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 꿈꾸는 교회 마태복음 16장 13-15절
여러분들은 어떤 교회를 꿈꾸십니까? 오늘 전교인 회의도 있고 올 한해의 목회를 준비하면서 지난 한 주간동안 나는 어떤 교회를 꿈꾸며 목회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이 나오는데 답을 주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생각과 사고를 열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더러는 나를 예언자라고도 하고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는데 너희들은 나를 왜 따르느냐 너희들은 어떤 세상을 꿈꾸느냐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 너희들은 무엇에 너희들의 모든 것을 거느냐? 이런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교회를 꿈꾸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공동체적 삶을 꿈꾸십니까? 신앙을 어떤식으로 성숙시켜가고 싶으십니까? 자라나는 세대를 신앙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키우시고 싶고 삶을 어떤 식으로 관계하며 언젠가는 삶을 마무리할 때가 오는데 삶을 어떤 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으십니까?
권정생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나님이라는 이야기에 보년 권정생 선생님께서 평소에 꿈꾸셨던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뽀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명에서 백명 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마루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예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00교회라는 간판도 안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 집’이라든가 ‘심청이네 집’이라든가 ‘망이네 집’같은 걸 걸고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예기도 하고, 성경책 예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 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오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
화려한 형식보다는 삶이 교차하고 경계선이 없고 성찰과 잔치가 있는 따듯한 교회의 이미지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집이 교회 옆에 있었습니다. 담벼락을 같이 교회랑 썼습니다. 저희 집에서 담을 넘으면 교회고 교회에서 담을 넘으면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이 교회 아지트였습니다. 교회에서 놀다가도 밥 먹으러 저희 집으로 오는데 제 친구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커서 보니 어머님이 고생 많으셨겠더라구요. 어머님은 늘 별 말씀도 안하시고 친구들이 오면 그 친구들 밥상을 다 차려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목사님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한번은 놀다가 목사님이 제일 아끼고 좋아하시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부러뜨렸습니다. 저는 천벌을 받을 거라 생각해서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일 있으면 그냥 바로 직진해서 목사님께 알려주는 아이들이 반드시 있잖아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나오셔서는 울고 있는 저를 안아주시면서 괜찮아 경환아 나는 이 나무보다 너가 더 소중해 괜찮아 괜찮아 다친데 없니 하시는 겁니다. 목사님은 늘 따뜻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목사님 이야기는 누구네 집이 어려운데 어떻게 하셨데 어떻게 하셨데 하는 미담들이었습니다. 아 목사가 되면 저런 일을 하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저희 어렸을때만해도 한국군이나 베트남 전에 참여하셨던 상의용사분들이 전쟁에서 다친 몸을 이끌고 동네에서 큰소리 치면서 다니시던 경우가 많았는데 교회에 그런분들이 자주 오셨었어요. 때로는 목사님이 얻어 맞기도 하고 그러셨는데 늘 인자하고 밥먹이시고 따뜻한 모습이셨습니다. 새벽예배부터 수요, 금요예배까지 빠진 적 없이 다녔지만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따뜻하게 품는 거였습니다. 삶에 지친 서로를 따스히 품고 다 쏟아낼 수 있도록 때로는 기다려주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고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나는 네가 더 소중해 하면서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그런 하느님의 품같은 곳이 교회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면서 한가지 달라진 건 옛날에는 다양한 모습으로 챙겨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수록 정말 중요한 건 아무리 다 줘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이 모든 위에 사랑의 마음을 더하는 교회를 여전히 꿈꿉니다.
특히 가장 약한 사람들의 넓은 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많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뜻밖의 시련을 만나거나 오랜 깊은 상처속에서 망가질때로 망가진 모습으로 공동체를 만나는 경우가 종종입니다. 사람인지라 좋은 모습만 있는 게 아니죠. 상처로 인한 아픔도 있고 가시도 있고 이런 분들이 회복되는 데는 적지않은 기다림의 시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시선과 존중의 품이 필요합니다. 잘 회복되어 때로는 그런 분들이 교회를 지키는 또다른 지킴이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스스로의 힘을 찾아 회복되어 자유롭게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떠나든 머물든 지친 서로가 다시 설 수 있는 위로와 회복의 안식처, 하나님의 품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여전히 교회에 남아있는 이유중 하나입니다.
80-90년대 대학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저는 저 혼자 선하고 착하게 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개인이 아무리 선하고 착해도 사회 구조적인 악이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한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평생을 활동하시던 분이 생애 마지막에 권력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이유도, 가난한 이들의 피고름까지 착취하고 빨아먹는 당시 유대종교권력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치들의 상을 둘어엎으시며 판을 뒤엎으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18세기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을 외면한채로 교회는 절대로 구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신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님께서 영국 성공회를 박차고 나와서 거리로 탄광으로 노동현장으로 나아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과 밖의 경계를 넘어서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사회 구조적 악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있는 곳에 무한 책임을 느끼며 함께 손잡고 연대하고 함께 울면서 함께 살아가는 교회를 여전히 꿈꿉니다.
저는 신앙공동체로써의 교회는 담벼락 없이 많이많이 열려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지방회 장로님 교육에 가서 지혜서를 가르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혜는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목사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장로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모든 사람을 통해 지혜를 말씀하신다면 교회에서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더 열려있으십시오. 그래야 나도 갇히지 않고 이 시대 하나님이 소리에 열려있을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하나님이 불편하게 다가오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내 생각 정반대의 방향에서 손짓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성서해석도 기도도 말씀도 담론도 구성원 모든 사람들이 주체화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떠먹여 주는 건 누구나 편합니다. 그런데 떠먹여주는 것에 길들여지다보면 모든 이들은 획일화되어가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잃어갑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소중한 고유성을 상실해 간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앙공동체라면 하나님께서 개체에게 주신 고유한 아름다움이 마음껏 발현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부탁하고 설교를 부탁하고 말씀나눔을 하고 그런 날을 교회를 안나오고 그러시지만 한사람이 가장 좋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해도 모든 사람이 부족하게 가꿔가는 것보다 못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실제 해보지만 힘들고 어렵지만 그게 훨씬 더 풍요로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해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 감리교 교리적 선언의 서문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이 되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느 것도 문제삼지 않아야한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감리교의 교리를 밝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지 우리가 함께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교리, 생각이 다른 것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리교회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떤 기도를 드려도 어떤 설교를 해도 어떤 사람이 와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떤 방식으로 음식을 해도 그 안에 진정성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통해 열린 마음으로 배울 수 있는 그런 교회를 희망합니다.
교육도 마찬가집니다. 일반 학교에서는 교재가 필요하고 가르칠 교과과정의 내용들이 필요하지만 저는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속에서 아이들이 아 세상은 따뜻하구나 세상은 신뢰할만하구나, 나는 사랑안에 존재하구나, 산다는 건 때로는 힘들지만 그래도 살만한거구나 이런 걸 배우는 곳이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거 아닌가요? 저희가 일일교사를 자원하는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이유도 특별한 교육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아이들과 더불어 신나게 놀면서 일치(신비)를 경험을 하고 행복의 경험을 하고 따듯한 경험을 한다는 그게 기독교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말씀나눕니다. 지난 주에 삶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삶을 놓치지 말아야한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현실 너머의 초월의 세계는 종교인에게 있어서 저는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초월이 하루아침에 로또에 당첨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일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느 날 ‘아하’하는 깨달음이 일어나고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사람과 하나되고 사랑 때문에 현실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고 사랑 때문에 넘어설 수 없는 관계를 극복하고 사랑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이와 하나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너머서는, 일치와 용서와 사랑의 신비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기적을 바라지 않고 일상의 깨달음을 길러내고 사랑과 용서의 힘을 길러내면서 평범한 일상을 기적과 신비처럼 살아낼 수 있는 교회, 저는 그런 교회를 여전히 희망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교회를 꿈꾸십니까? 답이 아니라 진지한 질문이 더 나은 교회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