 인재를 얻어 임용하는 일을 즐거워하여 특별히 명을 내려 품계를 뛰어넘어 6품직에 서임(敍任)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우리 동방에서 예전에도 찾아보기 힘든 장하고 큰 일입니다. 황(滉)은 개인적으로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롭지 않고, 군신 간의 큰 윤리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비 중에 간혹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곤란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만 과거(科擧)가 사람을 혼탁하게 만들고 조상의 음덕이나 다른 사람의 천거로 미관말직(微官末職)에 나아가는 것을 천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 몸을 깨끗이 하고자 하는 선비는 부득불 종적을 감추고 숨어서 벼슬에 나아가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산림(山林)에서 천거되었으니 과거의 혼탁함도 없고 품계를 뛰어넘어 6품직에 제수되었으니 미관말직으로 몸을 더럽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때문에 그대와 동시에 천거된 성수침은 이미 토산(兎山)에, 이희안은 고령(高靈)에 부임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예전에 관직을 사퇴하고 은거하여 장차 그대로 몸을 마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전에는 나아가지 않다가 지금은 나왔으니 이것이 어찌 그 뜻에 변화가 있어서겠습니까? 그들은 반드시 ‘내가 지금 출사(出仕)하는 것은 위로는 성조(聖朝)의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고, 아래로는 스스로 쌓아온 뜻을 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그렇게 할 뿐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어서 그대를 전생서(典牲暑)의 주부(主簿)에 제수하니 사람들은 모두 ‘조군(曺君)의 뜻이 곧 두 사람의 뜻이다. 이제 이 두 사람이 나왔으니 조군도 마땅히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라면 깊숙이 숨어 지내는 선비 중에서 뛰어난 이를 뽑았으니 알아주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나아갈 때가 아니라고 한다면 임금께서 어진 인재를 목이 말라 물을 찾듯이 기다리고 있으니 때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퇴계전서』 ‘조건중에게 보내다(與曺楗仲)’
“평소 하늘의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러보았고 책 속에 있는 사람과 같이 멀어 만나기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문득 간절한 말을 담은 편지를 받고 보니 약(藥)으로 삼을 말씀이 넓고도 많아 일찍이 아침저녁으로 만난 듯합니다. 식(植)은 어리석고 어두운데 어찌 자신을 아끼겠습니까? 단지 허명(虛名)을 꾸미고 취해 한 세상을 크게 속여 임금의 총기(聰氣)를 그르친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도 오히려 도둑이라고 말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을 훔치는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발을 디딜 땅이 없고 날마다 하늘의 주벌(誅罰)을 기다렸는데 과연 하늘의 벌이 이르렀습니다. 지난해 겨울에 갑자기 허리와 등이 찌르듯이 아프더니 한 달 여 동안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이제 행인들 틈에도 끼지 못하게 되었으니 비록 평평한 땅 위를 밟고 뛰고자 한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에 사람들이 모두 나의 단점을 알고, 나 또한 사람들에게 나의 단점을 감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웃고 탄식할 만합니다.” 『남명집』 ‘퇴계에게 답하는 글(答退溪書)’
필자는 수많은 조선 선비들의 삶과 철학을 살펴보았지만 조식만큼 크고 넓은 세계와 당당한 기상을 품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는 진실로 한 번의 날개 짓으로 세상을 뒤흔든 전설 속의 새인 대붕(大鵬)의 위세와 풍모를 지닌 산림처사였다.
④…“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게”
조식은 1501년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 현재 경남 합천군 삼가면)의 토동(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가에서 줄곧 자라다가 5살 무렵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자 한양으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조식이 사망한 1572년까지 그의 삶과 철학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26세 이전)→경남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산 시기(30~45세)→경남 합천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 : 뇌룡정)를 짓고 산 시기(48~61세)→경남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산 시기(61~72세)다.
한양에 올라간 조식은 처음 연화방(蓮花坊 : 현재 서울 종로구 종로4∼5가)에서 살았다. 당시 그는 이윤경(李潤慶)·이준경(李浚慶) 형제와 이웃해 살면서 절친하게 지냈다. 특히 이준경은 훗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로 조정에서 사림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한 고상한 인격의 선비였다. 또한 나이 18세 때 조식의 아버지가 연화방에서 장의동(壯義洞)으로 집을 옮기자 그곳에서는 성우(成遇)·성운(成運) 형제와 벗을 삼아 생활했다. 이들 형제는 율곡 이이와 함께 서인의 종조로 추앙받은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과 사촌지간으로 기호사림에 자양분을 제공한 기사(奇士)요 대학자였다.
조식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기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학문이 높고 인격이 고상한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조식은 이들과 함께 독서하고 학문을 토론했는데, 이때 성리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천문(天文)·지리(地理)·의방(醫方)·수학(數學)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면 그의 학문적 성향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6세 되는 1526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조식의 한양 생활 또한 끝을 맺게 된다. 조식은 선영이 있는 삼가
현의 관동(冠洞)에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3년 상을 마친 조식은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고 경남 의령 자굴산 명경대(明鏡臺) 아래 암자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이긍익은 당시 조식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항상 문을 닫아걸고 홀로 단정히 앉아 새벽까지 독서를 했다. 하루 종일 한 가닥 소리도 없이 고요하다가 때때로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작은 소리로 말미암아 아직 독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려실기술』 ‘명종조(明宗朝)의 유일(遺逸)’
그러다가 30세가 되는 1530년 처가가 있는 경남 김해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까닭은 홀로 남은 노모를 봉양하면서 학문에 계속 정진하기 위해서였다. 조식의 이러한 뜻은 신어산(神魚山) 아래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식은 이곳에서 더욱 학문에 침잠(沈潛)했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그의 명성은 김해는 물론이고 밀양(密陽)과 단성(丹城 : 현재 경남 산청) 등에까지 미쳤고, 그의 학문과 덕성을 추앙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산해선생(山海先生)’이라고 불렀다. 조식의 또 다른 호인 ‘산해(山海)’는 이때 생겼다. 이 호는 “태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뜻으로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조식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조식의 뜻과 의지는 산해정 안의 방에 걸어놓은 ‘좌우명(座右銘)’을 통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진실되고 삼가며 / 사악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며 / 태산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고 / 빛나는 봄날처럼 아름다울 지어다.” 『남명집』 ‘좌우명’
김해 산해정을 중심으로 한 조식의 삶과 학문은 나이 45세가 되는 1545년 노모가 사망하면서 마무리된다. 삼가현의 선영에 어머니를 모신 조식은 3년 상을 마친 1548년 마침내 김해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그곳을 강학의 공간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했다.
계부당은 글자 뜻 그대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함양(涵養)하는데 힘쓰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뇌룡사에는 비록 산림(山林)에 묻혀 산 이름 없는 처사(處士)일지라도 마땅히 용과 우레의 기상을 품고 살겠다는 조식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조식은 ‘뇌룡사’라는 이름을 지을 때 ‘남명’을 호로 삼았던 때처럼 다시 『장자』에서 그 뜻을 취했다. 성리학자였지만 결코 성리학에 갇혀 지내지 않았던 조식의 우뚝한 기상과 당당한 기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군자가 어쩔 수 없이 천하를 다스린다면 무위(無爲)만한 것이 없다. 무위한 다음에야 본래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편안히 머물 수 있다.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자기의 몸을 보전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는 자라야 세상을 의탁할 수 있고, 자기의 몸을 보전하는 일을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좋아하는 자라야 세상을 맡길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가 만약 그 오장(五臟)을 흩뜨리지 않고 그 총명함을 겉에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면 시동처럼 가만히 있어도 용(龍)의 기상이 드러나고 깊은 연못처럼 잠잠하지만 우레(雷) 소리가 나며 정신이 움직이면 자연이 따르고 자연 그대로 무위로 있어도 만물은 먼지가 흩날리는 것처럼 움직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내게 어디 있겠는가!” 『장자』 ‘재유(在宥)’편
조식은 이 가운데 ‘尸居而龍見 淵黙而雷聲(시거이용현 연묵이뇌성)’, 즉 ‘시동처럼 가만히 있지만 용의 기상이 드러나고 깊은 연못처럼 잠잠하지만 우레 소리가 난다’는 구절에서 ‘용(龍)’자와 ‘뇌(雷)’자를 따와 뇌룡사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실제 이곳에 거처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길러내면서부터 조식은 이황을 뛰어넘는 사림(士林)의 태두로 우뚝 솟았다. 그의 당당한 기상과 고상한 인품 그리고 높은 학식에 매료되어 전국의 수많은 사림(士林)들이 그의 문하생(門下生)이 되기 위해 찾아왔기 때문이다.
뇌룡사에 거처한 지 3년 만인 1551년 오건(吳健)이 찾아왔고 뒤이어서 정인홍(鄭仁弘)이 합천의 유생들을 이끌고 조식의 제자가 되었으며 김우옹·최영경·정구 등 뛰어난 젊은 학자들이 수도 없이 밀려들었다. 계부당과 뇌룡사에 담은 조식의 뜻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조식은 진정 맹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인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서 교육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셈이다.
⑤…지리산의 방장노자·방장산인
조식은 지리산 아래 삼가현(지금의 합천)에서 태어났고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지리산 자락 덕산(德山 : 지금의 산청)에 묻혔다. 지리산과 함께 한 삶이요, 죽음이라고 하겠다. ‘방장산의 늙은이’ 혹은 ‘방장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방장노자(方丈老子)’나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는 호에는 지리산에 대한 조식의 사랑이 가득 묻어 있다.
이 산은 “남다른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산”이라고 해서 지리산(智異山), “백두산이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라고 해서 두류산(頭流山),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해서 방장산(方丈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데 조식은 이 산의 여러 가지 호칭 중 방장산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식은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금기시했던 『장자』를 빌어 자신의 삶과 철학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이 때문에 그는 ‘성리학의 정통에서 벗어났다’거나 ‘이단이다’ 심지어 ‘노장(老莊)에 병들었다’는 등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대붕의 기상을 품은 산림의 처사답게 조식은 자신을 향한 세상의 칼날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옥국관(玉局觀 : 도교 사원 혹은 하늘나라)’이라는 도가(道家)의 용어를 빌어 세상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구속할 수 없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고상한 심회(心懷) 천 척(尺)이나 되어 걸기 어려운데 / 방장산 정상 높은 장대에 걸어볼까? / 옥국관에 모름지기 삼생(三生)의 명부(名簿) 있으니 / 다른 해에 이름자를 직접 볼 수 있겠지.” 『남명집』 ‘두류산에서 짓다(頭流作)’
이렇듯 평생 지리산을 벗해 살았던 조식의 삶은 그가 1558년 나이 58세 때 여러 선비들과 함께 이 산을 유람하고 적은 ‘두류산 유람록(遊頭流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러 사람들이 내가 두류산에 자주 출입해 산간(山間)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에게 유람록을 기록하도록 했다. 내가 일찍이 이 산을 왕래해 덕산동(德山洞)에 세 번 들어갔고, 청학동(靑鶴洞)과 신응동(神凝洞)에 세 번 들어갔으며, 용유동(龍遊洞)에 세 번 들어갔고, 백운동(白雲洞)에 한 번 들어갔으며, 장항동(獐項洞)에 한 번 들어갔다.
어찌 다만 산수(山水)만 탐해 왕래하기를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백년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직 화산(華山)의 한 쪽 귀퉁이를 빌려 늙어 죽음을 맞을 땅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다르게 어긋나서 거처를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이리저리 돌아보고 헤아려 염려하며 눈물을 흘리고 나왔다. 이와 같이 한 것이 열 번이었다. 지금은 매달린 바가지 마냥 시골집에서 나뒹구는 하나의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번 걸음은 또한 다시 이루어지기 어려우니 어찌 마음이 답답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내가 시(詩)를 지었다. ‘죽은 소의 갈비뼈 모양 같은 두류산을 열 번 가량 주파(走破)했지만 / 차가운 까치집 같은 가수(嘉樹) 마을에 세 번이나 거처했네.’ 또한 이런 시도 지었다. ‘몸을 보전하려는 백 가지 계책 모두 그르쳤으니 / 지금 이미 방장산과 한 맹세 어기고 말았구나.’ 이번 산행을 함께 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벼슬을 잃은 사람이니 어찌 단지 이 몸만 쓸쓸하게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다만 술에 취한 사람처럼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길을 잡아 부봉(副封)할 따름이다.” 『남명집』 ‘두류산 유람록’
조식은 고향 삼가현에 지은 계부당과 뇌룡사에서 학자와 스승으로서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지리산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그는 천왕봉(天王峯)을 더욱 가까이에서 대하고 싶은 마음에 아무 미련 없이 계부당과 뇌룡사를 떠나 덕산으로 거처를 옮긴 다음 산천재(山天齋)라고 이름붙인 집을 짓고 살았다. 이 해가 1561년(명종 16년)으로 그의 나이 61세 때였다. 당시 조식은 늦은 나이에도 덕산으로 이사한 이유를 한 편의 시로 읊었다. 그런데 ‘빈손으로 옮겨왔지만 맑은 물만 먹고 살아도 충분하다’는 시구(詩句)를 읽고 있자면 조식의 기상과 기백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봄 산 어느 곳인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 단지 상제(上帝) 사는 하늘나라 가까운 천왕봉을 사랑하기 때문이네 /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 은하수 같은 십리 맑은 물만 마시고 살아도 충분하네.” 『남명집』 ‘덕산(德山)에 복거(卜居)하면서’
또한 ‘덕산 계곡 정자의 기둥에 쓰다’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천 석이나 되는 큰 종(千石鐘)’처럼 거대한 울림을 남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허공의 온갖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뚝 서 있는 지리산(두류산)처럼 세상의 온갖 잡소리에도 끄덕하지 않은 의연한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뜻을 토로하기도 했다.
“천석(千石)이나 되는 큰 종을 보게나 / 큰 것으로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네 / 어떻게 하면 두류산과 같이 /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 수 있지?” 『남명집』 ‘덕산 계곡 정자의 기둥에 쓰다(題德山溪亭柱)’
그 후 조정에서 숱하게 벼슬을 제수하고 한양으로 불러 올렸지만 조식은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삶을 지키면서 정치 현실에 대한 매서운 비판과 제자들에 대한 강학에만 힘을 쏟았다. 특히 68세 되는 1568년 새로이 즉위한 선조(宣祖)가 조식을 한양으로 부르자 다시 벼슬을 사양하면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상소문이 앞서 소개했던 ‘을묘사직소’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조선사 최고의 직언(直言)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 ‘무진봉사(戊辰封事)’다.
여기에서 조식은 특히 ‘서리(胥吏)들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갉아먹고 있다’는 이른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주장하며 이들의 악폐(惡弊)를 제거해 나라를 구하고 민생(民生)을 편안하게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라고 임금을 질타했다. 군주의 참다운 덕은 백성의 마음을 존중하는 것이고, 지금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장 고통을 겪고 있는 서리들의 악폐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다는 주장이었다.
조식은 ‘구급(救急)’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마치 죽을 위기에 처한 병자(病者)를 다루는 듯 촌각(寸刻)을 다투어 이러한 서리의 악습(惡習)과 폐단(弊端)을 완전하게 뿌리 뽑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은 새로이 즉위한 임금에게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장(老壯)의 처사가 진심을 담고, 거기에다 마지막 희망까지 새겨 보낸 간곡한 충언이었다.
“예로부터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간혹 있었고, 외척(外戚)이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도 간혹 있었고, 여인과 내시(內侍)가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서리(胥吏)가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 정사(政事)가 대부(大夫)에게 있다고 해도 오히려 옳지 못하다고 하겠는데, 하물며 서리(胥吏)에게 있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군민(軍民)에 대한 모든 정사와 나라의 기밀과 업무가 모두 서리의 손에서 나옵니다. 관청에 세금으로 바치는 포목이나 곡식도 뒷돈을 더 건네지 않으면 통하지 않습니다. 안으로 재물이 모일지는 모르지만 밖으로 민심(民心)은 흩어질 대로 흩어져 열 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각 주현(州縣)을 나누어 가지고 자신이 소유하는 물건인 양 문서(文書)까지 작성하여 그 자손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헌납(獻納)하는 일체의 것을 가로막고 물리쳐 단 한 가지 물건도 상납(上納)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물(貢物)을 바쳐왔던 사람들은 온 가족의 재산을 다 팔아 바쳐도 그 재물은 관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리들의 주머니로 돌아갈 뿐입니다. 게다가 100곱절이 아니면 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바칠 수는 없으므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조종(祖宗)의 주현(州縣)과 신민(臣民)이 바치는 재물을 생쥐 같은 서리 놈들이 나누어 가질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다스리는 한 나라의 큰 부(富)가 오히려 서리들의 방납(防納)하는 물건에 의뢰하고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 이런 짓을 하고서도 서리들은 만족하지 않고 왕실 창고에 있는 물건까지도 모두 훔치려고 합니다. 나라에 저축되어 있는 재물이 조금도 없으니 나라는 나라가 아니고 도적들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나라는 텅 빈 그릇만 끌어안고 뼈만 앙상한 채 서 있으니 조정(朝廷)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마땅히 목욕재계하고 함께 힘을 합해 이들을 토벌(討伐)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힘이 부족하다면 사방에 호소해서 먹고 잠잘 겨를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임금을 돕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서로 모여 사는 곳에 어떤 좀도둑이 있다면 장수에게 명령해 잡고 죽이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잘것없는 서리들이 도적이 되고 모든 벼슬아치들이 무리를 이루어 나라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혈맥을 갉아먹고 있으니, 그 죄가 신에게 제사지내는 희생물을 훔치는 일에 그치지 않는데도 법관(法官)은 감히 그 죄를 묻지 않을뿐더러 따지지도 않고 있습니다.
간혹 어떤 관리가 규찰(糾察)하고자 하면 그들의 농간에 의해 견책(譴責)당하거나 파면(罷免)되고 맙니다. 그런데도 여러 벼슬아치들은 팔짱을 낀 채 녹봉만 받아먹고 ‘예예’하며 뒷걸음질 칠 뿐입니다. 서리들이 믿는 구석이 없고서야 어찌 이렇게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날뛸 수 있겠습니까? 초(楚)나라 왕이 이른바 ‘도적놈이 권세가 있어서 제거할 수가 없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약삭빠른 토끼가 도망갈 굴을 세 개나 파고 냇가의 조개가 딱딱한 껍질을 방패삼아 몸을 감추듯이 마음 깊숙이 전갈의 독을 품고 온갖 수단을 다해 꾸며대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형벌 또한 더할 수 없습니다. 서리들이 이미 도성(都城)과 사직(社稷)에 숨어사는 쥐새끼가 되어버려 불을 피워도 쫓아낼 수가 없고 물을 부어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서리들과 한통속이 되어 토끼가 도망치기 위해 준비한 세 개의 굴이 되어주고, 조개가 몸을 감추는 딱딱한 껍질이 되어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처벌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벌컥 화를 내시고 한번 크게 기강을 떨쳐 재상(宰相)들을 불러 모아 그 원인을 따져 물으셔야 합니다. … 만약 언관(言官)들이 논박(論駁)한 다음에야 마지못해서 쫓아간다면 선악(善惡)의 소재와 시비(是非)의 구분을 알 수 없어서 군주의 도리를 잃고 말 것입니다. 어찌 군주가 그 도리를 잃고서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의 밝은 덕이 이미 밝으면 마음이 거울처럼 밝아지게 되어 비추지 않는 물건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덕(德)과 위엄을 더하게 되면 풀과 나무도 모두 쏠리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든 신하들이 벌벌 떨고 두려워하며 분주히 임금의 명령을 받들 것인데, 어찌 간사한 꾀가 한 치라도 용납이 되겠습니까? 정사를 어지럽히는 대부(大夫)에게는 오히려 일정한 형벌이 있어서 저 윤원형(尹元衡)과 같은 권신(權臣)도 조정에서 바로잡아 처벌했는데, 하물며 여우나 쥐새끼 같은 이런 서리들의 허리와 목을 베는 일 따위야 도끼에 기름을 바르기에도 부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레가 울리고 비가 한 번 몰아치면 하늘과 땅의 갈증이 해소됩니다. 이것은 위로 임금이 몸을 닦으면 아래로 나라가 다스려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 그러나 간신(奸臣)들은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제거하면서도 간악한 서리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 것은 용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일신(一身)을 위하는 것이지 나라를 위한 일은 아닙니다. 신은 홀로 깊은 산골에서 살며 굽어보고 우러러 보아 나라의 형세와 백성의 고통을 살펴보고 탄식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 오늘 전하께서 밝게 보았는가 아니면 어둡게 보았는가에 따라 앞으로의 정치가 성공할지 아니면 실패할지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살펴주십시오. 삼가 소(疏)를 올립니다.” 『남명집』 ‘무진봉사(戊辰封事)’
그리고 4년 후인 1572년(선조 5년) 2월8일 조식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산천재 뒷산에 묻혔다. 이때 조식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 칭호(稱號)를 ‘처사(處士)’라고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식은 평생 자신의 뜻과 의지가 산림의 처사(處士)에 있었음을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조식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평소 차고 다녔던 칼과 방울은 어떤 제자가 물려받았을까? ‘의(義 : 의로움)’을 상징하는 칼은 내암(萊菴) 정인홍이 물려받았고 ‘경(敬 : 공경함 혹은 두려워함)’을 상징하는 방울은 동강(東岡) 김우옹이 물려받았다.
특히 정인홍은 스승의 유지를 이은 ‘강우학파’의 맹주 대접을 받았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후 권력을 잡은 북인(北人) 대북파(大北派)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西人)들에 의해 ‘역적의 수괴’라는 혐의와 누명을 쓴 채 비참한 죽임을 맞게 된다. 그런데 정인홍의 죽음과 더불어 조식의 학맥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조식의 문하생은 곧 대북파이고, 대북파는 곧 역적이라는 등식이 조정(朝廷)과 사림(士林)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황이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유학자로 찬사를 받는 동안 조식은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