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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토종들의 호미질을 어떻게 엮어낼 수 있을까
강병철(소설가)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맑고 청량한 초가을 햇살’.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문장가들끼리 저마다의 화상으로 킬킬대며 막걸리잔 나누는 풍경을 나 혼자 수도 없이 그려보았던 것 같다. 저무는 햇살 아래 둥근 술상 넉넉하게 차린 다음 와장창 때려먹고 싶은 맘씨 좋은 욕심이다. 소채류와 기름기가 어우러진 술상에 시인의 밑그림으로 문장과 술과 욕설에 취해 여명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 미운 사람의 어깨도 보듬어주고 착한 벗들에게 알몸도 바치겠노라 히죽이죽 황홀하게 행복하기도 했던가. 안타깝게도 그들끼리 엇박자 날 때가 더 많아서 대개가 공수표가 되었음을 먼저 밝힌다. 혹자는.
‘싸우면서 애정이 돈독해지는 거여’
한갓진 소리로 달래기도 했지만 나는 골목길 모퉁이에서 상처의 대못을 빼내지 못해 오래도록 훌쩍훌쩍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울울청년의 시절, 숱한 술상을 엎으면서 그렇게 꺼이꺼이 쏜살같은 세월 보낸 것 같다. 이제는 머리칼에 서리 내리고 등이 굽으면서 조금은 넉넉해질 시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면서 아, 오랜만에 그리움의 실체들을 들춰보는 것이다.
먼저 깊은 스승 조재훈 시인이다.
그는 폐선 밑바닥으로 만든 벽걸이 액자다. 수평선을 응시하는 몸짓 그대로 서 있으면 그가 망부석처럼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까 봐 나는 노을에 물든 살살이꽃 모양으로 움찔움찔 곁눈질할 수밖에 없다. 멀리는 단조롭지만 다가설수록 복잡다기한 산맥, 그를 제대로 만나겠노라 언저리만 빙빙 돌며 40년 세월이 흘렀다. 그랬다. 스승은 제자보다 훨씬 젊은 연배부터 진보의 산맥이었고 나는 이순(耳順)이 되도록 행동대원으로 빠릿빠릿 돌멩이 옮기는 중이다.
80이 다가오도록 시집 『겨울의 꿈』 『저문 날 빈 들의 노래』 『물 또는 불로』 『오두막 황제』 등 겨우 손가락 꼽을 정도의 시집을 내었으니 과작인 편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절대로 아니다. 그의 책장에는 최소 수천 편의 시가 흐트러져 있으니 더러는 책꽂이에 끼워져 있거나 짓눌려 있거나 장롱 받침대나 마른 쥐오줌에 묻혀 구겨져 있다. 누군가 달려들어 제대로 정리만 해줘도 금세 수맥이 터져 수십 권이 쏟아져 나오리라.
여기서 잠깐 스승의 집 구조를 폭로하면.
산성동 언덕바지 가택은 문을 여는 순간 책더미 소굴이다. 그 동굴은 두 사람이 비켜갈 수 없으므로 낮은 포복의 일방통행만이 가능하지만 그나마 책 냄새에 치여 마스크라도 쓰지 않으면 질식사할 할 판이다. 책 너머 세숫대야요 책 건너 요강뚜껑이고 등반하듯 고리를 걸고 책 담벼락을 뛰어넘으면 책으로 덮인 쥐구멍이므로 자칫 방자하다가는 책더미에 깔려 압사당할 수도 있다. 어느 해였던가, 아내와 새 해 인사차 들렀다가 침대 이외에 세배할 공간이 없어서 신고배 상자만 하나 달랑 놓고 온 적도 있다.
이승에 놓아둔
무거운 빚을
아직 머리에 이고 계신가요
수척한 산등성이에
숨어 오셔서, 쩔룩쩔룩 숨어 오셔서
핏덩이로 남긴 막내가
배다른 형제들 틈에 끼어
어떻게 섞여 크는가
수수깡 울타리 속에서
배곯지 않는가 보려고
핏기 없는 얼굴로
서성거리고 계시더군요.
(중략)
-「겨울 낮달」
그 유년은 홀로 삭이던 한밤중 배경부터 시작된다. 집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던 아낙은 그렇게 하염없이 사립문만 바라보다가 굴뚝 연기로 달궁달궁 떠올라 낮달 붙박이로 새겨졌으니, 그만큼 무겁고 짙어졌으리라. 산비탈 어디쯤에 어린 동생 묻고 돌아오며 듣던 고즈넉한 여우 울음의 스크린도 복사꽃 상처로 오버랩 된다. 이따금 동치미 국물 한 사발로 신열을 달래던 소년의 가슴조차 그지없게 울멍하니, 그의 사연은 왜 그리도 지난한가. 깊고 어두운가.
배곯은 얕은 산자락에
모처럼 햇살이 철철 넘쳐
여우 새끼 치는 애장 넝쿨 따라
까르르 깔깔
긴긴 해 용천배기 간지름 치는 소리
간 빼먹는 소리
「풀꽃」전문
가까이 있어도 머나먼 당신.
그렇게 망망 바라만 보다가 느닷없이 껴안은 채 뒹굴고 싶어서 어금니 갈아마시며 조선낫 품기도 했던가. 푸르스름 날 선 낫으로 팔을 쌍둥 잘라내면 그저 멀뚱멀뚱 바라볼 스승의 품격이 무시무시하다. 언제부터였나,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는다. 저만치서 하늘바라기로 곁눈질도 주지 않는 그의 모습도 감히 못 본 척 스쳐 지나간다. 그럴 수도 있다. 강물은 강물대로의 흐름이 있고 시냇물은 시냇물대로의 흐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달래며 곱씹는다. 삶이 별게 아니다, 곱씹으면서도 밤이 되면 눈물이 흐르는 그 이유를 나는 확실히 안다.
나태주 시인은 야무진 울보다.
30년 전쯤 후배 시인 이재무와 벗 공주의 벗 조성일의 집에 갔다가.
금학동 뒷산 생태공원까지 행보했던 젊은 날은 아마도 5공화국 신군부정권 즈음이리라. 예전의 지막골 수원지 뒤로 나무꾼들의 집터가 시커멓게 남아 있는 그 자리다. 수원지 근방 솔숲에 지게목발 받쳤다가 저물녘 제민천 오일장에 내려와 나뭇단 팔아 조양성냥갑이나 양잿물을 바지게에 올려놓고 작대기 두들기며 돌아왔다던 그 마을은 폐허처럼 고즈넉했다. 빈 바지게 가랑이에 대롱대롱 매달은 고등어 한 마리는 아궁이 곁불로 온가족 비린 반찬이 되어 저녁 밥상에 오를 것이다. 집터가 사라진 그 자리는 지금 수풀만 울창하여 멧돼지 가족이라도 만날 판이다.
후배 시인은 돌아오는 금학동 봄날의 골목길에서 ‘나태주 시인의 집’이라며 문패를 가리켰다. 개나리꽃 노란 물감 허공에 번지는 울타리를 보며 그의 시 ‘대숲 아래서’를 떠올리기도 했다. ‘물에 빠져 머리칼 행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를 외우며 시인의 풍경을 그려보던 젊은 날의 발자국도 기실 지척이다.
교과서 수록 시인 나태주.
아주 젊은 나이부터 명망있는 시인이 되었으며 긴 세월 전국구 멤버이자 지역구 좌장의 자리를 동시에 걸머진 그의 시집은 수십 권이다. 또 있다. 모든 지인들이 그가 저 세상으로 가는 줄 알았던 사태다. 진짜다. 그는 43년 성상의 교단을 마무리하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돌연사의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장례준비위원회까지 꾸려진 상태에서 소생했으니, 역시 그만의 특이한 이력이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대기했던 가족들을 ‘여러 날 그들은/ 비를 맞아 날 수 없는/ 세 마리의 산비둘기였을 것이다’라고 환생의 소감을 표현했다. 그 후 예전보다 행보가 더욱 왕성해져서 공주시 문화원장으로 활동 중이며, 요즘 그는 자전거를 새롭게 배우는 중이다.
(전략)
8.
그 계집애, 가물가물 아지랑이 허리를 가진,
눈썹이 포르스롬 풋보리 같은
그 계집애 새봄맞이 비를 맞은 마늘촉 같은
안개 지핀 대숲에 달덩이 같은
9.
유채꽃밭 노오란 꽃 핀 것만 봐도 눈물 고였다
너무나 순정적인 너무나 맹목적인
아, 열여섯 살짜리 달빛의 이슬의
안쓰러운 발목이여, 모가지여, 가슴이여
-「막동리 소묘」
청보리 숨소리가 가슴에 젖어 눈물고인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니 시인은 과연 보리밭 숨소리를 어떻게 들었다는 것인가. 겨우내 비워둔 시인의 술잔에 봄비가 조근조근 속살거려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살을 씻는 댓잎의 노래가 비워도 비워도 자꾸 넘치는 것이다. 오 - 산지사방에서 터지는 자음과 모음의 교배 소리라니, 뻐꾸기와 물안개의 합종이라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 전문
이 문장이 텔레비전의 ‘드라마 학교 2013’의 <가혹한 교실>에서 낭송되면서 국민 시가 될 판이다. 정지용의 「호수」나 안도현의 「연탄불」처럼 웬만한 사람들이 모두 외우는 짧은 메시지가 명징해서 좋다. 나도 영어듣기평가 오픈방송에서 시인의 문장을 들으면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정낙추의 시는 ‘기억력 저 편 우물’에서 시초한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글이란 제발 무엇이기에 우리들을 이토록 후벼놓고 떠나지 않는가?’ 그런 화두의 해독에 시달리며 밤이면 밤마다 힘들어했다. 아내와 함께 만리포 근방 모항항에 방문했을 때 그는 풀밭에 오줌을 누면서.
“나는 아무래도 지역 작가인갑다.”
자조적으로 던지기도 했다. 여기서 지역작가란 제발 무엇인가?
열심히 글을 써서 열량과 생산물이 넘쳐흐르면서도 중앙문단과 연이 무심한 벗이 있다면 공주의 이걸재 소설가, 좌도시의 길일기, 안용산 시인 그리고 『흙빛문학』의 임명희 선배와 정낙추 시인다. 그들은 대개 골짜기 외딴집에서 밤을 새워 글을 쓰는 스타일이지만 문단 행보에서 숨겨져 있는 만큼 글과 삶이 모두 귀하다. 청탁도 오지 않으며 청탁을 부탁하지도 않는데 하염없이 글만 쓰는 것도 그들의 숙명이다.
짧은 가방끈 탓이 가장 크고 더러는 ‘좋은 글을 쓰면 좋은 평을 받는다’는 외고집 탓이기도 하다. 특히 정낙추가 가장 느리다. 삶이 진부하던 서른여덟 어느 날 처음 시라는 것을 써보았으니 그 시초는 분노와 기억력의 소산이다. 땅만 파던 그해 가을, 왜 대상없는 분노가 솟구쳤는지, 그 분노를 달래기 위해 하필 글자를 택했는지 그도 모른다. 흔히 전원시라 일컫는 전형적 문장인 ‘황금빛 들판’이나 ‘주렁주렁 열린 홍시’나 ‘고추잠자리’ 같은 단어가 미워서 그도 한번 집어던져보았다나 어쨌다나.
하늘바라기 자잘 논 서 마지기
산비탈 쑥 덤불 뙈기밭
그 끈을 놓지 않으려고
소작농 祖父는 풀처럼 살았다
자손처럼 늘지 않는
찌그러진 살림을 허기로 움켜쥐고
한 뼘 농토를 늘리려고
흰밥 한 사발 멀리 했어도
눈 감을 때까지 상투를 자르지 않은
고집 센 풀이었다
(후략)
- 「풀의 역사」
1989년 『새농민』 잡지에 투고한 이 시를 보라. 처녀작 문장 속에 뙤약볕과 폭우가 있고 평생 땅만 파먹는 사람들 역사가 있었으니 천상 원조 반골기질이다. 그래봤자 그때까지는 투고작 모퉁이에 실린 두르뭉슬한 시평을 몰래 살피며 가슴 쓰다듬는 초짜배기였단다. 그러다가 우연히 태안지역의 종합지 『흙빛문학』을 만나면서 그는 설렘에 빠진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글을 함께 쓰자고 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때까지 문학 행위란 게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만 하는 건 줄 알았으므로 참여 여부를 한참 동안 망설인다. 온종일 농토에서 삽질만 하다가 저물녘에야 글자 수를 맞췄으니 돌파구가 그리 우직할 수밖에 없다. 이후 그도 문학과 문학인에 대한 외경심을 조금씩 수정하기도 했으니 안타깝고 다행스럽다.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느냐고 바람이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서쪽으로 돌린다
해가 저문 들판에서는
언 땅 풀리는 냄새가 풍기고
지난겨울에도 꺾이지 않는 마른 갈대가 비로소 허리를 접는다
하늘이 흐린 것은
눈물 탓
눈동자를 벗어나지 못한 메마른 눈물 한 방울을
망각의 강물에 던진다
사랑했던 날들이 있었던가
스러져가는 노을을 등에 업고 묻는다
미움을 키운 세월 앞에서 실어증에 걸린 젊은 날은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지만 이미 해는 기울었다
어제는 멀리 달아나고
먼 날은 거울처럼 선명하다
무수한 농담과 진담 사이에서
길을 헤매던 시절이 차라리 좋았다
넘어져도 길을 만들 수 있었으니
모든 길이 훤히 보이는 건
제 길만 다니는 산짐승처럼
정해진 길을 가야 한다는 통보다
그 길의 끝자락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生의 계약서를 들춰보며
옆구리 한쪽 빈자리를 담담한 손길로 어루만지려 해도
마음이 먼저 휘청거린다
-「生을 배웅하다」 전문
그가 믿는 것은 ‘기억은 늙지 않는다’는 그만의 진리다. 열 살의 봄, 몰래 어머니를 미행하던 기억 속의 풍경들 역시 육신이 쇠하도록 그대로다. 영글던 언덕과 찔레덤풀, 베적삼을 입은 어머니는 까칠까칠한 몰골이지만 앙가슴 팡팡한 새댁의 시절이었으니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이제 어린 주검이 묻혔던 그 언덕은 이제 아파트 단지가 되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이라 명명했던 유년의 기억은 소멸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다.
늙어가는 몸이 늙지 않은 기억을 꺼내본다. 그러니까 기억의 복원은 연상(聯想)놀이의 연장이다. 논두렁밭두렁에 매달리면서도 접한 시에 관련된 이미지와 기억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갓길 내내 중얼거렸으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메모에 시달렸단다. 일하는 손발과 생각하는 머리가 따로따로 놀다보니 툭하면 몸뚱이에 사소한 상처를 달고 다니면서도 마음만은 행복했단다.
“몸은 늙어도 기억은 늙지 않았으니 내게도 희망이 남아있을까?”
그 진단으로 그는 요즘 옹골찬 소설 작업에 빠지기도 했다. 단편집을 출간했고 장편소설을 쓰더니 모항면 갯마을을 배경으로 대하소설도 준비 중이다. 그러나 문단의 고질적 발목잡기가 만만치 않으리라 노파심으로 지켜보기도 하면서.
조재도는 돌부처 당초 사내다.
최루탄 앞에선 장작처럼 이글대었지만 신새벽 책상에 앉으면 서너 시간은 그대로 붙박이다. 그만큼 혼자 사는 것에도 익숙하다. 청년 시절 방위병 군복무를 하면서도 책을 읽기 위해 하숙생활을 자청했던 그다. 그래서일까, 그의 모습은 두 얼굴이다. 열혈청년이었던 격동기 젊은이 조재도 시인의 행보를 ‘70-80’ 언저리들은 아직도 적나라하게 기억하지만, 언제부터였나, 시나브로 잦아들더니 어느 새 동굴 바깥에서 그의 모습을 잊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월이다. 한 시대, 투사의 머리카락에 내린 서리를 보며 만감을 교차시키는 것이다.
그와의 인연은 85년 『민중교육』지 창간호 발간 직후였으니 루카치식 ‘별을 보는 사내’가 되던 그 즈음이다. 무크지 『민중교육』에 그는 ‘너희들에게’ 외 몇 편의 시를 실었고 나는 소설 ‘비늘눈’을 발표했으니 중앙매체로의 첫 얼굴 내밀기인 동시에 신산의 시발점인 셈이다. 서점마다 반향을 일으키던 그 무크지는 서울 여의도 某고등학교 교장이 그 주제의 불순함을 서울시 교육청에 의뢰하는 바람에 매스컴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찌라시언론은 하이에나처럼 낚아채면서 불온교사가 정부를 전복한다며 나팔을 불었다. 여기저기서 갈고리 찍는 하수인들이 뒤통수에 돌멩이를 던지더니 마침내 열일곱 명의 교사가 학교를 쫓겨나는 필화사건을 연출시켰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일까. 그 분노가 그의 필봉을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이다.
(전략)
농사꾼이 될지 운전수가 될지
공사판 벽돌 나르는 노동자가 될지
모르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이 시대를 지탱해 가는 모든 힘들이
버려진 사람들, 그 굵은 팔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공무원 관리는 되지 못해도
어버이의 기대엔 미치지 못해도
동강난 강산 하나로 이을 힘이 바로 너희들
두 다리 가슴마다 깃들어 있기에
나는 믿는다, 통일의 알갱이로 우뚝우뚝 커가는
건강하고 옹골찬 너희 어깨를.
-「너희들에게」
85년 첫 해직시절 그는 내가 사는 홍도동 시영아파트에서 드믄드믄 하루를 유(留)하기도 했다. 벗들이 삼겹살을 사줄 때마다 ‘돈으로 주었으면’하는 소리를 목구멍에서 꿀꺽 삼켰단다. 그 돈으로 수백 장의 유인물을 만들면 더 많은 사람들을 견인해낼 수 있지 않은가, 토로할 때는 형광등도 끔먹끔먹 숨을 멈췄다. 꺼칠한 수염으로 어깨를 내린 채 계단을 내려가던 뒷모습을 보며 마침내 나는 울컥했다. 추석을 앞둔 초가을 어느 날 고향과 어머니를 찾는 난감함을 짧게 토로했던 기억이 아직도 쟁쟁하다. 그 피붙이들도 이제는 구천에서 초로의 아들을 지켜보는 중이니, 아, 무정하다. 하늘이여.
속리산 문장대 푸른 하늘을 바위 날망에 걸어두고 발걸음에
닿은 돌계단을 내려와, 골짜기 어느 한 귀퉁이 잠시 쉬어가려
하는 참에 가재를 보았다. 앞뒤 물길 끊기어 절해고도 같은
물웅덩이. 나뭇가지로 가라앉은 낙엽 가만히 헤적이니 세상을
등진 듯 한가하게 고요와 침묵 버무리며 살아가는 가재들이
나와 스르르 바위 틈에 숨어버렸다.
숨어사는 것들의 시린 흔적을 보았다.
- 「가재」
배고프던 시절의 타오르던 눈빛.
이제는 그의 눈빛이 예전처럼 노여움으로 타오르지 않는다. 들여다볼 때마다 우물처럼 후엉후엉 울린다. 나뭇잎처럼 가벼워진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가 시대의 짐을 훌훌 털어낸 줄 알지만 기실 꾹 다문 입의 정체성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아무도 함부로 문을 두들길 수 없으니 그저 베일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침이나 삼켜야 한다. 나는 여전히 그가 두렵다.
유용주의 동선은 크고 투명하다.
얼핏 직선처럼 보이지만 기실 부드러움에 더욱 강하다는 소문은 고주망태까지 가본 사람만이 안다. 문제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나뭇꾼 발자국 소리가 쿵, 쿵, 쿵 울린다는 점이다. 중년의 어느 서점에서 그의 산문집 「그러나 살아가리라」가 MBC 느낌표 도서로 선정되면서 태풍경보 싸이렌이 터졌다. 단칼에 기십만 부가 팔리는 열풍이 몰아치면서 나 역시 충청도 문사 대열의 뜨거운 박수 부대에 동참했으나 그날 밤 쬐끔은 허허로웠음도 밝힌다.
진저리치며
내 너에게 달려갔으나
싸늘한 새벽 하늘
먼 골짜기 바람 한웅큼 만나는 것으로
되돌아왔다.
얼마나 긴 오장육부를 쥐어뜯어야
이 울음 끝이 나는가
내 육신 굳어 바위가 되고
바위 부스러져 재로 변할 때까지
이 노래 멈출 수 없다.
이 피울음 그칠 수 없다.
- 「종(鐘)」
서산여중 재직시절이니 15년 전쯤,
그와 나는 수시로 터미널 근방 자모산부인과 담벼락 아래 친구네 포장마차에서 쏘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는 음주운전으로 나를 집에까지 바라다 주곤 했는데 집의 방향이 나의 반대쪽인 게 종시 찝찝했다. 그러나 대개 ‘형, 암 말도 하지 마.’ 하고 우직하게 액셀을 밟는 기세에 눌려 그의 행보대로 움직였는데, 하필 기우가 현실이 되었다. 동문동 대림아파트 근처에 야광방망이를 든 전경 예닐곱 명이 우르르 앞을 막는 것이다. 나는 아차, 싶었는데.
“형, 걱정 마. 가만히 있으면 돼.”
순간적으로 나는 정말 그가 무슨 투명인간 탈출 비법을 가지고 있거나 승용차 공중부양 타법이라는 부리는 줄 알았다. 일단 입에 붙이는 음주측정기를 거침없이 부는 포즈에서 뭔가 그만의 히든 카드가 있는 줄 알았다. 알콜농도 0.146인데도 그는 여전히 핫핫핫 웃으며 경찰차를 탔다. 그리고 면허취소 2년에 벌금 150만원(2002년 물가)을 먹었다. 경찰서에서도 그는 아내 김선희 선생에게.
“걱정 마. 다 처리했어.”
그렇게 안심시켰지만 이튿날 나는 40만 원짜리 2개월 부은 적금을 깨어 절반을 채워줬다.
네 앞에서는
차마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
눈은 물을 찢고 피어난 꽃이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기침 언 손으로 틀어막고
너에게 간다
비틀거리며 간다
- 「눈보라」 전문
그는 짧은 가방끈을 채우기 위해 정동제일교회 ‘배움의 집’을 통해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시켰으며 군대 시절 국문학과 출신 쫄병이 오면 옆에 바싹 붙어 문학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의 틈새에서 시를 썼으니 시집 『오늘의 운세』가 헌 책방 골목에서 백낙청 교수의 눈에 띠여 그의 작품 할동에 박차를 가한다. 『가장 가벼운 짐』『크나큰 침묵』, 산문집『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장편 소설『마린을 찾아서』등 열댓 권을 펼칠 때마다 들소떼처럼 지축이 흔들리니 그게 운명이요, 몸뚱이 소통의 소산이리라.
식당종업원, 생선가게, 보석가게, 신문팔이를 거쳐 조치원에서 술집 지배인을 하면서 청순한 여대생을 만나 결혼에 골인하니 그의 이력은 모든 게 드라마틱하다. 그 후 목수에 이르기까지 그의 몸은 밥이요, 신앙이요, 소통 통로였고 구원이었다. 세상의 급소를 찾아 못을 세우고 망치를 내리치며 그 도정만큼 시를 쓰므로, 그의 문학은 가난과 노동에의 결합이 된다. 엇박자 운명, 거듭 배반당하는 희망을 늘 주제로 삼으면서도, 배배꼬인 곳이나 막힌 곳이 전혀 없다.
이정록은 문장 조련사다.
만상의 글자들을 눈빛으로 제압하는 유격장 조교풍 사육사이다. 그가 호루라기를 입 물면 해체되었던 글자들이 오그르르 헤쳐모여 통닭구이나 원산폭격 준비를 한다. 그가 손가락질로 ‘저기 산등성이 너머로 보이는 전봇대까지 선착순’ 하고 뻥끗하면 뻉뺑이를 돌고온 ‘벌레의 집’이나 ‘앉은뱅이 의자’, ‘주름진 풋사과’나 ‘제비꽃 맹랑 여인숙’들이 시끈시끈 벌겋게 줄을 선다. 검증이 시작되면 단어와 활자판들이 꾀 벗은 채 저마다의 코디로 바쁘다.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그 집,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갈 때 되면 그제야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연탄」
글쟁이 중에는 그 판이 아닌 데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무능한 부류가 있고 반면에 이도 저도 다 후려 먹었으면서 하필 글판에 끼어들어 하필 벼룩의 간을 꺼내먹는 잔혹사 부류가 있다. 내가 전자이고 그가 후자이다. 아무튼 그는 노래건 그림이건 운동이건 죄다 ‘진짜 프로 내지 세미 프로’급이다. 남인수 노래로 좌중을 울리고 웃기고 고우영 만화를 거침없이 그려내면서 곱상한 얼굴로 작가회의에서 가장 큰 알통을 소유한 사내, 게다가 타고난 변론까지 꿰고 다니니 도대체 그가 꿰려는 구슬더미는 몇 꾸러미인가.
솔직히 나는 성분이 훈장 집안의 교장님 아들 출신이지만 첫 인상마다 하층민 대접을 받는 체질이고, 그게 쬐끔은 자랑스럽다. 택시기사들은 나를 공사판 잡부로 모셨고 역전앞 형사들은 불심검문 단골손님으로 찍어보곤 했다. 80년대 역전 광장에서 여섯 명의 친구들이 룰루랄라 통키타를 퉁기고 있는데 하필 내 옆구리만 찌르며 주민등록증을 요구하던 형사의 심중을 지금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정록은 완전 반대다. 안경속 눈빛부터 피부까지 모두 팽팽하다. 하지만 무늬만 부잣집 도령의 생김새일 뿐 60년대 평범한 농투산이의 생산품이었더란다. 여고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태안여상 자주색 오바를 얻어입고 봄나물 캐더라는 누이의 보릿고개 사연부터 아리고 시리다. 10여년 전 언제였던가. 유용주 시인과 홍성에서 청양 쪽으로 넘어오는 직행버스 앞좌석에서 문득.
“형 저게 이정록네 집이야.”
나는 무심한 척 곁눈질로 아스팔트 너머 시인의 생가를 재빨리 훔쳐보았다. 슬레트와 기와를 걸친 농가들이 미루나무 사이로 모양을 드러내다가 사라졌다. 자세히 입력시키지는 않았지만 고개만 몇 차례 주억거렸다.
간경화 십 년에
덤으로 설암까지 얻었구나
김내과 원장이 그러더라
내 진료 카드가 가장 두툼하다고
아들보다 먼저 책 한 권 썼다고
골려대는 것 같아서 내가 퉁 좀 놨다
내가 쓴 게 아니고 원장이 쓴 거라고
주인공도 못 읽게 왜 영어로 쓰냐구
껄껄 웃으며 그러더라
오래 살 테니까 걱정 말라고
병도 재미 보자고 오래도록
함께 살 거라고
-「영어책」
그는 초등학교를 이태 빠른 여섯 살에 입학했다. 농투산이 부부가 노동의 효용성을 위해 골치덩이 하나를 슬쩍 학교에 맡겼을 것이다. 그 어린 나이 탓에 동기생들에게 꽤나 치였을 것이다. 대학 입학 후 재수, 삼수생 출신들을 만나면서 정진혁, 류지남, 하재일, 김상천 등 동기생들과의 나이가 서너 살 차이로 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이 정리가 주특기였던 나의 조급증이 ‘동기끼리도 위 아래가 있다’는 투로 ‘불편한 동거’에 끼어들었다. 그는 단박에 그동안 친구로 지냈던 나이배기 동기들에게 호형을 붙여줘서 괜시리 내가 민망해졌지만 일주일 후 쯤 공주 중동 2층 선술집에서 벗 가덕현과의 술자리였는데.
“여섯 살에 국민학교 들어간 건 부모님이 들이민 거요. 두 살 더 먹은 친구들에게 당연히 말을 놓고 지냈고 중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오. 그게 대학까지 연장된 건데 왜 하필 형님이 정리하쇼?”
근데, 이 많은 것들이 언제 내 머릿속에 처박혔나?
이마는 어느 새 평상처럼 넓어졌나?
가슴 속 잡것들은 다시 옥상에 기어올라가려고, 불끈불끈
내 런닝고는 누가 이리도 잡아당겼나?
어떤 싸가지가 수박씨를 날리는 거야?
고개 들어 텅빈 옥상을 두리번두리번
- 「옥상이 논다」부분-
나는 상위 10% 수준의 주량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술꾼이다. 그런데 안 되는 부류가 있으니 그건 밤새 마시고도 해장술에서 낮술로 이어지는 질긴 화상들이니 이정록, 유용주, 김희정, 권덕하, 황재학 그리고 망자 윤중호와 벗 임우기 등이다. 도대체 밤 1시 넘어 귀가하면서까지 왜 남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
최은숙은 스물다섯 해 고락을 함께 했다.
2012년에는 충청도 안식년 교사 틈에 끼어 스칸디나반도 유람에 올랐었고 연희문학창작촌의 작가들 틈에 3개월 간 섞여 술판과 이야기판으로 이슥하기도 했다. 그미의 글은 네 개의 검인정 교과서에 수록되어있는데 모두 산문이다. 국정교과서 시대에도 한 편이 실린 적이 있고 검인정으로 넘어와서는 네 가운데에 실렸으니 교과서 저자 체질이다. 연희문학창작촌에 있을 때 김이구 작가가 최은숙의 글이 또 창비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고 해서 나 역시 함박꽃 웃음을 지었으나 쬐끔은 울멍에 젖었음을 밝힌다. 내 글 ‘잘 가라 내 이빨’은 최종심에서 떨어졌다고 하니, 왠지 내 팔자는 교과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리라.
입원한 어머니 속옷 챙기러 친정에 갔는데
집 비운 사이
산고양이 내려와 몸 풀었던지
마루 귀퉁이에 새끼고양이 두 마리
곰실거리고 있다
곤한 해산을 지켰던 것일까
마루 앞까지 다가와 까치발 세운 건 강아지풀
던져 둔 땔감나무에 돋아난 버섯과
펌프 우물가의 푸른 이끼며
삭아 내리는 것만 같은 삶 어디에
생명의 씨톨 깃들었던 것일까
처마 아래 삼줄 드리운 빗소리
눈물이 난다
-「집 비운 사이」전문
충청도 대평리 어디쯤 빈 집에서 몸을 푼 산고양이의 새끼들 풍경이다. 이제 막 햇살을 만난 갓난 몸뚱이 주름진 솜털 알몸이 햇살을 받아 조물락조물락 펴지는 중이리라. ‘강아지풀’과 ‘땔감나무에 돋아난 버섯’과 ‘우물가의 푸른 이끼’들까지 새로운 생명을 조마조마 지켜본다. 처마 아래 드리운 빗소리를 삼줄로 읽어내는 눈빛이 천상 국민 모친이요, 누이요, 누나의 품이다.
이번에는 옥수수 수염 흔들리는 그 밤 푸른 콩깍지 수북한 암소 구유에서 만난 해산달이다. 암소의 해산보다 먼저 몸을 푸는 수박덩이 그 틈에서 옷섶 여는 수박 잎새며 꽃잎 입술 아기 수박까지 왜 하필 최은숙의 품에서만 노는 것일까. 그뿐인가. 암소와 셋방살이 새댁도 첫 출산을 준비 중인데 그 속에서 보리수와 수박밭과 샘물소리를 섞어 넣는다. 봄날의 출산이 그렇게 거창한 하모니로 우르르 일어설 것 같다.
주인 할머니가 변소를 쳐내
나는 막걸리를 받아 왔다
막걸리 냈다고 할머니는
세곡리 잔칫집에서 얻어 온
돼지 혓바닥 삶았다
김이 설설 오르는데
먼저 알고 달려드는 파리
탁 때려잡고 설죽은 건
엄지로 꾹 눌러 비빈 뒤 그 손으로
고기 한 점 소금 찍어 주신다
이쪽 요만큼은 간인디
돼지 간이라도 뜨거울 땐 먹을만햐
밥 푸는 것처럼
변소 밑바닥까지 휘저어
채소밭 골고루 거름 얹고
담배 한 대 피워 물면 그만
똥이나 파리나
당신 손에선 더러울 것 없어
그 손 알아보는지
푸성귀도 짐승들도
뽀얀 살이 오른다
「변소 푸는 날」전문
문득 떠오르는 젊은 날의 스크린 하나.
나는 결혼식 날짜를 잡아놓은 노총각 해직교사였고 그미는 핸드백에 시집을 넣고 다니는 풋보리 여대생 즈음이다. 우수마발이 섞인 자리에서 1,2차를 끝냈고 대전시 홍도동 슈퍼에서 입가심 맥주를 마시고 그미의 자취방 근처까지 바라다 주던 이슥한 밤이다. 마지막 골목길 2층을 향해 동생 이름을 부르더니 몸을 돌려 ‘안녕히 가시라’며 허리를 숙인다. 그 순간 생머리가 우수수 쏟아지는 것이다. 아름답다. 그 청순한 머리카락의 기억을 선명하게 간직하다가, 언제부터였나, 몸피가 쇠하면서 잊혀진 스크린을 가끔 끄집어낸다. 그때 골목길에 쏟아놓은 그미의 생머리는 아직도 남아있을까.
박미라의 시에는 여전사의 고독이 있다.
그미는 등푸른 고등어 체질처럼 마음이나 문장까지 자유자재로 짱짱하다.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같은 신여성 부류는 전혀 아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해법이 전광석화 같으니, 솔직히 말하면 문사 중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시인이다. 웬 야수떼들이 번쩍번쩍 들고 메쳐도 인형처럼 웃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특유의 잔주름으로 짯짯이 관찰하니 그게 연륜의 섬세함이다.
(전략)
누군들 혼자서 불러보는 이름이 없으랴
파도 소리 유난회 흑흑대는 밤이면
그대 저린 가슴을 나도 앓는다
바다는 다시 가슴을 열고
고깃배 몇 척 먼 바다를 향한다
돌아오기 위하여 떠나는 이들의 눈부신 배 위에서
고단한 날들을 적었다 지우며 반짝이는 물비늘
노을 한 자락을 당겨서 상처를 곷으로 만드는 일은
아무렴, 우리들 삶의 몫이겠지
낡은 목선 한 척으로도
내일을 꿈꾸는 만리포 사람들
그 검센 팔뚝으로 붉은 해를 건진다
천 년 전에도 바다는 쪽빛이었다
- 「만리포 연가」
정낙추 선배의 술추렴 따라 만리포 해수욕장 바위에 새겨진 그미의 시를 오래도록 되새김질했다. 모진 바람에도 끄떡없는 바위 글자로 패이고 싶은데 외로울 때마다 손짓하는 시인의 여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마른 모래 바람이 가슴을 쓰는 날이면 거품을 만나러 오라는 종용이 그냥 예사로운데도 자꾸 뚜렷이 각인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른 가슴이 폭폭하거나 저녁놀에 젖은 쏘주가 고프면 찾아가야 한다. 해무 속에서 슬픔을 가늠하는 붉은 등대와 닿을 수 없어서 더욱 간절하다고 아득히 잦아드는 섬을 떠올리며.
(전략)
날마다 똑 같은 빵을 굽고 똑같은 맹세를 거듭하지만
내일도 빵을 굽겠다고 맹세하는 여자
자신의 맹세를 확인하듯
천천히 빵을 뜯어먹는 여자
돌처럼 굳은 빵 덩어리를 징검다리 삼아 전생으로 놀러가기도 하는
발효를 끝낸 얼굴이 빵처럼 다정한 여자
아마도 몇 생을 두고 내 이름을 부를
지긋지긋한 여자
세상에는 생각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말이 아직 있어서
굳은 식빵 곁에서 입술 깨무는
먼 곳의 여자
- 「빵에 대한 맹세」
빵에 대한 서사는 기실 뭇벌들의 목숨 건 맹세보다 훨씬 치열하다. 그런데 이 생생한 맹세도 순전히 TV 다큐를 보고 쓴 거라니 그게 상상력의 무한 확장이다. 시인의 체험이 아닌데도 이리도 리얼하니, 까르르 터지는 웃음 속에 숨겨진 깊은 그늘이 얼마나 선명한 것일까. 그만큼 문장들이 깊고 품격이 크다.
그러니까 그미가 잡은 것은 벼랑 끝에 핀 꽃이 아니라 그 위로 서성이는 절벽 바람이다. 더러는 꽃 이파리를 차돌로 변신시켜서 적당한 자리에 벽돌처럼 쌓아놓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가슴에 품은 씨앗들이 우우 문풍지를 두들기기도 한다. 오래도록 깨문 빵이 단맛도 느끼지 못한 채 꼴딱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단정할 수 없으니 더 가까이 다가서서 그미와 시를 만나야 할 것 같다.
이진수 시인은 맏형 스타일이다.
그는 「그늘을 밀어내지 않는다」라는 질펀한 시집에서 이미 묵언의 행보를 보여주었다. 과묵하고 행간이 많은 그는 청양의 터줏대감이고 충남작가회의의 지회장으로 100명의 회원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보이면서도 이렇다 할 표정이 없다. 농사꾼이자 신문쟁이인 그는 표정의 여유처럼 문장의 행간을 던지면서 해학적 슬픔을 배경으로 걸쳐놓으니, 눈물을 발견하는 접근 방법이 다르다. 가끔은 젊은 나이에 인생의 허무를 알아챌까 봐 두렵다고 하니 그의 가슴은 얼마나 심오한가.
오랜만에 조우한 동창생이 이차구차 끝에 아들 얘기를 하며 ‘또 보자’ 악수로 헤어지면서.
‘아이 돌 때 잊지 말고 연락해’
‘그래야지 그럼 당연히 불러야지’
그 순간 그의 가슴 한편으로도 갑자기 화악 불 들어왔다 ‘불러야지’ 하는 말이 순간적으로 ‘불 넣어야지’ 하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돌잔치집 옆구리 걷어차며 ‘술도 마시고 노래도 좀 불러라’ 했을 때 그 당부가 마치 ‘불 넣어라. 이 산 저 산 활활 지펴라.’ 하는 말로 가슴을 후볐으니, 청각의 시각화다. ‘불러라 노래 불러라’ 하는 동요가 생각나고 불 넣어 주면 금방 타오를 듯한 응원가를 아이 앞길에 훅훅 불어주고 싶었단다. 모태솔로처럼 독수공방의 그가 남의 피붙이에게 이토록 깊은 사랑을 전하다니.
부른다는 말이 이렇게나
뜨겁다는 걸 알게 해준 친구야
사람 사이만한 아랫목이 어디 있겠니
불 지피지 않으면
냉골이 되는 거지
가마, 꼭 가마
- 「부른다는 말속엔」
사물마다 요모조모 특별한 캐릭터로 좌중을 각인시키는 그의 버릇 탓이다. ‘먹는 배’의 꼭지에서 어머니의 배를 오버랩 시키니 그게 동음이의어의 연결성이요, 민중적 해학이다. 그냥 멍청하거나 속 터지는 익살이 아닌 민중의 건강한 근력을 담보한 해학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뒹구는 호박의 생김새 역시 쉽게 ‘둥글둥글한 호박’이라고 하지 않고 ‘둥글둥글하거나 둥글지 않은’ 이중적 모습 두 가지를 동시에 스케치한다. 그 각양각색의 놈들은 덜컹덜컹 여기저기 배치시키니 그게 민초네 가족의 사진틀이다.
비얌이 우예 센지 아나
내사마 모르겠다 우예 센 긴데
참말 모르나 그놈이 센 거는
껍데기를 벗기 때문인기라
문디 자슥 껍데기 벗는 거하고
센 거하고 무신 상관이가
와 상관이 없다카나 니 들어 볼래
일단 껍데기를 벗으모 안 있나
비얌이 나오나 안 나오나
나온다카고 그래 씨부려 봐라
그라모 그기 껍데기가 진짜가
시상 새로 나온 비얌이 진짜가
문디 시방 내를 바보로 아나
그기야 당연지사 비얌이 진짜제
맞다 자슥아 내 말이 그 말인기라
껍데기 벗어던지고 진짜 내미는 놈
그런 놈이 센 놈 아이겠나
넘 몰래 안창에다 진짜 감춘 놈
그런 놈이 무서븐 거 아이겠나
어떻노 니캉 내캉 홀딱 벗어 뿔고
고마 확 센 놈 한번 돼 보까
- 「센 놈」
그렇게 느릿느릿 다가와 진하게 달라붙는다.
또 있다. 이번에는 들똥을 누다가 주워온 수석을 세워놓고 착각 명상에 빠진다. 이상하다. 아침에는 하회탈처럼 보이던 놈이 저물녘에는 해골바가지로 변신하니 놈은 필시 생을 깨우쳐주는 요물이다. 돌처럼 무뚝뚝한 사물이 희비를 번갈아 연출하니 그게 의인화여 시점의 이동이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보여주는 게 모두 그렇듯 내면에의 착각일 뿐이니 새길수록 깊은 철학이다. 지켜보라.
(전략)
그때서야 나는 수석을 주운 것이 아니라 착각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네. 착각이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는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네. 이후로도 오래도록 착각 속에서 살게 되리라 예감하며 사람 형상의 그 돌멩이를 방구석 쪽에 밀어 두었네
- 「착각을 주었네」
의식의 흐름이 이렇게 깊은 착각을 갖게 한다는 것은 시인 스스로 소용돌이 사유에 몰입되어 있었다는 흔적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항상 기쁨과 슬픔의 내면을 동시에 혼재시킨다. 그 시적 진정성은 우물을 바라보는 수행의 깊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박경희 시인도 곱돌 같은 육담을 찾았다.
이준수의 육담이 숨겨진 해학이라면 이정록의 「어머니 학교」 나 「아버지 학교」는 대상화를 통한 발 빠른 체험적 해학이다. 전라도의 노익장 조기호의 시집 열여섯 권의 육담총체가 그렇고 예전의 젊은 시인 허수경이 소녀 시절이 그렇듯 저마다 서사의 모양새가 다르다. 그 중에서 박경희의 육담은 여린 문장이라는 점에서 새롭다. 풀리지 않는 시의 해법에 골몰하던 그미가 어느 날 홀린 듯이 말한다.
“시가 나에게 오셨어요.”
그 느끼한 멘트 이후 꺼풀을 벗고 탈바꿈했으니, ‘그녀가 그분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글밭에서 그미의 등장에 칭찬을 달기 시작했다. 공주의 터미널 찻집 커피나무에서 만난 녹색평론에 기고하는 사회운동가 박승옥 선배는 지금까지 만난 모든 시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시였노라고 나에게 고백한 적도 있다.
노인정에서 소주 두 병에 버선 벗어젖힌 구십 다 된 할매 두 분이
이년 저년 사발년 찾다가 아배 찾으러 온 나를 붙잡아 놓고
소주 한잔 따라주며 노래 한가락 뽑아보란다
술 못한다고 마시면 온몸에 불이 난다고 재차 밀치자
글 쓰면 술도 마실 줄 알아야지,
어데서 똥구멍 긁는 소리 벅벅 하고 있느냐는 말씀에
넙죽 석 잔을 들이켜고 부른 노래가 봄날은 간다인데, 간단 간다 하더니
기어코 취해서 아배 찾으러 왔다가 아배가 나를 찾아 업고 가다
돌부리에 걸려 밭에 고꾸라진, 노래
-「권주가」
그 미소가 수줍은 듯 고향집 구들장처럼 뒹굴뒹굴 육담을 던지니 그 또한 문장의 마술을 익힌 것이다. 해학 속에서 세사의 희비극을 수색하고, 접맥시키고 천연덕스레 풀어놓는 가족 서사를 통해서 미소보다 오래 남는 가족의 눈물 자국을 보듬는다. 또한 옛사랑에 관한 시편들에서는 기억의 방파제에 남은 짜디짠 소금기를 맛본다. 평론가 박정선은 박경희의 「벚꽃 문신」의 '이야기성'에 주목하며 이 시대의 교감적 이야기꾼 시인의 등장을 예견한다.
계 모임에서 옻닭 먹고 온 엄니 밭머리에서 게트림 길게 하고
연거푸 이를 세 번 닦았는데, 옻 안 타는 엄니
옻 잘 타는 아부지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다니던 엄니가 뒷간 들어갔다 나온 뒤,
아부지 들어가고 똥김도 빠지지 않았는데 그 위에 쭈그려 앉았다고,
밤새 간지러움에 뒤척이다가, 자 어매 여 좀 봐봐
엉덩이 까 보여주자 거시기며 엉덩이가 벌겋게 오돌오돌 옻이 올랐다고,
니미 어떤 인간이 옻닭 처먹었느냐고
똥을 싸도 날 지나 싸지 왜 내 앞에 싸고 지랄이냐고,
옻 똥김 지대로 맞았다고 사흘 밤낮 벅벅 긁다가 세들어 사는 집 살폈다는데
수시로 빤스 속에 손 드나드는 통에 동네 아낙 여럿 낯 붉어졌다는데
한동안 대숲 뒷길로만 다녔다는데,
말도 못 하고 쥐 죽은 듯 몸사리며 가끔 아부지 빤스에 손 집어넣고 원하는 곳
시원하게 긁어줬다는 엄니
-「말복」
경운기에 옷자락이 빨려 들어가 사투를 벌이던 아부지 사연들도 그래서 농익은 간장게장처럼 밥도둑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천연덕스럽게 풀어놓은 가족 서사의 한 토막을 통해 우리는 시 읽기의 재미를 맛본다. 그와 함께 ‘말도 못하고 쥐 죽은 듯 몸 사리며 가끔 아부지 빤스에 손 집어넣고 원하는 곳 시원하게 긁어줬다는 엄니’의 사연은 독자의 진지함 속에 푸하하를 터뜨리게 한다.
혁명을 품던 청춘에 만난 유지남이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으로 번민하다가 세상의 실체를 우지끈 돌파하려던 아픈 젊음의 즈음이다. 분하다. 공든 탑 푸른 꿈들을 잘근잘근 짓밟던 군홧발 시국의 기억이 수십 년 지난 지금까지 노여움을 걸러내지 못한다. 삼엄한 공포의 시국 도심 한복판에서 호루라기 불어 제키면 숨어있던 자라목들이 일제히 뛰쳐나올 것만 같아 밤마다 숨고르기에 지성을 모으던 젊음의 뒤끝이다. 그 어금니 갈던 혼돈 속에서 학교를 쫓겨난 것도 당연한 숙명이다.
그리고 4년 후 공주로 복직을 했고 거기서 시인을 만났다. 1989년 그해 곧바로 한반도에서는 1700여 명의 교사가 해직을 당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터진다. 시국과 전교조는 ‘질긴 놈이 이긴다’는 치킨 게임에 돌입했다. 당연히 청년교사였던 류지남 시인 역시 단두대에 목을 내밀었으나 시국의 칼날은 운 좋게(?) 그를 피해나갔고, 그 대가로 밤마다 꺼이꺼이 상처를 쓸어안아야 했다. 그 광풍의 사생결단은 한갓지게 ‘눈물 같은 소주나 축낼 로망’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차구차 ‘짤린 목 대책위원회’를 만들면서 차선의 명예를 찾으려 한다. 시장통 백락다실 3층의 전교조 사무실에서 조우했고 류지남, 전병철 이외에도 김상배나 가덕현 등이 떠돌이 도장을 찍기도 했다. 내가 먼저 원칙을 정했다. ‘문학을 명분으로 시국을 피해가지 않는다. 문학이 시국에 방해가 되면 가차 없이 손가락을 자른다.’ 그런 식의 규정 속에서 그들을 압도하는데 성공했으니, 내 입장으로선, 얻어맞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철 결의는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전략)
이렇듯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
실은 다 그대 때문이라는 것을
-「낯선 길」
그는 때로 연(鳶)과 같이 묶여 있다. 그 사내 역시 인연의 끈을 댕강 자르고 안식처에 들어가고 싶지만 ‘운명의 노끈’은 그를 구들장에 편안히 눕게 하지 않는다. 뿌리치지 못하는 게 한계이고 그게 인간성이므로 벗들은 무수히 그의 승용차를 얻어타고 다니며 안심하고 의지했다. 만취한 몸으로 승용차를 세우고 토악질하다가 물병처럼 무거운 머리로 뒤돌아보면 그는 장승처럼 우뚝서서 지켜보고 있다. 안심이다. 뿔테안경 너머로 쏟아지던 별들이 이물질 건더기 위로 반짝반짝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충남 홍성군 천북면 학성리
바다가 빤히 내다뵈는 학성초등학교
변소간에 쪼그리고 앉아 똥 누는데
이상하게 똥 냄새가 안 올라왔다
왜 그런가 곰곰 생각해보니
면소재지 큰 학교로 이사간 애들 따라
똥이란 놈들도 그만
죄다 이사를 가버린 거였다
-「폐교장 1」 전문
초로에 접어들면서 웬일일까, 그는 똥을 품기 시작했다.
똥이 곧 밥이고 하늘이기도 하거니와, 뭇 생명들의 존재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자양분이니까 반드시 그렇단다. 먹거리들이 몸을 지나는 동안, 밥은 똥으로 진화하면서 분비물의 일생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똥들은 다시 푸른 생명들의 소중한 밑거름으로 환원되어 인류의 엽록소로 환원시키니 그게 ‘우주의 질서’요 ‘대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니까 몸은 똥의 순환계보 속의 한 정거장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입보다 똥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이 될 수 있다면 그게 유토피아이리라. 그렇게 똥이 편안한 풍경을 빌려 한 수 적자면.
풀의 나라로
다시 돌아와 맞은
첫 봄
냉이, 머위, 자운영, 취나물, 두릅 순
이런 봄들이 한 철
내 몸을 돌보고 지나가자
내 똥이 그만 소똥 같아져
뒷간 가는 일이 참 즐거워졌다
-「내 몸의 봄」 전문
그는 훈장이면서 절반의 농부이다. 그래서 배나무 겨드랑이의 열매를 만들기 위해 봄부터 진딧물 전쟁을 치르고 소젖을 주무르고 경운기 시동을 건다. 과일 맛을 위해 똥장군 둘러메고 정화조 뚜껑을 열다가 참외씨를 만나게 또 한 편의 시를 생산한다. 그의 식솔들이 한 옴콤씩 키워낸 동동 뜬 씨앗들을 만나면서 우주를 발견해내니 그게 행간을 쓰는 시인들의 서늘함이다.
“저 똥을 먹으면 진짜 배가 많이 열리나유?”
일곱 살 아들이 팔을 벌리자 배나무가 먼저 고개를 끄떡이니, 천상 나무네 가족 핏줄이다.
이문복 시인은 한때 폭정의 시대에 맞서는.
전사의 길을 걸으려 했으니 그만큼 늦깎이로 출발한 셈이다. 골방에서 루카치를 읽었고 최루탄과 촛불 집회에서 시를 낭송했으리라. 미워하는 자는 끝까지 미워하겠노라 이를 갈던 시절도 참으로 인고의 세월이다. 거품으로 떠나간 동지를 떠올리면서 ‘무엇을 아끼면서 살아남고 있는가’에 대한 화두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으리라. 그 화두처럼 해직교사 출신인 동시에 명퇴교사의 도정을 걸었다.
내 그리움은 다르거든
남편과 아들이 보지 못한 그 애의 풋풋하고 발랄했던 옛날,
아슬아슬 위태로웠던 순수함, 이루지 못했지만 아름다웠던 꿈과 이상을 나는 아니까
세월이, 현실이 흐려놓은 그 애의 원판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니까……
-「친구」
코 고는 남편 옆에서 마키아벨리즘을 읽다가.
호프집에서 훔쳐낸 여인의 대화를 세상에 드러내니 그게 이문구 타법이다. 그러니까 사내와 아낙의 관계는 길들임과 길들여짐의 관계라는 폭로다.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는 사내들도 밥상을 거부할 줄은 안다. 그미들은 비분강개와 합리화를 빨리 판단하며 다시 일상의 에너지를 저울질한다.
‘망자가 된 어느 아낙’에 대한 회한도 사내와 여인들의 간극이 크다. 사내들은 여전히 ‘젖은 손의 애처로움’에 젖어드니, 솔직히 말하면 ‘무수리 아내’에 대한 그리움일 뿐이다. 된장찌개처럼 구수하면서도 입에 딱 맞는 음식 그리고 잘 빨아서 다린 와이셔츠나 생산해주던 현모양처가 망자로 변신했으니, 불편하고 그립기도 하리라. 거기까지가 천편일률의 신파다.
그러나 여자들은 다르다. 쇠한 몸 이전의 풋풋함과 발랄했던 몸이 본디 본향이었음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로 폴짝폴짝 뛰던 종아리 추억도 아리고 시리다. 젊은 날의 아슬아슬 위태롭던 사랑 놀음과 높이 날고 싶었던 ‘갈매기의 꿈’을 쌍동 잘라버린 석별들이 허망하다. 그 ‘여자의 일생’들을 어떻게 벗어나고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그놈이 그놈 같아두 그게 아닌 겨
감나무 집 딸 좀 보라구 겉만 번드르헌 놈헌티 시집갔다가 오늘날 팔자가……
뚱딴지 같이 웬 팔자타령이랴? 선거허구 혼인허구 뭔 상관이라구?
상관이 왜 읎댜? 그게 다 사람 고르는 일이구 내 신세 맽기는 일인디
-「노인정 난상토론」
순종과 페미니즘의 갈등이 쳇바퀴처럼 지난하게 얽혀서 마침내 선거판 스토리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미는 짜릿한 절창을 피하면서 신랄한 주제의식을 예고한다. 디테일한 묘사, 비유, 상징, 허구, 비약을 거절하는 대신 통째로 비유하고 상징을 시도한다. 이야기를 추스르는데 바쁘니 상징이나 비약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소외된 주변부에 포커스를 맞춘 다음 문단 전체를 한 방에 털어내 버린다. 엑스트라를 발굴하여 주연의 자리에 않히는 시인정신, 늦깎이 시인의 생산을 기대하는 이유가 된다.
이순이 시인은 오리지널 전교조 전사다.
캠퍼스 문청 시절의 한때 ‘진솔한 글을 쓰겠다’는 습작 청년은 민족문학논쟁의 회오리 상처 과정을 거쳐 신경림, 허수경, 김승희의 시를 접하면서 알토란처럼 무르익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격동의 세월 90년대 초 교단에 서자마자 겁도 없이 전교조에 가입하고 지난하고 지리한 싸움에 돌입한 것이다.
일단 진보의 짝들이 가장 적절한 짝을 만났으나 막상 신혼은 달콤한 게 아니라 쳇바퀴의 일상이다. 다리미질 날 세운 바짓날로 식솔들 무장시키며 양 손톱 세우고 검은 천에 정교한 방점을 찍어도 일상의 과제는 산더미처럼 불어난다. 거리에 뒹구는 푸른 기호들 읽을 틈 없이 더듬더듬 살림을 장만하고 아이를 키우며 학교와 집안 그리고 전교조 사무실을 전전하다 보니 어느새 장년이다. 가끔 ‘아차, 문학은’ 하며 놀라기도 하지만.
먹으려면 한참
살구꽃 한 점 지고 있다
언제 열리나
사과꽃 한 다라 피었다
- 「입덧」부분-
열매를 따야 숨을 돌릴 것 같은데 풋것들은 꽃 파편 청춘에 취해 있다. 안타깝지만 기다려야 한다고 정리하면서도 시인의 가슴을 부글부글 끓고 있다. 컴퓨터와 분필을 끌고 와 엘리베이터에 비춰진 자화상을 마주치며 ‘걱정 마’ 가슴을 쓸어안는다. 현관을 열면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노동의 분량들, 그 속에서 가없이 파헤치는 기다림의 화두는 무엇일까. 이 도약의 자본주의 시대에 ‘함께 걷는 길’의 의미는 제발 무엇일까.
붉은 여자애와 취한 사내 비틀거리는 미량포구를 관조하는 눈빛이 이상적 로망일까. 아니면 어울리는 옷 한 벌 찾지 못한 채 갈구하는 사념 덩어리일까. 바다로 떨어지는 나뭇잎 스냅을 낚아채는 까마중 눈빛이나 비에 젖은 벗들 빈 어깨 쓰다듬는 시인의 초점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곁눈질 없는 도정으로 질주하는데 시인은 얽힌 매듭을 과연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근 한 달
석 등 옆 천 년 묵은 백일홍 붉다
내가 석등이라면 기진맥진할 거다
한 천 년
백일홍 석등 옆에서 정신 놓았다
나라면 네 사랑이 지긋지긋할 거다
- 「지긋지긋한 사랑」
서정과 문장이 순간적으로 일치하는 섬뜩함이라니, 아!
올곧게 산다는 것은 갈퀴 같은 어둠으로 들어가려는 결의에서 비롯된다. 도대체 이 눅눅한 우기가 언제 끝나려는지 우울증에 걸릴 판이지만 우리는 ‘사막의 낙타’처럼 모래톱 헤치며 걸어야 한다. 「엄마의 흰 펜」 한 권의 시집을 상재한 늦깎이 시인이 스타트를 밟아야 하는 이유다.
한때 나는 작가정신 하나로 지구상의 모든 것은 평가하기도 했으며 또 실제 그렇게 살기 위해 벼랑 끝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당연했다. 글은 나의 몸이요, 영혼이요, 결정체임을 믿어 의심한 적이 없었으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헤쳐야 했다. 외롭지는 않았는데 초로의 시점에서 문득 다른 풍경을 만나지 못함이 아쉽기도 했다. ‘넓은 세상에서 하필 나는 글만 쓰고 살았을까’에 대한 회한이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제 눈길을 돌리고 싶어도 지나온 도정이 너무 아득한지라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터여서 새벽 도서관에서 이를 갈며 글자 수를 맞추어본다. 더러는 이 충청도 문사들을 밀짚방석 한 자리에 모아놓고 걸판진 술독에 빠지는 꿈도 꾸면서 패인 상처도 덮고 싶다.
참고로 여기 시인들이 충청도를 대표함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등장하는 벗들 중에는 나태주 선배나 조재도 선생처럼 수십 권의 저서를 상재한 시인도 있고 이정록, 유용주처럼 명망가도 있다. 이문복, 박경희처럼 늦깎이로 떠오르는 별도 있고, 정낙추, 박미라 시인처럼 초로의 몸피로 받쳐주는 시인도 있다. 이진수나 유지남, 이순이 시인처럼 달랑 한 권의 시집을 낸 시인들을 특별히 거론하는 이유는 역량과 역할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연히 이들보다 캐리어나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 빠졌을 수도 있으니, 구태여 선정기준을 밝히자면 친소 관계를 우선순위로 했고 글쓰기 편한 캐릭터들을 참고했는데 그조차 전혀 객관적인 것은 아니니 의미 부여를 삼가 달라. 울타리 동반자 모든 벗들과 함께 끝까지 뭉쳐가야 할 일이다. 겨울 밤 새도록 걷다가 눈사람으로 남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