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소중했던가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 이성복
내 영혼 흠 잡을 데 없네
내 영혼 흠잡을 데 없네. 감기 몸살 안 하고 술 안 먹고 노래방 안 가고, 높새 바람에나 깃을 칠까, 착한 내 영혼 누군들 기뻐하지 않으리. 사람들 바로 살게 가르치고, 명절 선물 불편하면 거절할 줄 알고, 수제 의연금 잘 내고, 냈다는 건 마지못해 털어놓는 내 영혼 참으로 겸손하다. 한때 내 영혼 나쁜 줄만 알았네. 샘 많고 별나고 잘 삐치던 내 영혼, 하지만 이젠 추어탕 집 아줌마도 내 인상 좋다 하니, 자손 대대로 복 받겠네. 착한 내 영혼, 더 늙기 전에 러시아식 스포츠 맛사지 한 번 받아봤으면 좋겠네.
아, 그걸 점심값이라고
어떤 순결한 영혼은 먹지처럼 묻어난다. 가령 오늘 점심에는 사천 원짜리 추어탕을 먹고 천 원짜리 거슬러 오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까박까박 조는 남루의 할머니에게 '이것 가지고 점심 사 드세요' 억지로 받게 했더니, 횡단보도 다 건너가는데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 받을랩니다' 기어코 돌려주셨다.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내놓은 내가 그제서야 부끄러운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섭섭다거나 언짢은 기색 아니었다. 어릴 때 먹지를 가지고 놀 때처럼, 내 손이 참 더러워 보였다.
사랑은 자기반영과 자기복제. 입은 삐뚤어져도 바로 말하자. 내가 너를 통해 사랑하는 건 내가 이미 알았고, 사랑했던 것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해서, 시든 꽃과 딱딱한 빵과 더럽혀진 눈[雪]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해서, 썩어가는 생선 비린내와 섬뜩한 청거북의 모가지를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할 뿐,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 아장거리는 애기 청거북의 모가지가 제 어미에게 얼마나 예쁜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