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은 나는 술 생각이 난다. 버릇처럼 떠오르는 술이다. 남들은 한심한 작태라 할 것이지만 나는 그런 내가 좋다. 우중충한 분위기의 서정을 저밀 줄 아는 삶이 내게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화사한 봄볕을 달리 마다한 적은 없지만 그간 비와 술에 연을 늘인 적이 많았다. 함수관계와도 같은 연상의 것은 아마도 내 인생에 적잖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의 서정은 말하여 처량함이고 다분히 운명적이다. 벅차다 할 것도 아쉽고 후회스런 것도 자릴 차지할 것이다. 주머니에 들어선 서푼 동전 마냥 따라붙는 현실의 빈곤함이다. 비와 술은 음울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그런 서정이란 또 나의 어느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어릴 때의 일이다. 되 박으로 파는 성냥더미가 싼 것 같아 동생과 나는 이발 비에서 남은 돈을 모두 모아 성냥개비를 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종이봉투가 다 젖어 찢길 상황에 이르러 동생은 참지 못하여 울고 나는 런닝을 벗어 종이봉투를 감싸 쥐었다.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는 오히려 내 의지의 힘이 되었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형제는 울며 빗속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억울하였다.
그때부터 나의 비는 줄곧 운명적이었다. 비는 운명처럼 내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젊은 날 내 처지에 맞다 싶어 비오는 날 으레 찾아간 것이 순대집이다. 기말시험을 끝내고서도 친구들을 군대에 보낼 때에도 여인과 헤어져 막막하다싶을 때도 돈이 생기면 나는 아쉬움과 후련함을 따로 구분하여 따질 것 없이 비와 술 그리고 순대의 함수관계가 자동 성립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순대 먹는 날은 비가 내렸고 비가 내리니 술은 달았다. 술이 달면 순대가 떠오르고 그런 날은 비가 안와도 마음에서는 당연 비 같은 서정이 살았다. 가난한 인생에 부합되도록 짜인 함수. 지금 그런 내가 고맙다. 무릇 버릇처럼 되어버린 가난의 느낌이다. 순대 집처럼 서민의 애환을 담은 집은 없지 싶다. 진한 삶 냄새 핏발 선 행상 꼬깃꼬깃한 돈 얘기가 그곳에 모인다. 뿌연 막걸리 잔 들어 갈증 삭이는 추레한 형체 그 속에 내가 또 있다.
옷깃에 묻어 버린 진땀 하나 둘 몇 잔 술 순대국물 속에 웃고 장대비 속에 운다. 그렇게 착한 사람 모진 사람 뒤엉켜 내 잘났다 못났다 떠들다 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그러기에 잔을 마저 비우다 바깥을 쳐다보며 하는 소린 모두 같다. 차라리 비야 더 와라...
십여 년 전 어느 회사의 제작검사를 나간 적이 있다. 감독이니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하지만 찾아간 곳은 그렇지 않았다. 다 쓰러져가는 공장 벽엔 강제철거 죽음으로 사수하겠다는 말이 무성하였고 그 살벌한 느낌대로 작업자들의 눈은 퀭하니 쑥 들어가 어디고 잘못 걸리면 쑥대밭을 만들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두어 달 돈을 만져보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대번에 들었다. 하지만 재재하청을 받은 것이니 계약위반으로 말이 안 되는 현실이었다.
원 계약자를 불러 세워 잘못된 일이라 할 것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였다. 그나마도 겨우 얻은 일감인데 놓치게 되면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사수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어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엄격하게 제품 검사를 하였다. 한 두 시간 이면 끝 날 것을 그들을 믿지 못하니 저녁까지 하나하나 따져가며 챙겼다. 나의 지독함에 그들은 혀를 내두르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도 살고 나도 살아나기 위해서는 제품은 온전해야 할 것이었다.
검사가 끝 날 무렵엔 부천의 어둑한 판자촌 뒷골목은 이미 지쳐있었다. 그들과 한 끼 저녁이라도 같이 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검사를 도와 준 조공에게는 꽤 미안하였다. 그들 또한 철저하게 검사는 하여 힘은 들었으나 합격은 한 것이라 좋았던 것인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공장장이 내게 말하였다. “감독님! 오소리감투 들어보셨어요. 아주 기가 막힌 집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산에서 사는 오소리인줄로만 알았다.
그들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그러하고 하여 묵묵히 그들의 뒤를 쫓는 나였지만 내심 불안하였다. 야생의 것이라면 한 번도 먹어본 적도 없는데 큰일이다 싶었다. 그런데 가보니 그곳은 순대 집이었다. 내가 늘 찾는 허름한 뒷골목의 장터가 부천에도 있었다. 오소리감투가 무엇인지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돼지를 잡을 때, 주의를 소홀히 하면 어느 부분의 맛 좋은 고기가 자꾸 어딘가로 사라져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는데 그 부분이 바로 돼지의 위장으로 오소리감투라 부른다고 하였다.
쫄깃하면서 구수한 맛이 나는 아주 맛 좋은 부위인데, 돼지 한 마리에 그 위장은 한 개 뿐이므로 서로 차지하려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 이름이 '오소리감투'가 된 것도 한번 사라지면 도무지 행적을 알 수 없다는 비유이며, 오소리라는 짐승이 굴속에 숨어버리면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 특성과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이 마치 벼슬자리를 다투는 모습과 흡사하여 '감투'라는 별칭이 더 붙었다는 말이다. 묘하게도 돼지 위장의 겉모습도 두툼한 빵 떡 모자와 흡사하여 '오소리감투'라는 별칭이 잘 어울린다.
나는 그 말 뜻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를 제대로 알아봐준 그들이 또 고마웠다. 부담 없이 그들과 하나 되어 밤새 어울렸다. 난 그날 두고두고 잊지 못할 눈물의 공장장을 보았다. 헐리는 날 까지 투쟁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해당되는 말도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그 정도면 양반인 셈인 것이었다. 그는 근근이 하루를 버는 가난한 영세 임대 사업자였다. 기술 하나로 문래동에서 잔뼈 굳어 그곳까지 온 그였다.
우리 제품을 납품하는 날이면 손 탁탁 털어 밀린 임금 쥐어주면 그는 무일푼의 삶으로 돌아갈 처지였다. 그러기에 그의 오소리감투는 꽤나 비싸고 값진 접대였다. 나는 감독을 열심히 하여 그로부터 진정으로 감투를 받은 격이 된 것이었다. 나는 순대 집에 들러 주문을 하려면 그에게서 배운 대로 오소리 오소리 한다. 허나 이후 그를 본 적은 없다. 언젠가 그곳 공장지역을 간적이 있었는데 그곳은 중동아파트단지로 변해있었다.
지금도 나는 스테인리스를 손으로 다루어 미8군에 주방용품을 납품하였다는 그의 굽은 손을 잊지 못한다. 나에게 오소리감투는 그야말로 그로 인하여 꽤나 멋있고 훌륭한 감투이기에 지금도 여전히 나와 손잡고 일이 잘 이루어진 날엔 감투를 쓰러 순대 집에 가곤 한다. 그런 내가 요즘 잘 가는 곳은 유성의 순대집이다.
내 사는 동네 좁다란 순대집 하나. 그 집을 언제부터 다녔는지 그 세월 처음이 아련하다. 국밥 이천 원. 마음 내키면 공짜도 줬던 할머니 어느 날 조용히 내 논 성금이 그 집 간판이다. 지금 함흥 할머니는 없고 주먹 꽤나 섰던 아들 땀 국물 흘린다. 그 집 종업원은 모두 갈 곳 없는 할머니.
할머니!! 순대 작은 것 한사라 하고 김치 좀 더 줘요. 주문 다 기억 못하는 런닝 하나 걸친 할머니 또 김치만 가져온다. 오늘같이 장대비 후루룩 내려치면 뿌연 막걸리 잔 들어 갈증 삭이는 추레한 삶들 그 속에 내가 또 있다. 나와 술, 순대 집 그리고 비는 모두 한통속인 셈이다. 그 함수풀이는 나의 영원한 고리이고 숙제임에 그래서 또 내가 좋다. 감투는 오소리감투라면 아마도 나는 그것으로 평생 족할 것이다. (이글을 경주 양성자 가속기 감리 아저씨들께 드린다. 잘 얻어 먹은 감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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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소리 감투. 참으로 안성맞춤인 이름입니다.
저와 비의 정서는 비슷한데 함수풀이가 좀 다르네요. 술을 마시는 대신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보며 그 정서를 대신합니다.
매운 것, 알콜을 제 오소리 감투가 거부하니요.
비처럼 촉촉히 젖어드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