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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때문이 아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모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기도에 관한 누가복음의 특별한 관심은,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다섯 번에 걸쳐 언급하는 데에서 돋보입니다. 세례받으실 때(3:12),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6:12),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기 전(9:18), 변형사건 전(9:28),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기 전(11:1)이 그때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기도에 관련된 비유 세 개를 유일하게 기록합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11:5-8), 과부와 재판장(18:1-8),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 비유입니다.
그중 두 비유가 누가복음 18:1-14에서 연속으로 이어집니다. 앞의 비유에서는 과부가 재판장에게 요구하는 청원이 기도로 다루어지고(1-6절), 뒤의 비유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드리는 각각의 기도가 대비됩니다(10-13절). 두 비유에서 관심을 받는 과부와 세리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무시를 당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매우 다른 속성들로 대비됩니다. 과부가 불의하지 않으나 가난한 여자라면, 세리는 부자이지만 악한 남자입니다. 불의하고 불의하지 않은, 부유하고 가난한, 여자이고 남자인 대조적 특성들은, 사실상 모든 사람을 망라합니다. 그런 점에서, 두 비유가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이 여자와 남자, 빈자와 부자, 의인과 죄인을 막론하고 누구의 기도라도 들으신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14절)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자리에 서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로 엄격히 구분된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는 죄인과 의인의 차별이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죄인이 의인의 자리에 들지 못한다는 원칙(시1:5)이 이런 방식으로 통용됩니다. 예수 당시의 성전이 지닌 배타적 차별성을 두고 오늘날의 교회가 앞다투어 비판하겠지만, 어쩌면 지금의 교회 역시 다를 바 없는 차별적 의식으로 뭉쳐 있고, 정죄와 멸시의 습성이 내재화되어 있는 곳은 아닌가 싶습니다.
바리새인이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 교만해서가 아니라, 의인과 죄인이 함께 자리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칭 의인이 아니라 유대 사회가 진심으로 존경을 보내는 의인들로서,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들보다도 경건한 삶을 사는 이들로 인정받았습니다. 이에 반해 세리는 죄인 그룹에서도 최악에 속하는 매국노로서 심지어 이방인들보다 못하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토색과 불의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니 세리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는’(13절) 것은 그가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의한 자가 거룩한 분을 바라볼 수 없다는 규정 때문입니다.
의인의 기도 – 바리새인의 기도 (11-12절)
유대인들에게서 장구하고도 보편적인 지지를 받아온 신조는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의인들은 자의적이거나 즉흥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기도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그들은 신앙 전통 속에서 공인된 기도문들을 암송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공인된 기도문들은 여러 “시편집”으로 수집되고 집대성되었는데, 이런 시편 기도문들을 인용하여 기도를 드리도록 권장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이런 기준에 훌륭히 부합하는 모범입니다. 그는 시편의 모든 기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감사”로 기도를 시작합니다(“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 11절). 이어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11절)라는 구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시편1:1)라는 시편 1편의 첫 구절을 따릅니다. 이런 식의 기도는 시편에서 흔히 발견됩니다. “내 입에서 무슨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나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랐기에, 약탈하는 무리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내 발걸음이 주님의 발자취만을 따랐기에, 그 길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습니다”(시17:3-5). 이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성찰의 고백입니다.
이 바리새인이 준수하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 또한 남다릅니다. 바리새인이 따르는 율법은 일주일에 한 번 금식할 것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 바리새인은 두 번의 금식을 수행합니다. 또한, 양식과 가축의 소득에 대하여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지만, 이 바리새인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언급들은 자랑처럼 들릴 수 있으나, 자신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을 정직하게 고하는 발설은 기도의 중요한 요소로서, 많은 시편의 기도들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니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룩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기도, 즉 의인의 기도로서 나무랄 데 없는 정석을 보여줍니다.
악인의 기도 – 세리의 기도 (13절)
이에 비해, 세리의 기도는 기도라고 인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리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그분을 찬양하거나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고 아뢰지도 않습니다. 마땅히 뒤따라야 할 회개의 언사와 용서의 간구도 없습니다. 모든 악의 근원인 세리 직을 그만두겠다거나, 하다못해 덜 착취하겠다는 다짐도 없습니다. 세리인 토색하여 모은 많은 재산이 있을 것인데, 그 재산을 어찌할 것인지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기도의 형식도 갖추지 못했거니와, 그의 진실성을 느낄 만한 기도의 내용도 없습니다. 단지 “불쌍히 여겨달라(i`la,skomai 자비를 베풀어달라)”(13절)는 한 마디로 이루어진 이 기도는 무성의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기도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형식이나 내용도 갖추지 못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 자체가, 그가 불의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의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은 ‘하나님이 악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신다’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는 선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이런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외면하신다고 알려집니다. 그가 가슴을 쳤다는 것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잘못을 청산하지도 않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도 없는 이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는 세리였다 (14절)
바리새인과 세리의 삶과 헌신과 기도 등 모든 점을 비교해 볼 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가 세리’라는 사실은 경악할 만한 모순입니다. 다른 요소들을 차치하고서 기도만을 놓고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토색과 거짓과 배반을 일삼는 세리가 뼈를 깎는 회개나 돌이킴의 결단도 없이,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당혹감을 무마하려고, 의례 바리새인의 기도를 두고 교만하다고 비난하고, 세리의 기도를 진정성과 겸손한 자세로 포장하는 해석하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세리의 기도를 좋은 기도의 예로 삼을 수 없을뿐더러, 백번 양보해서, 세리가 기도를 좋은 기도를 드린 결과로 의롭게 되었다면,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의로움을 얻는다고 여기는 바리새인과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 헌신으로 의로워질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세리의 의로움은 그의 기도를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선한 노력에 의해서도 아니요, 세리와 같은 기도에 의해서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다
병들지 않은 자에게는 의사의 치료가 필요하지 않듯이,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9절) 바리새인에게는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세리에게는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늘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그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더 의로운가를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누구에게 은혜가 필요한가를 보시는 분입니다. 또한 누구의 기도가 더 적절한가를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한 일꾼처럼, 의롭고 헌신적인 바리새인이 기대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에 합당한 칭찬과 보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상이 아니라 은혜이고, 의롭게 되는 것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자비는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필요한 자들에게 수여됩니다.
역전 :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14절)
이 비유의 주제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와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결론이 아닙니다. 기도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이 이 비유의 결론으로 주어집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큼 높아집니다. 세리의 기도를 높이 평가하여 추켜세우려는 사람 역시 똑같이 높아지고 맙니다. 의로워질수록 사람을 멸시하는 함정에 빠지듯이, 낮아짐을 주장하거나 겸손해지려는 열정이 강해질수록 높아져 버리는 올무에 빠집니다.
자신의 선택, 결단, 노력 등을 헤아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높아집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남다른 헌신을 바치려고 노력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리와 같은 비천한 기도를 드리겠다고 결단하는 사람 역시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세리와 같은 겸손한 기도를 드렸으니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는 생각조차도 교만합니다.
낮아지려는 다짐과 노력으로는 낮아질 수 없습니다. 나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내려놓은 사람, 즉 주인에게 모든 처분을 맡긴 종과 같은 존재가 낮아진 사람입니다. 낮은 자리에 앉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높거나 낮거나 아무 자리에라도 앉는 사람이 낮아진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고백처럼, “주님의 종이니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고 응답하는 사람이 그입니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낮은 곳을 채웁니다. 사람의 질서 속에서는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좋은 것을 얻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낮고 약하며 어리석은 자들 안에 고입니다(고전 1:27-28).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이 은혜인 한에는 어쩔 수 없이 아래로 고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흐르는 물이 돌출된 부분들을 깎아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 존재들을 무너뜨립니다(14절).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십니다(눅1:51-52). 마찬가지로, 은혜인 까닭에 어쩔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