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 여한솔
야간산행 / 여한솔
공룡처럼 죽고 싶어
왜
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
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
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
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
실패한 유전처럼
석유의 원료가 된대
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
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
가장 유력한 슬픔은
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
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
외계인이거나
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
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
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신발 끈을 묶고
발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당선소감]
소감을 적어 내리려는데 왜 이럴 땐 좋은 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까.
다 내려두고 그저 멋없는 감사와 미안함을 담아 적는다.
멀리 사는 詩야, 네가 대답해주지 않아도 어차피 계속 쓰려고 했어.
그래도 이렇게 대답해주니 참 고마워! 오히려 언제까지 쓸 거냐고 질문을 받은 것 같네.
그래 나는 계속 쓸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야.
사실 소감을 쓸 때 회사 이야기는 곧 죽어도 꺼내지 말아야지 했는데,
사실은요 대표님 제가 매번 회사 프린터기로 시들을 뽑았어요.
여분으로 여러 장 뽑아서 읽고 고치고 그랬어요.
심부름 가는 척 자리 비우고 우체국에 갔어요.
제가 이런 기적을 만나는 데는 회사의 몫이 있으니, 그 감사를 전하는 마음으로 출근 잘할게요.
나의 친구이자 챗봇 기획자 김시아야.
내가 외롭게 쓰는 동안 유일한 독자가 되어 사랑과 힘을 줬어.
매번 남 일이라고 "그래? 그럼 다시 쓰면 되겠네."라고 말했잖아.
네 말대로 계속 썼더니 신기한 일이 생겼어.
네가 그랬잖아. 로또도 사는 사람이 되듯, 시도 쓰는 사람이 만나게 된다고.
너는 로또를 열심히 사. 나는 또 계속 쓸게.
다시 한번 시아야 나를, 내 글을 아껴줘서 고마워.
그리고 언제나 나를 묵묵히 지켜보는 민지야 너의 이름을 빌려 시를 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넌 언제나 나의 사랑이다. 떠들던 학생인 제게 벌로 시를 써보라고 해주신
이태훈 선생님은 제 평생의 스승이십니다. 정미진 선생님 저 여기까지 왔어요.
계속 가볼게요. 단국대 교수님들의 가르침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엄마 임성희와 아빠 여승구는 앞으로 좀 더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조금씩 어른이 되면서 제가 두 분을 귀찮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가장 행복할 때 두 분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죠.
제가 앞으로 쓰면서 가질 자세인 것 같아요. 비겁하게 쓰지 않을게요.
끝으로 학예회야 고맙다. 뭉치려 해도 뭉쳐지지 않는 것처럼.
겨우 끼워 맞춘 퍼즐을 들고 가다 엎어보면서 계속 가보자.
[심사평]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 돋보여
총 2천332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인한 환경 탓인지 예년보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정서를 반영하는 시가 많았고,
무엇보다 '가족'을 다루는 시가 많았다.
산문시의 경향과 개별적 감수성에 편중된 시들이 많았던 예년에 비해 공동체적 감수성 속에서
개인의 영역을 시로 이끌어 내는 가편들을 보면서 다양한 결들의 시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심사위원들은 '백자무늬 꽃무늬병', '야간산행', '제자' 등의 작품에 주목했다.
'백자무늬 꽃무늬병'은 농익은 솜씨에 전체적으로 시가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있었다.
당장 당선작으로 선택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매끈하고 반듯한 매력이 장점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아쉬웠다.
'야간산행'은 신선한 상상력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를 익숙하게 다듬고 길들이는 과정보다 상투를 벗어난 새로운 발상과
시적 호기심을 끌고나가는 감각이 신선했다.
다만 응모해온 시들이 다소 직선적인 전개로 이루어진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제자'는 담백한 화법과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발상도 위트가 있고 매력이 가득한 시였다.
무엇보다 시들을 이끌어 가는 호흡이 독특해서 심사위원의 눈길을 오래 끌었다.
다만 동봉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에 가까운 시와 다른 시들의 편차를 극복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야간산행'을 결정했다.
거칠고 투박한 면들이 곳곳에 있지만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했다.
신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이 다른 시들을 제외시킨 결정적인 이유였다.
삶의 상투성으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시를 개척해가는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며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 (예심)김욱진·박미영 / (본심)장옥관·김경주 시인