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05) 예술 체험 쓰기 - ② 음악, 시의 혈육/ 시인, 문학박사 공광규
예술 체험 쓰기
Daum카페 http://cafe.daum.net/13housing/ 박원웅 (음악과 시와 낭만 ,1977)
② 음악, 시의 혈육
시의 혈육인 음악은 생의 어두운 밤의 달빛이라고 합니다.
시는 노래의 영혼이고 음악의 시원이어서 많은 시인들이 음악이나 악기에 관심을 갖고 시를 써왔습니다.
한 연주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악은 자신의 경험, 자신의 생각, 자기의 지혜이기에 자기가 살지 않으면 나팔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시인과 음악가는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와 음악은 한 몸이었습니다.
셀리는 「음악은」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습니다.
“음악은 부드러운 가락이 끝날 때/
우리의 추억 속에 여운을 남기고/
꽃 향은 향기로운 오랑케꽃 시들 때/
깨우쳐진 느낌 속에 남아 있느니//
장미꽃 잎사귀는 장미가 죽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침상에 쌓이듯/
이처럼 그대 가고 내 곁에 없는 날/
그대 그린 마음 위에 사랑은 잠든다.”
(셀리, 「음악은」 전문) 화자는 멋진 음악은 그것을 듣고 난 뒤에 오래 기억에 남고,
꽃은 시든 후에야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사람은 떠난 후에야 그립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잘 아는 시인들이 많습니다.
박몽구(1956~ )는 음악을 창작 재료로 가져와 현실과
역사와 자신의 삶을 깊은 의미의 숲으로 변주합니다.
그의 음악 소재 시는 작곡자나 연주가의 방황과 방랑,
외로움과 상처, 슬픔과 가난, 어둠과 소외의 선율로 고조되면서 우리들의 처지로 향합니다.
이를테면 학자금 마련을 위해서 밤을 세워가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써내려가는 바흐나,
장작을 사기 위해 병든 몸으로 밤새워 악보를 써대는 모차르트가 보여
이 땅의 가장들에게 동병상련의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잘 닦인 추암리 바다 모래처럼
잡음이 서걱거리는 엘피로
브람스의 현악6중주를 듣는다
북받치는 높은 음자리에서는
가끔씩 콧소리마저 흥얼거리며
첼로의 현을 문질러대는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거북하던 속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바늘귀만한 잡음에도
모두 채널을 돌리는 시대에
매끄러운 선율로 가득 찬 히페리온 버전도
장만해 두었지만
나는 잡음이 성성한 카잘스의
느리고 깊은 소리에 빠져든다
욕망을 지그시 누른 채
스승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
끝내 뱉지 못하고 몇 줄의 현에 실려 보낸
브람스가 살아 있는 낡은 엘피가
삼키고 있는 말이 좋다
보이지 않는 곳에 쌓는
뜨거운 것이 있기에
눈앞의 보석을 넘어 거친 식사를 넘어
실체에 닿을 수 있다고
짓누르고 있는 천장과 빚의 무게를
훌훌 털고 찬 공기를 넘어
폭설로 끊긴 산길을 넘어
추암리 앞바다의 일출을 떠올릴 수 있다고
카잘스의 굵고 튼 손이 말한다
제아무리 뭉칫돈과 기름진 식탁을 준다 해도
조국 카탈로니아의 총칼을 눈감아 주는
정치가들 앞에서는 결코 활을 잡지 않았던
카잘스의 콧소리와 함께 브람스를 듣는다
모든 말 다 삼킨 백지편지를 밤새 쓴다
―박몽구, 「백지 편지―브람스 현악6중주 제1번」 전문
화자는 카잘스의 브람스 연주를 듣고 있습니다.
창작자는 추암리 바다모래처럼 서걱거린다는 경험도 끌어오고,
스승의 아내를 사랑했던 카잘스 개인사를 시 속에 끌어옵니다.
그러나 이 시의 핵심 내용은 카잘스의 정치적 신념에
창작자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일치시킨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뒷문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제단 구석 검고 슬픈 짐승처럼 놓여 있던
피아노 한 대
피아노에 비친 아이는
피아노를 열고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얼었던 건반을 손가락의 체온으로 다 녹이기에
아이의 손은 너무도 작고 여렸지만
예배당의 냉기 속으로 울려 퍼지던 음들은
열 살의 아이가 가까스로 피워 올린 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뒷문이 열리고
사찰 집사가 노모를 모시고 나타나면
아이는 피아노를 닫고 내려와야 했다
제단에는 두 개의 낡은 방석이 놓여지고
무릎 꿇고 앉은 노파와 그의 아들은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또 하나의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은밀한 제사를 뒷문 계단에서 훔쳐보며
아이는 광기의 황홀함을 배우기 시작하고
냉기를 향해 피워 올렸던 음들은
다시 건반과 함께 얼어가기 시작했다
피아노의 검은 빛은
모자의 제사를, 그 길들여진 도취와 반복의 몸짓을
오래오래 말없이 비추어주고 있었다
피아노가 음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검은빛으로 빨아들인 몇 개의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반을 다시 울리기 위해
아이가 뒷문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밖은 반 음씩 어두워져 갔다.
―나희덕, 「음계와 계단」 전문
나희덕은 위 시에서 유년의 기억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예배당과 검은 피아노의 기억,
예배를 보는 노파와 그의 아들의 모습을 이야기로 엮고 있습니다.
“슬픈 짐승처럼 놓여 있던 피아노”라든가 “반 음씩 어두워져 갔다”는 표현이 좋습니다.
인상적이고 자극적인 예술가는 시인의 눈에 포착되어 한 편의 시로 탄생합니다.
스위스 출신의 나탈리 망세는 고전음악의 대중 접목을 시도하는 누드 연주자로 잘 알려져서인지
여러 사람이 그녀의 연주 모습을 보고 시를 썼습니다.
그녀를 제재로 시를 쓴 정윤천과 강희안의 시를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음악가를 창작 동기로 하여 어떻게 형상화하였는지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미안하다
나는 언제 옷 벗어부치고 시 써본 일 없었으니
나탈리 망세. 스무 살의 그 여자가, 벗은 몸으로, 눈부신 대낮 같은 겁 없는 육체의 순간으로, 흠씬 껴안아선, 힘주어선, 사람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할 때, 그녀에게 첼로가 단지 첼로뿐이었으랴. 사랑한다고 감히 주절거려본 적 있었는가. 그 앞에서 너를 제대로 벗어준 적 있었는가.
미안하다
시야.
―정운천, 「시에게 미안하다」 전문
나탈리 망세, 그녀는 다리를 벌리고 그 가랑이 사이에 첼로를 세워 품에 안고 연주한다. 알몸의 창녀가 무릎 꿇은 예수를 품에 안자, 당신의 손은 어디를 질척거렸던가. 고질적인 몸과 예수, 성경과 외설의 지퍼를 번갈아 더듬어 내리는 첼로는 권세였다. 보수적 낭설을 표방하는 클래식 성기였다. 그녀는 급기야 첼로의 나뭇결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나무의 싱싱한 무늬결을 따라 들어간 그녀가 옹이로 박혔다. 성근 이파리들과 비릿한 정액냄새가 묻은 나뭇잎을 털다가 음악의 메아리가 먼저 나오는 저녁, 나탈리 망세의 질 속으로 높은 잠자리 한 마리 한 마리 날아가는 신문이 던져졌다. 인터넷 소식에 귀 기울이던 누군가는 조만간 진보의 음계를 눈으로 읽게 될 것이다.
나탈리 망세의 첼로처럼 권세의 모랄은 다양하다. 그녀는 목사가 조직적으로 깎아놓은 최면의 입성을 벗어 던졌다. 그녀는 첼로와 함께 오르가슴의 활을 당기며 세상을 쏟아 놓았다. 무서울 정도로 어떤 목수는 잔인한 음부의 권능을 지킨다. 나탈리 망세, 그녀는 흩어진 말씀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첼로와 함께 그녀의 자궁속으로 밀어 넣었다.
―강희안, 「나탈리 망세의 첼로」 전문
4연으로 된 정윤천의 시는 알몸으로 연주하는 나탈리 망세라는
첼리스트의 연주 자세를 통해 온몸으로 시를 창작하고 있지 않는 자신의 창작 자세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강희안은 연주자가 알몸으로 첼로를 안고 연주하는 것을
창녀가 예수를 품에 안는 것으로 상상하여 시를 전개시켜 가고 있습니다.
<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공광규, 시인동네, 2018)’에서 옮겨 적음. (2022. 3.1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05) 예술 체험 쓰기 - ② 음악, 시의 혈육/ 시인, 문학박사 공광규|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