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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를 통과한 낙타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장)
여리고에서의 두 사건 (18:35-19:11)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9:51-19:27)의 마지막 경유지는 여리고입니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여리고를 지나시는 예수께서 시각 장애자를 고치셨다는 일화를 전합니다(마20:29-34; 막10:46-52; 눅18:35-43). 보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서 보게 하셨고, 눈을 뜬 그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는 이 치유 사건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상징적 사역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여리고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일화를 이어 소개합니다. ‘삭개오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동화 같은 일화가 그것입니다(19:1-11).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는 삭개오의 회심 사건이 예수의 모든 사역과 메시지의 총화인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불의하고 부유한 세리장 삭개오에게 생겨난 일은, 누가복음이 특별하게 강조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성취되는 실례의 사건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18:27)
여리고에 이르기 직전에, 예수를 찾아온 부자가 있었습니다(18:18-30). 세리장 삭개오와는 달리 흠잡을 데 없는 깨끗하고 의로운 부자인 그는 ‘영생을 얻는 길’을 묻고자 예수께 왔다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다가 돌아갑니다. 의로운 부자가 돌아간 후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18:25)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이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고 반문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18:27)고 대답하십니다.
여리고의 삭개오 이야기는,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그 일의 실례입니다. 삭개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부자’, 다시 말해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입니다. 완전하리만치 의롭고 경건한 부자에게 불가능했던 구원 사건이 불의하기 짝이 없는 부자 삭개오에게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 실례는 심각한 이변이며 충격입니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이 사건은 사람은 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키작은 삭개오(2절)
앞장인 18장의 한 비유에는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는 세리가 등장합니다(18:9-14). 그는 불의한 자로서 성전 경내 이스라엘의 뜰에 설 수 없는 부류이며, 감히 거룩한 곳인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는 죄인입니다. 제의적으로는 불결한 자, 민족적으로는 아브라함 자손의 자격을 박탈당한 매국노, 도덕적으로는 약탈자라는 낙인이 세리를 따라다닙니다. 삭개오는 일개 세리를 넘어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세리장이니, 그는 자신의 개인적 불의만이 아니라 세리들을 통해 저질러지는 공인된 약탈 체제에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18장의 세리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탄식하기라도 하지만, 삭개오는 반성이나 회개를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수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아무도 이 세리장을 삭개오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란 이름 대신, ‘키 작은 사람’이라는 말이 그를 따라다니는 별칭이 되었습니다(3절). “키”로 번역된 ‘Helikia’는 “나이” 혹은 “성숙함” 등으로도 사용되고, “작다”에 해당하는 ‘mikros’에는 “중요하지 않다”, “어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키 작다”는 말은 ‘어린아이’로 읽힐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어린아이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이지만, 고대 시대의 어린아이는 ‘사람이 덜 된, 미숙하고 인격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인을 어린아이라고 부르는 언어 관습은 그를 지극히 경멸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키 작은 사람으로 삭개오가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신체적 특징을 넘어, 삭개오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여리고 사람들의 적개심을 드러내는 정황을 반영합니다.
예수께 다가갈 수 없는 삭개오(3절)
앞장인 18장에는 어린아이에 대한 일화도 있어 눈길을 끕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왔을 때,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으며 박대했습니다(18:15). 일견 지나친 타박으로 보이는 제자들의 대응이, 실상은 매우 보편적입니다. 열두 살이 되어야 아버지를 따라 성전에 갈 수 있다는 규정에서 보듯이, 어른들이 모임에 아이들이 기웃거리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키 작은 (어린아이) 삭개오는 예수를 둘러싼 어른 무리로부터 배제를 당해서 예수께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이 배제는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고의성을 띤 배타 행위입니다. 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막아서는 행태는 한 번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있었고, 소리 질러 예수를 부르는 맹인의 외침을 제지하던 군중들이 있었지요. 똑같은 경우가 직전에도 있었지요. 여리고의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맹인이 예수를 만나고 싶어 예수의 이름을 소리높여 불렀을 때, 무리가 야단을 치며 제지했었습니다(18:35-43). 하지만 더욱 크게 예수를 향해 소리쳤던 맹인처럼, 삭개오 역시 예수를 보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 (18:17)
사람들의 장벽에 막혀버린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갑니다. 나무를 타는 것은 애들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으로서, 명예를 중요시하는 당시 문화 속에서 어른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삭개오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장벽을 헤치고 작은 사람 삭개오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순수한 사람)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십니다(5절).
어른들에게 밀려난 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셔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18:16-17)고 말씀하셨던 예수이십니다. 그 예수께서 삭개오를 찾으시던 그때, 삭개오는 어린아이처럼 나무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우습고 미숙한 삭개오의 모습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18:17)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내려오라’는 예수의 말씀에 즐거워하며 급히 내려오는 삭개오의 행동 또한 그렇습니다(6절)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삭개오가 예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삭개오를 부르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양이 목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찾았다는 비유의 의미와 동등합니다(눅15:4-6). 여리고에서 만난 눈먼 거지에게 예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18:42), 보통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이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으십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경우는, 삭개오가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삭개오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지 않고,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을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바라시는 것은 죄 고백, 회심, 새 삶으로의 다짐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내가 네 집에 묵고 싶다’는 것 하나입니다. 이것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부탁입니다. 양을 찾은 목자와 아들을 찾은 아버지가 죄의 회개를 요구하는 대신 “잔치를 벌이자”고 권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의 거처라고 모두가 멀리하는 삭개오의 집에 예수께서는 머물고자 하십니다. 따르고 있는 군중들의 반대와 야유, 실망을 무릅쓰고(7절) 삭개오의 집에서 잔치를 여시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이며, 그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 예수께서 오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10절).
“내 소유의 절반을 … 주겠사오며 … 갚겠나이다”(8절)
그리고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무신다는 것이 모든 반전의 이유가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머무실 만한 곳으로 자신의 집을 치웁니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이 빼앗은 것을 네 배씩으로 갚습니다(8절). 이는 율법이 정한 규정 이상으로서, 이대로 실행하면 삭개오는 빈털터리가 됩니다. 이는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요구하신 조건이나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를 자신의 집에 모신다는 기쁨 하나로, 삭개오는 온갖 비난을 견디며 악착같이 모아온 재물 전체를 처분하는 철부지 결단을 감행합니다. 이런 식의 결정을 내리는 삭개오는 여전히 어린아이입니다. 평생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의로운 부자에게 불가능했던 일이 어린아이 삭개오에게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9절)
자신의 재산을 다 처분하는 과감한 결단으로 삭개오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많은 재산으로 구원을 산 셈이 됩니다. 하지만, 구원은 은혜이며, 은혜는 사고팔거나 거래할 무엇이 아닙니다. 은혜는 이미 예수께서 나무 위에 있던 삭개오를 찾으셨을 때 아무 조건 없이 주어졌고, 많은 이들의 수군거림을 뒤로 하고 삭개오의 집에 머무르심이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재산을 처분하겠다는 삭개오의 결정은 자신이 받은 은혜와 구원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삭개오의 결단이 삭개오의 집에 예수께서 들어가심으로써 생겨난 열매라는 점에서, 이 역시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삭개오의 독차지가 아니라, 그의 집이 누리게 됩니다. 구원은 한 개인의 차원에 갇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음으로 인해 그의 후손과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창12:1-3). 종들과 일꾼들을 포함하는 삭개오 집안의 모든 식솔들과 이웃의 가난한 이들 모두에게 구원의 파장이 흘러 닿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9절)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경건한 이들이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왔을 때,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호통을 쳤습니다(3:7). 이어서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3:8). 스스로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자격을 얻으려 했던 부자 관리는 실망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다만 예수를 기쁘게 모셔 들였던 삭개오의 집에는 구원이 이릅니다(9절). 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역사가 실현된 것이지요.
삭개오가 부르기 전에 예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고, ‘네 집에 머물고자 한다’고 삭개오의 마음을 두드리셨습니다. 마치 길 잃은 양을 찾는 일에 무한정의 책임을 지는 목자와 같이, 예수께서는 작은 자요 잃은 자인 부자 삭개오를 기어코 구해내십니다. 모든 구원은 주님의 무조건적인 용납으로 빚어진 신비이면서 기적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낙타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던 의로운 부자는 실망하고 말지만,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은(‘주여 보시옵소서’, 8절) 낙타 삭개오는 바늘귀를 통과합니다. 그것은 낙타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