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10) 사랑하기 때문에 - ④ 당신을 생각하는 분량만큼/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
사랑하기 때문에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1004buyer/ 2016,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
④ 당신을 생각하는 분량만큼
어린 왕자와 헤어지면서 여우는 사랑의 비밀 한 가지를 더 가르쳐줍니다.
“이제 내가 비밀을 말해 줄게. 그건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거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네 장미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기울인 시간 때문이야.”
“내가 내 꽃을 위해 기울인 시간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그 말을 기억하기 위해 되뇌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리고 있어. 하지만 넌 잊지 말아야 해.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해. 넌 네 장미를 책임져야 해….”
책임이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사랑을 ‘책임’이라고 부를 때 많은 이가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부당하게도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낡고 늙은 이데올로기처럼 말이죠.
그러고 보면 참 알 수 없는 게 사람이고 사랑입니다.
그렇게 사랑해놓고, 우리는 자유로우면 구속을 원하고, 구속되면 또 자유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관계가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관계가 구속을 의미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구속되어 사는 겁니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면 “자립하고 싶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 이제 집에서 나갈 거야.”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하지만 자립은 없습니다.
아무 의존 관계가 없는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자립이란 부모라는 특정한 구속 관계로부터 벗어나되
자기가 독립적으로 다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뜻할 따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구속을 택할 것인가 하는 자유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A라는 구속을 택했다면, 그것은 A 아닌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택하는 아주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진리에 구속된다는 것은 거짓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구속되어 다른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한 사람만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유롭습니까.
구속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사랑입니다. 선택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상대방의 자유를 구속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길들이고 길들여진 충분한 시간을 기울여서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서로 생각하고 생각하며, 사모하고 사모해서 계약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혼부부들에게 결혼 축가 대신 나눠주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 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 별이 반짝이듯 꿈꾸는 사람아.
―허형만, 〈사랑론(論)〉, 《첫차》 (황금알, 2005)
우리말 역사에서 ‘사랑하다’와 ‘생각하다’가 원래 한 뜻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사랑’이란 우리말의 어원은 확정된 바가 없는데,
‘생각하여 헤아리다’라는 뜻의 ‘사량(思量)’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아마도 이 시인은 내친 김에 ‘사량(思量)’을 ‘생각의 분량’으로 풀어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런 걸 모르더라도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은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 그를 생각한다는 것일 테니까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은 많이 생각한다는 것이고 많이 생각난다는 건 그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테지요.
오랜 세월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사랑입니다.
“네 장미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기울인 시간 때문이야”라는
여우의 말이 바로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사랑하다’는 ‘생각하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순간의 어떤 열정, 눈멀고 귀가 먼 어떤 상태적인 형용사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열렬히 생각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바다와 같이 넓더라도 출렁이되 넘쳐서는 안 됩니다.
절제와 충만이 함께하는 생각의 바다여야 합니다.
또한 때로는 눈부신 산맥과도 같고, 그러다 슬플 때는 우물처럼 한없이 깊어지기도 하고,
행복의 절정을 맛볼 때는 바르르 떠는 꽃잎처럼 전율도 해보는 것이 사랑이지요.
요컨대 그대 생각으로 내 영혼을 채우는 것이 사랑이란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빈 영혼을 무엇으로 채운답니까?
“마음을 비웠다”라는 말을 저는 잘 안 믿는 편입니다. 마음이 잘 비워지질 않더라고요.
마음은, 영혼은, 채우는 겁니다. 채우는데 뭘로 채울까가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선한 것, 얼마나 귀한 것,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으로 채울까.
그런 것들로 채워진 삶은,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얘기합니다. 사랑이란 비어 있는 영혼을 그대 생각으로,
그대와 함께한 생각의 바다와 산맥과 우물과 나무로 채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물녘 창가에 앉아 반짝이는 새별을 보며 조용히 꿈꾸는 그대 생각으로 내 비어 있는 영혼을 채우노니,
아, 사랑은 정말 아름다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랑은 책임인 것입니다.
오랜 시간 생각하고 함께해온 그 사람을 책임지고,
그 사람에게는 나를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란 말입니다.
부당한 억압이나 고통스러운 책무가 아니라 아름다운 의무이자 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관계니까요.
자유롭고 아름다운 구속이니까요.
오랜 시간 서로 길들이고 인내하고 생각하며 책임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대로 인해, 그대를 위해, 내 스스로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하는 거니까요.
마침 신형철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훌륭한 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처럼,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는군요.
물론 그걸 아는 분들은 대개 이미 꽤 훌륭한 사람들이죠.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 시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희망이 있습니다.
당신을 길들여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시가 만들어줄 겁니다.
시가 얼마나 여우인데요.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3.1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10) 사랑하기 때문에 - ④ 당신을 생각하는 분량만큼/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