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너른 집 / 이동민
내 유년의 기억에는 마당 너른 집이 또렷하게 보관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찾아갔던 큰집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담장 하나가 앞을 가로 막았다. 담 주변에는 조그만 화원도 만들어져 있었다. 봄철이면 눈이 부시도록 붉게 피어나는 홍도화 나무가 있었고, 밑둥이 썩어져 내리는 늙은 석류나무도 있었다.
그담 너머는 너르디 너른 마당이었다. 제삿날이라서 무엌에서는 종일토록 연기가 피어올랐다. 집안의 머슴들은 떡시루를 들고 마당을 가로질러 바쁘게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겐, 안채의 큰방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바라보던 큰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의 창고에서 가장 선명하다. 세월이 오랫동안 딛고 내달린 탓에 골기와집 처마는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지고 있었지만, 소복 차림의 큰어머니는 유난스레 화사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반기듯이 잡시 웃음을 띄었지만 이내 ‘일우가 왔구나’ 하고는 옅은 웃음을 거두어버리곤 하였다. 웬지 큰집의 마당은 너무 넓고, 황량해 보이기까지 하였지만 큰엄마의 눈빛은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래선지 내 유년의 뜰이라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제삿날의 마당이 온통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웃는 듯 하는 듯하던 큰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진다.
눈물을 글썽이는 누나의 손에 이끌리어서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고 너른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는 내가 이 집을 떠나온 지 꼭히 12년 만이라고 하였다. 제삿날 때처럼 기우뚱한 골기와집의 안방 미닫이문 너머에서 큰어머니는, 아니 엄마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마음 한켠에 핏덩이적 아이를 떠냐보냈던 죄책감으로 눈물을 머금으면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선뜻 그 어머니에게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니 다가가 지지가 않았었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흐릿하지만 사랑채의 모퉁이에서 훌쩍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의 집에 돌아온 건데 왜 울어 하던 말소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유년의 추억에는 담장을 따라 우리 집을 감싸며 줄지어 서 있던 감나무며, 홍도나무에 돌라갔던 일들도 남아 있다. 그러나 끼니 때 즈음이면 부리나케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횅하니 달음질쳐나가곤 하였다.
뒷머리에는 “얘야 밥 먹고 가거라”는 큰어머니의 목소리가 바짝 달라붙어 따라오곤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너른 마당은 그냥 내 곁을 스쳐지나가기만 하던 이방의 땅이었다. 그렇지만 너르기만 하던 낯선 그 마당에서 나는 내 청소년기를, 내 사춘기를 고스란히 보냈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아가면서 새로이 시작한 내 생활은 중학교에 다니는 것으로부터였다. 어머니는 내가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나는 도무지 낯설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제일 난감한 일은 여지껏 큰어머니라고 불렀는데, 엄마라고 불러지지 않는 일이었다. 당연히 엄마라고 불러야 하지만 그 말이 입안에서만 뱅뱅 돌아다닐 뿐 도무지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바뀐 환경이 내게 주는 절망의 무게는 너무 무거웠다.
학교가 파하면 집으로 오기보다는 곧잘 뒷산으로 오르곤 하였다. 어떤 날은 아예 학교를 빼먹고 하루 종일을 산에서 뒹굴면서 보내기도 하였다. 산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우리 집은 온통 푸른 나무들에 둘러쌓여 있었다.
당쟁이넝쿨은 온 담을 뒤덮고 있었고, 너르던 마당도 나무들 속에 파묻혀 잠겨 버렸다. 더욱이 홍도화가 필 철이면 온 집이 꽃 속에 숨어버리곤 하였다. 산에서 내려다보았던 그때의 우리 집은 지금의 내 회상 속에서 너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학교에서는 책값이며, 등록금의 독촉이 이만저만 심한 것이 아니었다. 낯설기만 한 큰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우리 집 형편을 너무 잘 알고 계시던 담임선생님은 “이 녀석, 너 돈을 엉뚱한 데 써버렸지. 너네 집에서 돈을 내지 않으면 어느 집에서 돈을 내겠어.” 라면서 윽박질렀다.
학교도 곧잘 빼먹는 나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길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 아이가 학교생활이 어떠하냐는 물음에, “그 농땡이……”하고는 뒷말은 하지도 않더라고 하였다. 내게 그 말을 전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고, 어머니도 그 이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까지 어머니로부터 매질을 당한 기억은 아무리 뒤져 보아도 떠오르지 않는다. 학교도 빼먹고, 담임선생님의 눈 밖에 난 이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도저히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아침에 책가방을 메고 나오면서 종이쪽지에다 책값과 등록금의 액수를 촘촘히 적어서 미닫이문의 틈새로 살며시 밀어 넣었다.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종이를 집어든 어머니가 엄마라고 부르면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서 있기만 했고, 어머니도 종이쪽지를 든 채 아무 말도 않고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서 있기만 하다가 결국은 엄마를 부리지 않고 휙 돌아서서 그 마당을 가로질러 집을 나섰다. 그 마당을 지나오는 길이 얼마나 길고 멀었는지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까 그때의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팟는지 저리도록 깨달았다.
지금도 나는 술이 거나해지면 회한에 젖어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속이 시리도록 울곤 한다.
내가 의과대학에 합격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 어머니의 얼굴을 스쳐가던 환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길게 한숨을 쉬기만 했고, 밤늦게까지 불이 켜진 안방에 들러보면 잠을 이루지 못해 앉아 있곤 하였다.
그날도 어머니는 미닫이문 너머로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내 손을 덥썩 잡으면서, “그래 너는 공부만 해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 학비는 내가 감당하마.”라고 하였다. 그랬었다. 어머니는 내 학비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가 의사가 되고 난 뒤에서야 “네가 시험을 보러 갔을 때 그만 떨어지게 해주십시오.”라면서 천주님께 기도를 하였다고 하였다. 내 글에서도 종종 표현을 하였지만, 농삿집에서 어머니 혼자서 형님들로부터 줄줄이 대학 공부를 시켰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더군다나 그때는 의과대학을 보내려면 웬만한 시골집 재산으로는 거덜이 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도 훗날에 들려준 이야기였다. 내가 학교를 다닐 적에 토요일 오후에 집에 내려갈 때는 마당으로 들어서는 내가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다고 하였다. ‘저 녀석이 또 돈을 가지러 왔구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하였다고 하였다.
지금도 나는 학교를 다닐 때 어렵고 힘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버스비마저 바닥이 나면 대명동에서 학교까지 걸어다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때의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어찌 그런 걸 고생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을 때는 형님들 모두 직장을 따라서 시골의 집을 떠나 있었다. 어느 해였던가. 무서리가 내릴 즈음의 오후에 대문으로 들어선 내 눈에는, 우리집 마당에는 떨어진 잎들이 바람 따라 구을다가 여기저기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어내던 서 서방도 우리 집을 떠나간 지 여러 해가 되었었다. 언제나 어머니의 온기가 넘치던 안방의 미닫이문은 그날따라 왜 그리도 썰렁해 보이는지.
그래도 여전히 드르륵 문이 열리면서 돋보기를 낀 어머니가 성경을 손에 든 채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읽고 있던 성경책을 내려놓으면서 “너 오니?”하였다 방안에 들어사자 나를 올려다보면서도 옛날처럼 손에 쥔 걸레로 방바닥을 이리저리 훔쳤다.
요즘은 성경책으로 소일한다고 하였다. 이웃 할매(할머니)들과 민화투나 치는 것이 낙이라고 하였다.
“엄마, 식사는…….” 더 이상 목이 메여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할망구 혼자인데, 뭐.”
“엄마, 그만 고집 부리고 형님댁으로 옮겨.”
“그래야겠제. 여길 떠나면……, 앞밭에 고추도 심어야 하는데……” 하기야 이곳을 떠나고 싶을까. 욕심 같으면 예처럼 아들들을 모두 데리고, 이른 새벽마다 마당도 쓸면서 살고 싶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들녘 저 너머의 정거장이 가물가물 보인다. 그래서 나는 고향의 기차역에 내릴 적마다 먼저 우리 집을 찾는다. 더욱이 홍도화가 핀 봄날이면 우리 집은…….
지금도 너무 그립다.
내가 기차를 타러 역으로 갈 때는 어머니는 동네 입구에 있는 돌무지 위에서 나를 배웅하였다. 역까지 가면서 되돌아 볼 적마다 꿈쩍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몇 해 전의 추석날에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면서 고향 마을을 지나쳤다. 형수님들께서 옛날에 우리가 살았던 집을 들러보고 싶어 하였다.
허물어질 듯하던 골기와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소우리를 겸하였던 사랑채도 없어지고 벽돌로 지은 개량주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당은 예 그때처럼 넓었고, 옛날의 담장 자리에는 석류나무도 서 있었다.
우리가 멈칫거리면서 마당으로 들어서자 집주인은 낯선 손님들에게 의아해하면서 걸어 나왔다.
“예전에 저들이 이 집에서 살았어요.” 하니까 그제서야 맑은 모습으로 “아, 그러세요?” 라고 말하였다.
형수님들은 여기가 옛날에 향나무가 있던 자리라고 했고, 여기서는 감나무가……, 부엌 앞에는 꽃나무가 우리 키보다 훨씬 높았는데, 라면서 마당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여기 석류나무도 있네, 그때는 썩었었는데…… 그때 나무의 아들뻘이겠다.” 하고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주먹만한 석류를 여러 개 따주었다.
‘그래, 어릴 적에 있었던 나무들은 사라지고 없구나. 그리고 어머니도 계시지 않구나.’
나는 속으로 “엄마”하고 불러 보았다. “엄마 등록금을 빨리 갔고 오래요.”라고 말해 보았다.
첫댓글 <백년동안의 고독>의 작가 마르케스의 <자서전>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무너진 옛집을 말없이 둘러보던 작가와 어머니. 그 때 그 집 하녀였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거리를 좁혀 오다가 좁은 논길을 서로 스치듯 지나간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양 외면한 채. "그들은 서로 다른 세상으로 걸어 들어갔다(They stepped into the another world)"
함축적인 글이라 그런지.. 어머니 큰어머니 관계에 대한 암시를 좀 주었어면 더 재미있는 글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