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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1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67리 이고,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 79리 이고,
남쪽으로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 이고,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 66리 이고,
서쪽으로 단성현(丹城縣) 경계까지 38리 이고,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7리 이고,
하동현(河東縣) 경계까지 67리 이고,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94리 이고,
북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45리 이고, 의령현 경계까지는 40리 이고, 단성현 경계까지 47리 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6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청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반성현(班城縣) 주의 동쪽 52 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 본주에 내속시켰다. 일명 편월(片月)이고, 창름(倉廩)이 있다.
영선현(永善縣)주의 동남쪽 48 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상선(尙善)이라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악양현(岳陽縣)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하동군에 예속시켰던 것인데 고려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신증』 정덕(正德) 무인년에 악양현과 화개현(花開縣)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官穀) 출납에 노고가 많다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
살천부곡(薩川部曲) 주 서쪽 81 리에 있다. 부곡의 장(長)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僧首)라 부른다.
화개부곡(花開部曲) 합포(陜浦)라 하기도 한다. 주 서쪽 1백 26리에 있다. 부곡의 장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라 부른다.
【진관】
군 다섯 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함양(咸陽)ㆍ곤양(昆陽)ㆍ거창(居昌)이다.
『신증』 거창은 현으로 강등되었다.
현(縣) 여덟 사천(泗川)ㆍ남해(南海)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하동ㆍ산음(山陰)ㆍ안음(安陰)ㆍ단성이다.
『신증』 거창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한 사람이다.
【군명】
거열성ㆍ거타ㆍ청주(菁州)ㆍ강주ㆍ진양ㆍ청천(菁川)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ㆍ정해군(定海軍).
【성씨】
본주 정(鄭)ㆍ하(河)ㆍ강(姜)ㆍ유(柳)ㆍ소(蘇)ㆍ임(任)ㆍ강(康), 김ㆍ박 모두 내성(來姓)이다.
반성(班城) 형(荊) 형(邢)이라 한 데도 있다. 주(周)ㆍ옥(玉)ㆍ현(玄)ㆍ성(成), 김 속성(續姓)이다. 영선(永善) 양(楊)ㆍ한(韓)ㆍ임(林)ㆍ임(任). 복산(福山) 문(文) 송자(松慈)와 같다. 악양(岳陽) 도(陶)ㆍ오(吳)ㆍ임(任)ㆍ손(孫)ㆍ박, 김 속성(續姓)이다. 화개(花開) 김. 살천(薩川) 박.
【풍속】
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넉넉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모두 《지리지(地理志)》에 있다.
여염이 태평하여 밥 짓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하륜(河崙)의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있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하연(河演)의 〈사교당기(四敎堂記)〉에 있다.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이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있다.
【형승】
영남 제일이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다.” 하였다.
큰 산과 큰 강
이첨(李詹)의 서문에, “인물이 나서 국가에 도움 되게 하는 이는, 큰 산과 큰 강의성하고 맑은 정기로 된 것이 많다.” 하였다.
동방의 육해(陸海)이다.
예전 사람이 진양을 평하기를,
“진양은 동방의 육해이다.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다.” 하였다.
비봉산(飛鳳山)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望晉山)이 남쪽에서 읍한다.
하륜의 〈봉명루기(鳳鳴樓記)〉에,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 하였다.
【산천】
비봉산 주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지리산(智異山)주 서쪽 1백 리에 있다.
상봉(上峯)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남원부(南原府)편에 자세히 적었다.
산 북쪽은 함양군 경계이다.
○ 고려 때에 명사가 이 산에 숨어 살았는데, 지조가 높고 행실이 깨끗하여 세상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때 임금이 듣고 사신을 보내 맞아오려 하니,
사례하기를, “외신(外臣)이 아는 것이 없사오니 왕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다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사신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보니 벽에다가,
“한 마디 임금의 말씀 골에 들어오니, 이름이 인간에 떨어진 줄 비로소 알았네.”라는 한 구를 적어두고
북쪽 바라지를 통해 도망쳐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한유한(韓惟漢)이 아니었던가 의심한다.
《고려사》에, “유한이 여러 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고,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가 버렸다. 맑은 수양과 굳은 절조로써 외인과 교제하지 아니하니, 세상에서 그의 풍치를 높게 여겼다.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 고려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험한 곳을 지나 태화봉(太華峯)에 오를까 의심되더니, 돌아오는 길에 도리어 석양이 붉음을 겁내네.
우연히 왕사(王事)로 인해 세상밖에 노닐지만, 도리어 당년의 양차공(楊次公)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고려 김돈중(金敦中)의 시에,
“오르고 올라 최상봉에 이르러, 진세를 돌아보니 한 조각만하구나.
노을 속에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를 얻었으니, 풍류는 진(晉) 나라 양공(羊公)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네.” 하였다.
○ 고려 중 정명(靜明)이 벗을 전송하는 시에,
“그대는 곧 바로 천 봉우리 속에 들어갔다 하니, 몇 겹의 연기와 노을 속에 있겠네.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가신 길 아득하니, 다른 해 어느 곳에서 그대 자취 찾을고.”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가장 크다. 신선이 표피자리 깔았네.
나무 끝에 두 다리가 날고, 구름 속에 반신(半身)만 내놓네.
사람들은 삼무(三武)에게 곤란 당했음을 기롱하고, 혹은 진(秦) 나라를 피했다고 말하네.
어찌 그윽하게 살 곳이 없어, 풍진 속에 백발이 새로워졌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내 들으니, 백두산이 남으로 와서 바다에 닿아 뿌리가 서리었다네.
멀고 멀리 3천 리에 멧부리가 연했는데, 험한 곳은 모두 관문(關門)으로 되었다네. 구불거리다가 정기가 모여 갑자기 솟아났는데, 천궁(天宮)이 정상에 있어 제사를 누리네. 천궁이 하늘과 한 자도 안 되는 거리여서, 뭇 산을 당기고 뭇 물 삼킨다네. 바람과 구름이 부벼대서 나무가 못 크고, 응달엔 6월에야 눈이 처음 녹는다네. 천태산(天台山)이 4만 8천 장이라지만, 이 산과 견주면 하늘과 땅이로세. 유인(幽人)이 은거하여 이 속을 다니면서 만 구렁 솔바람 소리 모두 다 겪었네. 문득 선부(仙府)를 찾아 옥피리를 부노라니, 그 소리 완연히 봉황 울음 같아라.” 하였다.
○ 이륙(李陸)의 〈유산기(遊山記)〉에,
“지리산은 또 두류산이라 칭한다.
영남ㆍ호남 사이에 웅거하여서 높이와 넓이가 몇 백리 인지를 모른다.
목 하나, 부 하나, 군 둘, 현 다섯, 속읍 넷이 산을 둘러 있는데,
동쪽은 진주ㆍ단성이고,
남쪽은 곤양ㆍ하동ㆍ살천ㆍ적량(赤良)ㆍ화개ㆍ악양이며,
서쪽은 남원ㆍ구례ㆍ광양이고,
북쪽은 함양ㆍ산음이다.
높은 봉우리가 둘이 있는데,
동쪽은 천왕봉이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으로서 서로 거리가 백여 리나 되는데, 항상 구름에 가려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서 서쪽에 향적사(香積寺)가 있고, 또 서쪽으로 50리쯤에 가섭대(迦葉臺)가 있다.
대의 남쪽에 영신사(靈神寺)가 있으며, 서쪽으로 20여 리를 내려오면 넓게 트인 땅이 있는데, 편평하고 비옥하여 가로 세로의 넓이가 모두 6ㆍ7리 됨직하다.
간간히 하습(下濕)하여서 곡식 심기에 알맞다.
늙은 잣나무가 하늘에 치솟았으며, 낙엽이 쌓여서 정강이 까지 빠진다.
복판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없어 완전히 하나의 평야(平野)이다.
빙빙 둘러 남으로 내려오면, 시내를 따라 의신(義神)ㆍ신흥(新興)ㆍ쌍계(雙溪)의 세 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서 20리 지점에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佛日菴)이 있고, 그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널판지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두 명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았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의 근원은 영신사 작은 샘물로부터 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蟾津江)에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花開洞天)이라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千佛庵)ㆍ법계사(法戒寺)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자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임했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
또 두 물이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나오며, 살천(薩川)에서 합쳐져 하나로 되어 소남진(召南津) 아래쪽으로 흘러 들어서 진주를 둘러 동쪽으로 가는데, 이것을 정천강(菁川江)이라 한다.
소남진이란 것은 산 북쪽 물이 동쪽을 돌아오다가 단성현(丹城縣)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인 것이다.
살천촌(薩川村)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다.
살천촌 앞쪽을 내산이라 하고, 바깥쪽을 외산이라 한다.
보암사에서 바로 올라가 빠른 걸음으로 하루 반이면 천왕봉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돌벼랑이 가파르고 험하여 길을 찾을 수 없고, 또 느티나무와 노송나무가 하늘을 가렸으며, 밑에는 가는 대가 촘촘하고, 간혹 말라 죽은 나무가 천 길 벼랑에 걸쳐 있는데 껍질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또 폭포가 멀리 구름 끝으로부터 그 사이에 내리쏟아 길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겠고, 돌아보면 뒤를 볼 수 없다.
수십 개 나무를 베어야 비로소 한 자 넓이의 하늘을 볼 수 있다.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가끔 돌을 주워, 바위 위에 두고 길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않는다.
6월에 서리가 처음 내리고 7월이면 눈이 오고 8월이면 얼음이 크게 언다.
첫 겨울이 되면 눈이 몹시 와서 골과 구렁이 모두 편평하여지므로 사람이 왕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산에 사는 사람들이 가을에 들어갔다가 늦은 봄이라야 비로소 산에서 내려온다.
혹 산 아래에는 뇌성과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와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한 점 구름도 없기도 하니, 대개 산이 높아서 하늘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평지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대체로 산 밑에는 감과 밤나무가 많고, 조금 위에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 지대를 지나면 삼나무와 노송나무이다. 절반은 말라 죽어서 푸른 것과 흰 것이 서로 섞여져 있으며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맨 위에는 철쭉꽃만 있을 뿐인데, 나무 높이가 한 자 길이가 채 못 된다.
맛있는 나물과 진귀한 과실이 딴 산보다 많아서 산에 가까운 수십 고을이 모두 그 이익을 입는다.” 하였다.
『신증』성현(成俔)이 김종직(金宗直)의 〈두류록(頭流錄)〉 끝에 쓴 시에,
“위태롭게 높도다.
산이 둥그스름하며 넓게 퍼졌음이여.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하늘에 닿았네.
뿌리가 몇 천 백 리나 서리었는지 내 모르거니와,
우뚝하게 하늘 동남쪽에 중진(重鎭)이로다.
원기가 발설되고 천기가 뱉었다 머금었다 한다.
구름과 연기가 침침하게 중턱을 감췄고,
그윽한 골짜기엔 아름다운 나무가 많다.
처음 숲 기슭을 좇아 참 취미를 찾아서 선경을 샅샅이 깊이 더듬었네.
벼랑에 달린 나는 폭포가 비같이 쏟아지며,
우레처럼 아래로 깊은 못을 진동시킨다.
산이 깊을수록 물이 맑으니, 맑은 그림자가 쪽빛보다 푸르다.
몸이 최고봉에 오르니 뭇 멧부리가 쇠못을 꽂은 것 같구나.
손으로 은하수를 만질 듯 하늘과 가까운데,
하늘 바람이 머리털을 불어 차게 흩날린다.
부상(扶桑)과 약목(若木)은 어디쯤인가.
푸른 바다 만리에 맑은 이내 뜨고 큰 물결이 어지럽게 부딪쳐 신기루 빛이 서로 잠기네.
퇴계(椎髻)와 훼복(卉服)이 바다를 건너 잇따라오니,
성군의 덕화가 멀리 미쳤음을 볼 수 있네.
아래로 보니 수십 주(州)의 인간들이 아득하게 굼틀거리는 어린 누에 같다.
산의 높음은 더할 수 없고, 산 속은 즐겁기도 하다.
흔들거리는 패다(貝多) 잎이고, 펄럭거리는 우발담(優鉢曇) 꽃이라.
아름다운 꽃과 이상한 나무 다투어 피는데, 봄바람이 일렁거리니 향기가 그윽하다.
진기하고 이상한 이름 모를 새가 푸른 날개로 너울너울 춤춘다.
푸른 이끼가 길에 가득하니 속인(俗人)의 발자취 없어지고,
그윽한 바위 끊어진 벼랑에 붙여 감실(龕室) 열렸네.
은은한 절을 우러러보니, 찬란한 단청이 눈부셔라.
당간의 깃발은 아득하게 비치고 종과 북소리 은은하게 들린다.
이 속에 마땅히 은거한 군자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털의 팽조(彭祖)ㆍ노자가 많으리라.
구절장(九節杖) 짚고, 부용관(芙蓉冠) 쓰고, 쌍성(雙成 서왕모의 시녀)이 말고삐 끌고 왕모(王母)가 말을 몰리라.
구하(九霞)의 푸른 술을 마시고, 동정(洞庭)의 누런 감자로 안주한다.
영지와 요초가 나날이 자라고, 푸른 이무기 검은 사슴의 잠이 한창이라.
달밤 숲이 침침한데 신령스러운 바람소리는 헌원(軒轅)이 풍악을 벌여서 관함(官函)을 두드리는 듯,
고운(孤雲)이 도를 듣고 그 지경에 웅경(熊輕) 조신(鳥伸)의 묘한 법 배운 지 오래였다.
커다란 필적이 푸른 절벽에 비치니, 천재에 미담을 남겼네.
세상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부귀만 생각하고 술에 빠지는가.
그대는 거기에 돌아가 누웠으니, 구름숲은 본성이 달게 여기던 바이네.
내 지금 속세의 그물에 떨어졌으니, 허덕거림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마음으로는 그대와 함께 소원대로 좋은 땅 가리어 띠 암자 얽고 싶었네.
작은 관록을 탐내어 능히 가지 못하고, 고생스럽게 파리처럼 구하며, 동어(鮦魚)처럼 탐낸다.
한 몸의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니, 둥근 자루를 모난 구멍에 끼움과 무엇이 다르랴.
그대는 하늘 위에 학이요, 나는 언덕에 메추라기라.
몸을 기울여 남쪽을 바라보니, 조심하는 마음에 속이 타는 듯하네.
어찌하면 칡덩굴 부여잡고 새삼 덩굴 넘어뜨리며,
상상 꼭대기에서 긴 휘파람 불어 호연한 기운이 천지와 아울러 셋이 될꼬.”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지리산 속에 있다. 주에서는 서쪽으로 1백 47리의 거리이다.
○ 이인로의 《파한집》에,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 와서는 수 천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 오는 말에,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여, 엎드려서 몇 리를 지나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된다.
사방이 모두 옥토여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푸른 학이 그 안에 서식하는 까닭에 이렇게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피한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한다.
지난날 나는 최상국(崔相國) 아무와 함께 이 속세를 떠나 길이 숨을 뜻이 있어서 청학동을 찾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대롱[竹籠]에 송아지 두세 마리씩을 담아가지고 들어만 가면, 속세와 서로 상관하지 않아도 되리라.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데가 없었다.
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났고 만 구렁 물이 다투어 흐른다.
대 울타리 초가지붕에 복숭아꽃이 가렸다 비쳤다 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이란 것은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나는 바위에다가 시를 적기를,
‘두류산 멀고 저녁 구름 낮으막한데,
만 구렁 천 바위가 회계(會稽)와 같네.
지팡이 끌며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을 격해서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누대는 아득히 삼신산이 멀고, 이끼 끼어 네 글자가 쓰인 것이 희미하네.
신선이 있는 곳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했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둥그런 지리산을 바라다보니 만겹 구름에 항상 침침하여라.
뿌리가 백 여리 서리어 산세가 절로 빼어나니, 뭇 구렁이 감히 겨루지 못한다네.
층층한 멧부리와 가파른 돌 벽은 기세가 뒤섞였고, 성긴 소나무와 푸른 잣나무는 차갑게 우거졌다.
시내가 감돌고 골이 굴러 별천지 되었는데, 한 구역 좋은 경치는 참으로 별천지로세.
사람 없어지고 세상 변해도 물은 제대로 흐르며, 초목이 우거져서 동서가 아득하다.
지금도 푸른 학은 홀로 깃드니, 벼랑에 붙은 한 가닥 길이 겨우 통하리.
좋은 밭 비옥한 땅이 편평하기 상과 같은데, 넘어진 담과 무너진 길이 쑥대 속에 묻혔구나.
숲이 깊으니 닭과 개 다니는 것 안 보이고, 해 지니 원숭이 울음만 들린다.
아마도 옛날에 은자가 살던 곳, 사람은 신선되고 산은 비었는가.
신선이 있고 없음은 논할 것 없고, 다만 높은 사람이 속세 벗어났음을 사랑한다.
나도 여기에 집 짓고 숨어서 해마다 요초 캐며 생을 마치고 싶다.
천태산(天台山) 지나간 일은 참으로 허황하고, 무릉도원 유적도 다시 몽롱하다.
장부의 출처를 어찌 구차 하게 하랴. 제 몸만 맑게 하고 인륜을 어지럽힘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 지금 노래 지으매 뜻이 무궁하니, 그날에 시 남긴 늙은이 우습기도 하여라.” 하였다.
옥산(玉山)주 서쪽 55 리에 있다.
우산(牛山)주 서쪽 65 리에 있다. 지리산의 남쪽 기슭인데, 형상이 소가 엎드린 것과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고려 때에 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이 산에다가 우방(牛房)ㆍ모방(茅房)의 두 절을 창건하였는데,
모방에는 민첨의 화상이 남아있다.
망진산(望晉山) 주 남쪽 6 리에 있다.
영봉산(靈鳳山) 반성현(班城縣) 동쪽에 있다.
집현산(集賢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단성현(丹城縣) 편에도 나왔다.
월아산(月牙山 달엄산) 월아 부곡에 있다.
와룡산(臥龍山)주 남쪽 60 리에 있다. 사천현(泗川縣) 편에도 나왔다.
송대산(松臺山) 주 동쪽 42 리에 있다. 바다 주 남쪽 60 리에 있다.
흥선도(興善島) 주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남강(南江) 주 남쪽 1 리에 있다.
강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지리산 운봉현(雲峯縣) 경계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주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의령현(宜寧縣) 경계에서 정암진(鼎巖津)이 된다.
○ 최함일(崔咸一)의 시에,
“오리들이 쌍쌍으로 물차고 날며,
영산홍(暎山紅)이 유리 같은 푸른 물에 거꾸로 비친다.
화공이 그려내기 어려운 가지가지 의미는,
서생의 한 수 시에 다 들어가네.” 하였다.
섬진(蟾津)
악양현(岳陽縣) 서쪽에 있는데 주에서는 93 리이다.
지리산 서남쪽 물이 구례현 용왕연(龍王淵)과 합쳐서 여기에 와서 섬진이 되며, 동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운당진(雲堂津)주의 동쪽 15 리에 있으니, 남강 하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주 서쪽 29 리에 있으며 단성현 신안진(新安津)의 하류이다.
반룡포(盤龍浦)주 남쪽 79 리에 있으며, 바다 개펄이다.
정천(菁川)주 서쪽 3 리에 있으니, 곧 남강 상류이다.
구라량(仇羅梁)주 남쪽 60 리에 있으며 바닷가 개펄이다.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여기를 경유하여야 한다.
금산지(金山池)주 동쪽 20 리에 있다. 부지(釜池) 주 북쪽 3 리에 있다.
가차례지(加次禮池)가 차례 부곡에 있다.
『신증』
방어산(防禦山) 반성현 북쪽 15리에 있다. 방아산[帖山]이라고도 하는데, 속음이 비슷하다.
삽암(鈒巖) 악양현 강변에 있다. 어선이 항상 여기에 정박한다.
촉석강(矗石江) 누선이 있다.
○ 조위(曺偉)의 시에,
“누 밑에 긴 강 백 길이 맑은데, 채색 배 비스듬히 끌며 거울 속에 흐른다.
해는 모든 집의 발그림자를 흔들고, 바람은 10 리 피리소리를 전한다.
산 아지랑이는 아른아른 절벽에서 나고, 물빛이 일렁거려 높은 성을 움직이네.
지척의 홍진 길에 머리 돌리니, 갈매기 한 마리 가벼이 뜨는 것 부러워라.” 하였다.
강주포(江州浦) 사천현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김양포(金陽浦) 곤양군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감ㆍ차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에 대렴(大廉)이 당(唐) 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하였더니,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무성하였다.
○ 하연(河演)의 신다(新茶) 시에,
“진지(晉池) 풍미(風味)는 섣달 앞의 봄인데, 지리산 가에 초목이 새롭다.
금가루ㆍ옥 싸라기 달일수록 더욱 좋아, 깨끗한 빛깔과 빼어난 향기 맛이 더욱 진기하다.” 하였다.
대구(大口)ㆍ미역ㆍ잣[海松子]ㆍ청각(靑角)ㆍ해삼ㆍ꿀[蜂蜜]ㆍ전복[鰒]ㆍ생강ㆍ송이[松蕈]ㆍ석류ㆍ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옻ㆍ죽전(竹箭) 망진산ㆍ적량(赤良)ㆍ청암(靑巖)ㆍ삽암ㆍ영선(永善) 등에서 산출한다.
매실.
『신증』 웅담ㆍ녹용ㆍ오미자ㆍ대ㆍ문어ㆍ낙지[絡締]ㆍ조기[石首魚].
【성곽】
촉석성(矗石城) 주 남쪽 1 리에 있다.
석축인데 둘레가 4천 3백 59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돌고 도는 것은,
운수의 성하고 쇠함과 인사의 잘하고 못함이 서로 관계되어 그런 것이다.
옛날 사람은 인사를 닦아서 천운에 응하는 까닭에,
혹 도적의 난이 일어나도 마침내 근심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내가 우리 고을의 성에 대해서 느낌이 있다.
내가 총각 적에 여기에서 유학하면서,
매양 허물어진 성의 옛터를 보았으나 그 연대를 알 수 없고,
늙은이들에게 물어도 또한 증빙할 수 없었다.
이때에는 여염이 태평하여 밥 짓는 연기가 연이었었다.
쥐새끼 같은 해구(海寇)가 가끔 일어났으나,
강주(康州) 길안(吉岸)의 토벌만으로도 족히 꺾어 부술 수 있었고,
합포진(合浦鎭)에서 군사를 나누어 구원하여서 우레처럼 엄하게 바람처럼 날려버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 수리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장성하여 벼슬에 종사한 지 10여 년 이래로,
바다 도적으로서 육지에 올라오는 것이 해마다 심하여 갔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 논의도 변방을 방비하는 것을 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어 주ㆍ현의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고을 사람이 옛터에다가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무너졌다.
사명을 받든 자가 그 책임을 어찌 면하리오.
기미년에 지금 지밀직 배공(裵公)이 강주에 진장(鎭將)으로 와 있으면서,
목사에게 공문을 보내 다시 수축하게 하고,
참좌(參佐)를 보내 공사를 감독하였다.
흙덩이던 것을 돌로 바꿔서 쌓게 하였으나,
공사가 반도되기 전에 해구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강성군 산성(江城郡山城)이 있어서 한 고을 사람이 의거할 곳이 있었고, 해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이 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고,
또 주의 치소(治所)에서 거리가 멀므로 갑작스러운 사태에 능히 미칠 수 없었다.
해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이 백성의 뜻에 따라 영을 내리기를,
‘주의 성을 이제는 수축해야겠다.’ 하니,
듣는 자가 다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장정들이 일을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 안 되어 일을 끝마쳤다.
성 둘레는 8백 보이고, 높이는 세 길이 넘었다. 성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서쪽은 의정(義正),
북쪽은 지제(智濟),
남쪽은 예화(禮化)이며,
문 위에는 모두 누를 지었다.
올라서 사면을 돌아보니
정천(菁川)이 서쪽을 둘렀고,
긴 강이 남쪽에 흐르며,
품자(品字)가 동쪽에 벌였고,
세 곳의 못물이 북쪽에 돌아 모인다.
또 성과 못 사이에 참호를 파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 꺾이어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는데,
형세의 장함이 진실로 성위의 한 사람이 성 밖의 백 사람을 당할 만하였다.
성이 완성되자 해적이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
아, 처음 시작하는 어려움이 다시 일으키는 어려움보다 못하고,
처음이 있게 하는 어려움이 마침이 있게 하는 어려움만 같지 못한데,
일은 반절이면서 공은 곱절인 것을 내가 김공한테서 보았다.
공의 이름은 중광(仲光)이다.
정사하는 데에 대체를 힘써서 어른의 풍모가 있다.
일찍이 제주 목사로 있었는데 반복하여 복종하지 않던 토속(土俗)이 그의 의(義)에 감복되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재상이 되었는데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을 잘 다스렸다 하여 이 임명이 있었다.
판관 이군 사충(仕忠)도 단정한 사람으로서 공을 도와 이 성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관방】
적량(赤梁) 주 남쪽 백 13 리에 있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1백 82척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이다.
삼천진(三千鎭) 남쪽 74 리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50척이다. 권관(權管)을 두어 방비한다.
【봉수】
대방산 봉수(臺方山烽燧) 주 남쪽 1백 14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南海縣) 금산(錦山) 북쪽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망진산 봉수(望晉山烽燧)남쪽으로 사천(泗川) 안점(鞍帖)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廣濟山)에 응한다.
각산 봉수(角山烽燧) 주 남쪽 76 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昆陽) 우산(牛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광제산 봉수(廣濟山烽燧) 주 북쪽 31 리에 있다. 남쪽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성 입암산(笠巖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하륜의 서문에,
“고을 객사가 두 번이나 화재를 만나, 다시 짓지 못한 지가 여러 해였다.
계미년에 지금 판서 광주(廣州) 안공(安公)이 좌사간대부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나갔다.
이에 옛터를 찾아 그전보다 제도를 조금 넓혀서 신축하였는데,
지금 목사 최공과 판관 은군(殷君)이 계승하여 더 수축하였다.
안공의 이름은 노생(魯生)이요, 최공의 이름은 이(迤)이며, 은군의 이름은 여림(汝霖)인데,
무두 훌륭한 관리로서 세상에 명성이 있다.” 하였다.
【누정】
봉명루(鳳鳴樓)객관 남쪽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객사 남쪽에 예전 누(樓) 3칸이 있는데,
그 밑을 비게 하여 왕래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누문이라 하는데 이름이 없다.
그 곁에는 노목 수십 그루가 벌여 서서 바람을 머금고 햇볕을 가려서 서늘한 기운이 저절로 난다.
관가와 민가와 대숲과 꽃나무가 가렸다 비쳤다 서로 연접하였다.
산 빛과 물빛이 그 밖에 비치고 유람하기에 알맞은 것이 실로 깊숙하고 넓게 트인 중간에 있다.
영목사 정헌대부 최공(崔公)이 이 주에 부임하여서는 모든 황폐한 것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기를,
‘주는 땅이 아주 남쪽이어서 여름 더위가 더욱 심하다.
사신과 빈객이 왕래할 때에 시원한 곳이 있어야 할 터인데,
촉석루는 허물어진 지가 이미 오래 이고 또 공해(公廨)에 막혔다.
이 누를 수리하면 공역은 덜하고 일은 편리하겠다.’ 하고,
마침내 공인(工人)을 모아서 농사 여가에 일을 시켰다.
기울어진 것을 바루고 썩은 것을 갈아 넣었으며,
작고 비좁은 것은 더 보태어 늘리고, 단청을 칠하고,
봉명(鳳鳴)이라는 현판을 걸고,
주 사람 전 상주 목사(前尙州牧使)였던 전군(全君) 제(悌)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기문 짓기를 청하였다.
내 적이 생각하니, 봉(鳳)이란 것은 왕자(王者)의 상서이다.
옛날 주(周) 나라가 한창일 때에 봉황이 높은 뫼에서 울었다 한다.
지금 밝은 임금이 위에 계셔 몸소 인의를 행하고,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한 자를 부리는데,
백성과 가까운 관직(지방관)을 더욱 중하게 여긴다.
최공은 자애하고 인후한 자질로, 외방에 나가 한 주를 맡아서 왕화(王化)를 펴매,
이에 봉명(鳳鳴)으로써 누 이름을 하였으니,
이는 문왕과 무왕의 덕으로써 우리 임금에게 기대하여 행여 봉이 우는 상서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한(漢) 나라 황패(黃霸)가 영천(穎川)에 태수로 있을 때에, 봉황이 관사에 오고 다스림이 천하제일이 되었으므로, 조정에 불려 들어가 승상이 되어, 공이 당시에 빛나고 명예가 후세에 전해 온다.
이것은 진주 사람이 최공에게 기대하는 것이며, 최공도 또한 스스로 힘씀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른 산이 둘러 물가에 임했는데, 우리 고을 좋은 경치 참으로 맑고 기이하네.
영천(穎川)의 치적을 오늘에 기대하고, 아각(阿閣)에 화하게 울던 것은 성한 시대를 상상하네.
대나무가 인가를 가려 보일락말락, 나무는 관도에 깊어 꾸불꾸불. 농옥(弄玉)을 불러 함께 타고 갈까나,
어찌하면 퉁소를 얻어 달 아래에 불까.” 하였다.
○ 박욱(朴彧)의 시에,
“산에는 연이은 봉우리 있고 물에는 물가 있네.
진양의 좋은 경치 바라보매 기이하네.
옛 친구 서로 만나 흉금을 터는 곳, 걸각(傑閣)에 함께 올라 술잔 잡을 때로세.
누수(漏水)는 다했는데 시는 못 이루었고, 촛불은 다 타도 흥은 남았네. 우습다.
후령(緱嶺)에서 신선된 이여. 부질없이 퉁소 배워 세상 밖에서 불었네.” 하였다.
촉석루(矗石樓) 촉석성 안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누정(樓亭)을 짓는 것은 정사하는 자의 여사(餘事)이다.
그러나 한 누의 일어남과 황폐한 것으로서 한 고을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 인심을 인해서 한 시대의 세도를 알 수 있다.
그러하니 어찌 여사라 하여 하찮게 여길 것인가.
내가 이런 말을 한 지 오래였더니, 지금 우리 고을의 촉석루에서 더욱 믿게 되었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 벼랑 위에 있는데,
내가 소년 시절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누 제도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굽어보면 긴 강이 밑에 흐르고,
여러 봉우리가 그 바깥에 벌여 있다.
여염집이 뽕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보일락 말락하며,
푸른 석벽과 긴 모래밭이 그 곁에 연하여 있다.
농부와 잠부(蠶婦)가 그 일에 힘을 다하며,
아들과 손자는 효도에 그 힘을 다한다.
새들이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가 헤엄치며 자맥질하는 것 같은 것도,
한 구역의 동물로써 제자리를 얻은 것이 모두 볼 만하다.
또 누를 이름한 뜻은,
담암(淡庵) 백 선생(白先生)이 말하기를,
‘강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 하였다.
이 누는 김공이 짓기 시작하였고 안상헌(安常軒)이 두 번째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한 분들인 까닭에 또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이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영(題詠)으로는
면재(勉齋) 정 선생(鄭先生)의 배율(排律) 육운(六韻)과,
상헌(常軒) 안 선생(安先生)의 장구(長句) 사운(四韻)이 있고,
또 운은(耘隱) 걸 선생(傑先生)의 여섯 수 절구가 있으며,
이분들의 운을 화답하여 계승한 이는
급암(及菴) 민 선생(閔先生), 우곡(愚谷) 정 선생(鄭先生), 이재(彝齋) 허선생(許先生) 같은 분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선배의 풍류와 문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려 말기에 온갖 법도가 무너지매,
변방 수비 또한 해이해져서 왜적이 침입하니,
백성이 도탄에 빠졌고 누도 또한 잿더미로 되어 버렸다.
하늘이 성조(聖朝)를 열어 성신(聖神)이 계승하니,
정치 교화가 이미 밝아져서 은택이 나라 안에 젖고 위엄이 해외에 떨치니, 전일에 도둑질하던 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연달아 공물을 바쳤다.
바닷가 지역에 인구가 다시 빽빽하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가 술을 잔질하며 서로 경사하기를,
‘오늘날 우리 눈으로 태평세월을 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나의 다스림이 아직도 흡족하지 못하다.’ 하시어,
매양 교지를 내려 백성의 힘을 부리는 것을 엄금하여,
수령으로서 농사와 학교에 관계되는 일 외에는 감히 한 가지 역사도 마음대로 일으키지 못하였다.
고을 부로(父老) 전 판사 강순(姜順), 전 사간 최복린(崔卜麟) 등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이 읍을 설치할 때에 함께 된 것이고,
촉석루는 한 지방 훌륭한 경치였는데 황폐한 지 오래 되었으나 다시 새롭게 하지 못하니,
이것은 우리 고을 사람들의 책임이다.’ 하고,
이에 각자 재물을 추렴하고,
고을 중으로서 용두사에 향을 올리는 단영(端永)에게 그 일을 주간하도록 하였다.
계사년에 판목사 권공충(權公衷)이 판관 박시결(朴施潔)과 함께,
부로의 말을 받아들여 강둑을 수축하되,
백성을 나누어 대(隊)를 만들고 대마다 한 무더기씩 맡겨서 농촌의 여러 해 걱정을 제거하게 하였더니,
열흘이 못 되어서 공역을 마쳤다.
다음에 누를 짓는 역사에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놀고 있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그 힘을 다하게 하니 가을 9월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높은 누가 비로소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았다.
내 이미 인심과 세도를 오르는 자가 물가에 풀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의 불인(不仁)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해롭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밭에 모종이 한창 자라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의 농사 때를 빼앗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동산 숲에 열매 맺는 것을 보면 천지가 물을 성숙시키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의(義) 아닌 욕심으로 백성의 이로움을 침노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하고,
마당에 노적가리가 한창 쌓이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법 아닌 생각으로써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범위를 넓혀서 감히 제몸만이 홀로 즐기지 않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사람들도 모두 세도의 화함과 인심의 즐김이 실로 임금의 덕이 깊고 두터운 데에서 근원했다는 것을 알아서,
모두 화봉인(華封人)의 축수를 올리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로들이 간절히 마음 써서 이 누를 다시 일으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나도 치사할 날이 이미 가까우니, 필마(匹馬)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부로와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누에서 술잔을 들며 시를 읊조려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나니, 부로들은 기다릴지어다.” 하였다.
○ 고려 정을보(鄭乙輔)의 시에,
“황학(黃鶴)이라는 이름난 누, 그도 한때이었네.
최공이 일 좋아하여 시를 남겼다.
올라와 놀매 경치는 변함이 없건마는,
시 짓고 읊조리는 풍류는 성쇠가 있어라.
소 먹이는 두덕과 낚시터에는 가을 풀이 얕고,
거위 노니는 돌다리와 해오라기 섰는 물가엔 석양이 더디다.
푸른 산은 사방으로 모두 새 그림인데,
분바른 계집 세 줄 서서 옛 노래를 부른다.
옥잔을 주고받으니 산달이 오르고,
구슬발을 걷으니 고개에 구름이 드리웠다.
난간에 기대어 머리 돌리니 건곤도 작은 듯,
이제야 우리 고을이 특별히 기이함을 믿노라.”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누에 올라 옛날 놀던 때 생각하며, 억지로 강산에 답해 다시 시구를 찾는다.
나라에 어찌 난세를 평정할 현인이 없으리.
술은 나를 흔들어 노쇠한 나이를 비감케 하네.
지경이 맑으니 세속의 자취가 끊기기 쉽고,
좌석이 넓으니 춤추는 소매 휘두르기 어찌 방해되리.
붓에 먹 찍어 속절없이 춘초구(春草句)를 짓고,
술잔 멈추며 또 죽지사(竹枝詞)를 부른다.
기생은 다가앉아서 즐거움이 친밀하고,
사람은 시절과 함께 가기 싫어하네.
이 땅의 높은 정취는 참으로 속세가 아닌 듯,
적성(赤城)과 현포(玄圃)도 기이함을 독차지하지 못하리.” 하였다.
○ 백미견(百彌堅)의 시에,
“유람하는 것은 시대 못 만남과는 관계없다.
호수와 산 좋은 경치가 시 읊기를 요구하네.
누구의 눈으로 일찍이 여기 터보아 집 지었나.
내 몸이 평안하여 쇠하지 않았음을 자랑한다.
기둥에 기대니 건곤은 끝난 곳이 없고,
물결을 짜놓은 듯한 발과 장막 반공에 드리웠다.
풍류의 가을 달을 이태백이 읊조렸고,
뱃노래 소리 저문 강에 어부가 노래한다.
얘기하고 웃으며 술 한 잔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갔다가 오는데 사흘 동안을 더디다고 하던가.
무성한 숲, 긴 대나무는 서남쪽 언덕에 있는데,
내 정자가 분수 밖에 기이함을 도리어 두려워하네.” 하였다.
○ 김구경(金久冏)의 시에,
“촉석루에 올라서 한참 동안 머무니, 풍경이 나를 흔들어 시 짓고 싶어진다.
영운(靈運)의 뛰어난 재주 내 어찌 미치랴마는, 원룡(元龍)의 호기 온전히 쇠하지 않았다.
맑은 강, 낭떠러지엔 고기가 자주 뛰고, 큰 들판 긴 숲엔 바람이 더디 분다.
금 술잔을 대해서 묵은 한을 삭이고, 은필(銀筆)을 가져 새 글을 쓴다.
처음으로 눈을 만나 찬 매화 맹동 같더니, 또 봄을 보니 고운 버들이 드리웠다.
나려다 멈칫거리며 다시 바라보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 다 기이하여라.” 하였다.
○ 정이오의 시에,
“인간을 굽어보니 고금이 되었건만,
기이한 경치는 올라도 다하지 않네.
서쪽에서 오는 두 줄기 물은 쪽빛이 합쳤고,
남쪽으로 가는 뭇 봉우리는 파란빛이 짙다.
세상 따라 행하고 멈춤은 두공부(杜工部)의 탄식이요,
백성보다 먼저 걱정하고 뒤에 즐김은 범문정(范文正)의 마음이로다.
강을 격한 옛 마을엔 바람과 연기 그대로인데,
서울서는 당년에 몇 번이나 월나라 노래를 읊었던고.” 하였다.
○ “흥했다 폐함이 돌고 돌아 바로 지금을 기다렸음인가.
산꼭대기에 높은 누각이 반공에 임했네.
산은 들 밖에서 연했다 끊어졌다,
강은 누 앞에서 넓기도 깊기도 하네.
백설양춘곡(白雪陽春曲)은 선녀 같은 기녀의 노래요,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사또의 심사여라.
당시의 옛 일을 아는 이 없어, 고달픈 객이 돌아오며 홀로 읊조린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10년의 유람길 세상에 두루 돌았더니,
늦게야 선궁(仙宮) 몇 째 누(樓)에 기댔는고.
술을 많이 마셔 미쳤지 속물이 아니니,
높은 데 올라서 시 짓는 것 곧 맑은 놀음이네.
산에 가득한 소나무 숲엔 피리소리 움직이고,
한밤중 물결 위엔 흰 달이 떴어라.
햇살이 붉은 발에 비치니 봄잠이 족하여,
제 몸이 남쪽 고을에 체류하는 줄 모른다.” 하였다.
○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창망한 호해(湖海)에 가장 명승이라,
하늘이 사신(詞臣)을 보내 이 누에 이르렀네.
막막한 강 언덕 꽃은 밝기가 비단 같고,
겹겹으로 연기 낀 나무 푸름이 흐르는 듯하다.
백년 풍물은 그 누가 구사(驅使)하랴.
한 돛대 술 실은 배는 제대로 남쪽으로 떠다닌다.
지는 해에 유하주(流霞酒) 취해 잠이 달게 든 곳,
일부러 이 몸을 고을에 머물게 한 듯.”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서쪽으로 지리산을 연해 참으로 선경이라,
기이한 경치는 동쪽으로 강북(江北)의 누에 다 있네.
풍경은 영원히 봉악(鳳岳)에 머물러 있고,
번화함도 정천(菁川) 따라 흐르지 않는다.
3년 동안 풍월 두고 시 천 수 지었고,
한 번 웃으니 신세와 이름이 다 헛것인 것을,
대궐 향할 한 쌍의 오리가 그리 멀진 않지만,
꿈속에도 묘연하니 중주(中州)가 아득해라.” 하였다.
쌍청당(雙淸堂) 촉석루 서편에 있다.
『신증』
능허당(凌虛堂) 곧 촉석루의 동쪽 누각이다.
조양관(朝陽館) 곧 봉명루의 동쪽 누각인데, 목사 정백붕(鄭百朋)이 건축한 것이다.
청심헌(淸心軒) 능허당 동쪽에 있다.
임경헌(臨鏡軒) 곧 촉석루의 서쪽 누각이다. 목사 이원간(李元幹)이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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