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67)
개풍군수 강호동의 마부(馬夫) 살리기
장단을 떠나온 김삿갓은 개풍(開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밤 김삿갓은 어느 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서당의 훈장의 이름은 이윤성(李允成)이었는데, 인물이 풍채도 좋았지만 선량해 보이는 선비였다.
그런데 훈장은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김삿갓과 마주 앉아서도 연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런 광경을 보다못해 이렇게 물어 보았다.
"훈장께서는 어떤 걱정거리가 있기에 이렇듯 한숨을 쉬고 계시오?"
그러자 훈장은 몇 번의 한숨을 더 쉬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오십 평생에 남에게 못할 짓은 안 하고 살아왔는데, 오늘은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사람을 죽이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오?"
"알고 보면 기가 막힌 일이지요."
"무슨 말씀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군요."
그러자 훈장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을 하였다.
훈장은 신경통이 있어, 낮에 지팡이를 짚고 쩔룩거리며 이웃 마을 주부(主簿: 의원)에게 침을 맞으러 가는 중에, 나이가 연만한 장년의 한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엇에 쫓기는지 헐레벌떡 뛰어와,
"지금,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칼을 들고 쫓아오고 있으니, 그 놈이 나의 행방을 묻거든 모른다고 대답해 주시오." 하면서 숲속으로 도망을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잠시 후, 과연 험상궂게 생긴 젊은 놈이 손에 시퍼런 장도(長刀)를 들고 나타나,
훈장의 가슴에 벼락같이 칼을 들이대며,
"지금 이리로 도망하는 자를 보았지?
그놈이 어디로 도망했느냐.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
하였다는 것이다."
너무나 엉겹결에 당한 일이라, 훈장은 눈앞이 캄캄해 왔다.
그러면서, 죽지 않으려고 본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을 든 자가 훈장의 말을 듣고 숲속으로 쫒아 들어 갔는데, 잠시후에 숲속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온 것을 보면, 도망간 사람이 칼을 들고 쫓던 흉악한 젊은 놈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훈장이 자책을 하는데,
"내가 오늘 그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것은 내가 사람을 죽인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하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훈장이 괴로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죄 없는 사람을 자기가 죽인 것 같은 심정이 될 것이다.
이렇듯 생각이 된 김삿갓은 잠시후 훈장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그 사람을 살려줄 방도가 전혀 없지도 않았을 것인데, 워낙 다급했던 관계로 그런 실수가 있으셨군요."
그러자 훈장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선생 같으면 그 사람을 살려 줄 방도가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김삿갓은 훈장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글쎄 올씨다. 선생이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면, 칼을 든 젊은 놈이 나타나 도망치던 사람의 행방을 묻기전에, 선생이 눈을 감고 장님 행세를 하고 있었다면, 화를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설마하니 장님에게 도망간 사람을 보았냐고 묻지는 않았을 것이니까요."
"옛? 장님 행세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요?"
훈장은 김삿갓의 절묘한 계교를 듣자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아뿔싸! 선생 말씀대로 그때, 눈을 감고 장님 행세를 했더라면 ..아 아, 그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텐데.. 내가 워낙 멍청해서 두 눈을 뻔히 뜨고도 죄 없는 사람을 죽게 하였으니, 이런 기가막힌 실수가 어디있단 말이오! "
하면서 새삼스레 괴로워 한다.
김삿갓은 민망한 생각이 들어 이제는 훈장을 위로해 주어야할 판이었다.
"선생이 도망가던 사람에게 원한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물론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잘잘못을 떠나서 결과적으로 한 사람을 죽게 만들었으니 마음이 괴로운 것이지요. 선생 말씀을 들어보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나저나 선생은 어쩌면 그처럼 죽을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절묘한 생각을 해내셨소?"
훈장은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별안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김삿갓의 두 손을 덥석 움켜 잡으며 아래와 같은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선생! 내 조카 아이가 꼭 죽게 되었는데, 선생이 어떤 방도로 그 아이를 살릴 수 있겠는지 말씀 좀 해 주십시요. 선생이라면 그 아이를 살려 주실 수 있을 것 이옵니다."
밑도 끝도 없는 훈장의 이같은 말을 들은 김삿갓은 어리둥절하였다.
"저는 의원이 아니올시다. 병으로 죽게 된 사람을 제가 어떻게 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훈장은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나는 병으로 죽게 된 사람을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고, 이 고을 사또에게 미움을 사서 죽게 된
내 조카 아이를 살려 달라는 말씀입니다. 선생 같은 분이라면, 곧 죽게 되어 있는 내 조카를 충분히 살려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또에게 미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니요 ? 세상에 아무리 사또의 세도가 좋기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가 자초지종을 말씀 드릴테니, 제 말씀을 좀 들어 보세요."
그러면서 훈장은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 주었다.
훈장의 조카, 무송(武松)이는 개풍 군수 강호동(姜浩童)의 마부로 있는 사람이다.
강 사또는 워낙 성질이 불같이 사납고 기골이 장대한 인물로써 말(馬)을 유난히 좋아하였다.
이곳 개풍 군수로 부임해 올 때 조차, 한양에서 타고 다니던 애마(愛馬)를 끌고 왔을 정도인데,
무송이는 그 말을 양육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무송이가 잘못하는 바람에 그 말이 죽고 말았다. 이에 강 사또는 노발대발하며
무송이를 그날로 옥에 가두고, 수 일 안에 사형에 처해버린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훈장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또가 아무리 세도 등등한 벼슬 자리이기로, 말 한 필 죽인 책임을 물어,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누가 아니라오. 그러나 강 사또는 워낙 감때사나운 사람이라, 그냥 내버려두면 내 조카놈은 죽음을 면키는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까 선생이 제갈공명 같은 꾀를 쓰셔서, 내 조카놈을 꼭 좀 살려주소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이다."
그러나 한낱 걸객 시인에 불과한 김삿갓으로서는 무송이가 죽지 않토록 힘쓸 수가 있으랴 ..
김삿갓은 훈장의 말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출해 주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다.
그래서 전후 사정을 알아야 하겠기에 훈장에게 물었다.
"도대체 강 사또라는 사람은 누구의 힘으로 사또가 된 사람입니까?"
그러자 훈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한다.
"글쎄 올씨다. 강 사또가 누구의 천거를 받아 사또가 되었는지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알 길이 없지요. 다만, 강 사또의 할머니가 안동 김씨라는 말은 있더군요."
김삿갓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 이곳까지 미쳤는가 싶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강 사또가 안동 김씨의 힘을 빌려 사또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입니까?"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지요. 그러나 옛 말에 발 없는 말(言)이 천리를 간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것 같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아무튼 내가 내일 읍내로 들어가 강 사또를 한번 만나 보지요. 그렇다고 죽을 사람을 살려 낼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아니올시다. 선생이 내 조카를 꼭 살려 주시리라 믿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김삿갓은 이날 밤 서당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다음날 아침 개풍 군수를 만나보려고 읍내로 떠났다.
죽게 된 사람을 살려 낼 방법이 있어서 사또를 만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죄가 가벼운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겠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려면 사또를 만나, 저간의 사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